20세기 음악 혁명을 일으킨 작곡가 쇤베르크…‘12음 기법’ 無調주의 음악으로 새 시대 열어
입력 : 2014.10.17 17:31:15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향수>는 망명객의 상실감과 방황을 담은 소설이다. 소련군에 체코가 점령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당해 프랑스로 망명한 쿤데라의 파란만장한 삶이 녹아 있다.
이 소설에서 쿤데라는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년)를 언급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쇤베르크는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음악계에서 추방됐다. 1941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50년 어느 미국 기자가 쇤베르크에게 순진함을 가장한 질문을 했다. “망명이 예술가들에게 창조력을 상실하게 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조국이라는 뿌리가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영감이 메마른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난 지 5년밖에 안됐는데도 미국 기자는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던 조국에 대한 그의 애정 결핍을 용서하지 않았다.
쿤데라는 쇤베르크 일화를 통해 고국을 등진 망명객의 고통을 전한다. 쿤데라 또한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쇤베르크는 고국과 동시에 음악 업적마저 박탈당했다. 그의 무조음악(無調音樂)도 같이 추방당했다. 난해하고 엘리트적이며 독일 정신에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무조음악은 단조나 장조 등 조성의 법칙을 부정하고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12음을 균등하게 사용한다. 쇤베르크는 12음계 미학으로 음악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확신했다. 자기 덕분에 독일 음악의 지배가 향후 10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서는 오랫동안 금지됐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음악 망명객
20세기 현대 음악의 문을 연 쇤베르크는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작곡가다. 불협화음과 독특한 선율로 가득한 그의 음악은 기괴하다는 혹평과 동시에 음악의 혁명이라는 극찬이 엇갈린다.
<쇤베르크 달에 홀린 피에로>(음악세계 펴냄) 저자 오희숙은 “쇤베르크 음악 세계는 퍼내고 퍼내어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깊은 샘과 같았다”고 평가했다.
쇤베르크의 대표작 <달에 홀린 피에로>(1912년)는 작곡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대 음악 세계에 가기 위해 반드시 정복해야 할 거대한 산이라는 평도 있지만 일반 관객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국내 공연장에서는 거의 연주되지 않을 정도다.
초연 때 혹평은 더 심했다. 비평가들은 “이것이 음악이라면, 하느님께 기도드리오니 두 번 듣게 하지 마소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에 크게 비웃던 관객들은 어느새 깊은 공감과 박수를 보냈다. 동료 작곡가들과 음악가들도 그 가치를 안다. 쇤베르크와 함께 20세기 현대 음악을 이끈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1882~1971년)는 “창조성과 천재성, 개성이 집약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현대 음악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곡은 연주하는 것도 싶지 않다. 이 곡을 많이 녹음한 프랑스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89)는 “이 곡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 작품 분위기는 공포나 스릴러 영화에 깔리는 배경음악처럼 기괴하다. 낭송하는 성악가는 음치가 아닐까 느껴질 정도로 이상한 소리를 낸다.
오희숙은 “가끔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들으면서 혼자 웃는데 정말 ‘발광’을 하는 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트릴(2도 차이 나는 음 사이를 빠르게 전환하는 꾸밈음)이나 글리산도(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연주) 부분이다. 발광한다는 한국말이 어쩌면 쇤베르크가 말한 ‘동물적인 영혼의 움직임 표현’과 잘 맞는 것 같다”고 저서에 썼다.
이 작품은 연극배우이자 성악가 알베르티네 쳄메가 벨기에 문인 알베르 지로의 연작시 <달에 홀린 피에로>를 음악에 담아달라고 요청하여 쓰였다. 피에로의 죽음을 교수대와 참수, 자살, 투신 등으로 다룬 작품이다. 피에로의 운명을 예술가의 순교와 동일시한 시이기도 하다.
쇤베르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 피콜로, 클라리넷, 베이스 클라리넷 8개 악기 반주로 속삭임이나 탄성, 외침 등이 포함된 낭송조 창법을 들려줬다. 3부 21곡 구성으로 박자를 잃은 선율, 이상한 느낌을 주는 음향, 복잡한 구성, 야릇한 분위기를 띠는 획기적인 곡이었다. 기이하고 모호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쇤베르크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으며 무대에 수없이 올랐다.
