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반항하는 새, 아무도 길들일 수 없어요. 본인이 거절하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답니다. 협박도 기도도 안 통해요.”
1875년 3월 3일 프랑스 파리 코미크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작곡가 비제(1838~1875년)의 오페라 ‘카르멘’. 농염한 집시 여인 카르멘이 부른 아리아 ‘하바네라’는 부르주아 남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남자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오페라 여주인공에 익숙한 관객들은 방종에 가까운 카르멘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 여인은 순진한 남자를 파멸시킨다. 카르멘은 감정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를 바꿀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사랑은 어린 집시랍니다. 제멋대로지요. 당신이 날 싫다고 하면, 난 당신을 사랑하죠.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조심하세요. 당신이 잡았다고 생각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 버리죠.”(‘하바네라’ 가사)
방탕한 여주인공만큼 놀라운 것은 음악이다. 당시로서는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선율은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경쾌하다.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과 규범을 철저히 비웃는다.
담배 공장에서 카르멘이 등장할 때도 파격적이다. 기존 오페라에서 여주인공이 등장할 때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선율이 나온다. 금관악기와 현악 파트 중심으로 오케스트라 전주가 상승음계로 진행된다.
그러나 카르멘이 나올 때는 콘트라베이스가 저음부를 음산하게 연주한다. 이후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로 운명의 서곡을 힘차게 노래한다. 여주인공이 메조소프라노인 것도 전통을 일탈한다. 기존 오페라에서는 소프라노가 극의 중심을 이끈다. 하지만 비제가 음역이 낮은 메조소프라노에게 카르멘 역을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토리 자체가 음습하고 파멸적이기 때문이다.
작곡가를 죽음에 몰아넣은 오페라
사랑이 식으면 또 다른 남자를 찾아 떠나버리는 이 여인은 작곡가인 비제(1838~1875년)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오페라 ‘카르멘’ 초연에 실패한 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1875년 6월 3일 과로와 스트레스, 호흡기질환이 겹쳐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36세에 불과한 나이였다.
사인은 호흡기 질환이지만 심한 우울증도 한몫했다. 오페라 작곡에 한창 물오른 그가 야심차게 내놓은 역작인데도 불구하고 파리 관객들의 냉대를 받아 엄청난 패배감을 느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캐릭터와 살인으로 종결되는 결말, 하류계층이 등장하는 드라마라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비천한 집시들과 도둑 떼, 담배공장 여직공들이 등장하고 사람을 찔러 살해하는 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고상한 파리지앵들은 반사회적이고 인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혐오감을 느꼈다.
당시 프랑스는 제국주의의 팽창 한계로 식민지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자 여성과 노동자 계급이 권익을 주장하며 결사체를 만들었다. 가부장제도와 부르주아를 비판하며 자유를 외쳤다. 여자를 구속하는 정절과 도덕에도 반기를 들었다. 어찌 보면 여성해방운동의 첫걸음 같은 오페라였다.
기득권층은 구속받기 싫어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카르멘이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오페라 극장은 부르주아 계층의 사교 장소였다. 훌륭한 가문과 부유층 청춘 남녀들이 탐색전을 벌이면서 결혼 상대를 찾는 곳인 것이다.
코미크 오페라극장 지배인 카미 뒤 로클도 처음에는 ‘카르멘’ 공연을 꺼렸다. 원작인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 ‘카르멘’(1845년)이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 장면과 불온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오페라를 주로 공연하는 이 극장 무대에 올리기에 너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당대 최고 메조소프라노이자 카르멘 역을 맡은 셀레스틴 갈라 마리에 등 성악가들이 비제를 지지했다. 대본 작가 앙리 메이야크와 뤼도빅 알레비의 의지도 완강했다.
결국 타협안을 마련했다. 원작에는 없는 순진하고 정숙한 미카엘라를 돈 호세의 약혼자로 등장시켰다. 집시와 밀수업자들을 희극적으로 표현하고, 난폭하고 잔인한 카르멘 남편 가르시아 역할을 없앴다. 돈 호세가 카르멘을 죽이는 장면은 마지막에 집어넣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대에 올랐지만 관객 반응은 냉담했다. 성악가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언론 비평도 혹독했다.
그래도 이 작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비제는 죽기 전날에도 오스트리아 빈 공연 계약을 체결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빈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런던과 브뤼셀, 뉴욕,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유럽과 미국 주요 도시에서 선풍을 일으키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888년 독일 철학자이자 음악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년)는 “바그너에 필적하는 작곡가”라며 비제를 극찬했다. 또 ‘찬란한 태양의 음악,’ ‘풍요롭고 정밀한 건축 작품’이라는 칭송을 ‘카르멘’에 붙였다.
“이보다 더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곡조가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일찍이 들어본 적 있는가. 하지만 얼마나 성공적으로 만든 선율인가. 겉치레로 꾸며대지 않고 속임수가 전혀 없으며 거창한 환상이 담겨 있지도 않은 곡조이니 말이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44~1949년)는 ‘카르멘’에 대해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울 수 있는 최고 교과서”라며 감탄했다.
외국에서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고향인 파리에서는 오랫동안 대접 받지 못했다. 초연된 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공연되기 시작했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수지오페라단이 공연한 비제 오페라 ‘카르멘’. <사진제공=수지오페라단>
국내에서 가장 사랑 받는 오페라
세월이 흐르면서 ‘카르멘’은 화려한 합창과 아리아, 빈틈없는 무대 구성으로 관객을 녹이고 있다. 주요 노래 ‘하바네라’와 ‘사랑은 들새,’ ‘투우사의 노래,’ ‘꽃노래,’ ‘나는 이젠 두렵지 않아’ 등은 전 세계 음악 교과서에 나올 정도다. 국내에서는 1년에 2~3차례 꼭 공연될 정도로 사랑 받고 있는 작품이다. 2년 전 창단 50주년을 맞은 국립오페라단의 설문 조사 결과, 가장 보고 싶은 오페라 1위를 차지했다. 응답자 1282명 중 697명(54%)의 선택을 받았다. 2위를 차지한 푸치니 ‘나비부인’(214표), 3위 모차르트 ‘마술피리’(206표)보다 3배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도대체 왜 카르멘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사로잡을까. ‘카르멘’에 출연했던 성악가들은 처절한 비극, 관능적인 선율, 거침없는 욕망을 꼽았다. 드라마틱하고 다양한 감정이 한국인들의 정서와 잘 맞았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매혹적인 카르멘으로 꼽히는 메조소프라노 케이트 올드리치는 “카르멘과 돈 호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돈 호세도 나쁜 여자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희생자가 아니라 욕망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가해자”라고 말했다.
카르멘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가 바로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는 투우사 에스카미요다. 바리톤이 맡는 역할 중에서 가장 정열적이다. 황소에게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아리아 ‘투우사의 노래’로 가창력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다.
한국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카르멘은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검고 치렁치렁한 긴머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정열적인 집시여인으로 나오다가 현대적인 연출에서는 아슬아슬한 속옷만 입고 등장해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21세기형 카르멘의 몸매는 영화배우 뺨친다.
지난 5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수지오페라단이 공연한 ‘카르멘’ 주인공은 실제로 영화배우 출신이다. 조지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니노 슈굴랏제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영화 ‘왈츠 온 더 페코라’에 출연했던 배우이다. 순수와 퇴폐 이미지를 동시에 지닌 그는 카르멘 역할만 100번 넘게 공연했다.
영원한 오페라 남긴 비운의 천재
짧은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비제는 많은 오페라