낭만적인 작품 <정화된 밤>도 있어
좀 더 듣기 편한 대표작으로 <정화된 밤>이 있다. 1899년 25세였던 쇤베르크가 무조주의를 받아들이기 전 작품이다. 그는 단 3주 만에 첫 작품을 완성했다. 후기 낭만주의 특징이 나타나는 작품으로 리하르트 데멜의 연작시 <정화된 밤>에 선율을 붙인 현악 6중주곡이다.
1917년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하고 1943년 개정한 이 곡은 아름답고 로맨틱한 밤의 신비를 담은 녹턴(야상곡)이다. 차가운 달빛 아래 나무 사이를 거니는 남녀의 사랑을 담았다. 여자는 한때 만났던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한다. 남자는 여자와 뱃속 아이를 너그럽게 품어준다. 다른 남자의 아이지만 그의 자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곡은 마치 발을 질질 끄는 듯 시작 부분에서 두 사람의 사랑으로 변화된 밤을 의미하는 찬란한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까지 감각적으로 풀어 나간다.
그가 편곡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도 귀에 착착 감긴다. 1937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곡 제1번 g단조 Op.25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2월 크리스티안 예르비가 지휘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한 바 있다.
음악 칼럼리스트 황장원 씨는 12음 기법을 창안해 새로운 음악 개척의 첨병 역할을 자처했던 쇤베르크가 낭만파 작곡가들 중에서도 유독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브람스를 선택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정작 쇤베르크는 브람스 음악의 진보성을 주목하고 그 가치를 역설한 바 있다. 쇤베르크는 브람스의 실내악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이 4중주곡을 특히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황씨에 따르면 쇤베르크는 편곡 과정에서 브람스의 양식을 엄격히 유지하고 브람스가 지켰던 법칙을 세심하게 존중하려 했다. 그 결과 작품은 원작의 매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다 신선한 울림과 교향악적인 태세를 갖추게 됐다. 어떤 이는 이 편곡판을 가리켜 ‘브람스의 다섯 번째 교향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피아노 4중주곡 제1번 g단조는 브람스가 20대 후반인 1861년에 완성한 작품. 그가 남긴 세 편의 피아노 4중주곡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은 명곡이다. 4악장 구성이며 통상 연주 시간이 40분을 넘기는 대곡이다.
황씨는 “쇤베르크의 편곡은 목관 파트를 중용해 브람스 음악 고유의 진중한 이미지를 한층 심화하는 한편 타악 파트를 적극 활용해 극적인 호흡을 강화하고 피날레 악장의 외면적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분석했다.
화가와 작가로도 인정받았던 팔방미인
쇤베르크는 1874년 9월 13일 헝가리 출신 구두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부터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천재였다. 18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은행 직원연수과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음악 열정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1895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인 폴리휨니아에 첼리스트로 입단했다. 지휘자 알렉산더 젬린스키는 쇤베르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작곡을 가르쳤다. 쇤베르크가 작곡한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줬다.
쇤베르크는 브람스와 바그너, 말러, 바흐, 모차르트 등을 연구하면서 작곡 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말러는 쇤베르크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 아꼈다. 쇤베르크는 말러를 ‘성자’로 추앙하며 따랐다. 불행하게도 쇤베르크의 작품은 환영받지 못했다. 1907년 교향곡 1번을 초연했을 때 청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6년 후 이 곡을 다시 연주하자 관객들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쇤베르크는 “지금(1914년)까지가 ‘평범한’ 시대였다면 우리 시대 음악은 아주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12음 기법’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아 2차 빈 음악파를 결성했다.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한스 아이슬러가 대표적이다. 쇤베르크는 음악이론가로도 활약했다. 그의 저서 <화성 이론>과 <음악 작곡의 기초>는 오늘날에도 음악 이론과 작곡 교육에 사용된다. 쇤베르크는 팔방미인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은 프란츠 마르크와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과 같이 전시해도 좋을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연극과 시, 정치 문제와 유대인들에 대한 책도 썼다. 나치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보스턴 음악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캘리포니아로 옮겼다. 이 시기에 조성을 가진 작품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12음 기법 작품을 멈추지 않았고 걸작 <바르샤바의 생존자>와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등을 남겼다.
그에게는 ‘13 공포증’이 있었다. 그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 제목 철자를 <Moses und Aaron>으로 하지 않고 <Moses und Aron>으로 정한 이유는 알파벳 수가 13개가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13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76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유도 자릿수 두 개를 합하면 13이 되어서다. 1951년 7월 13일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영면했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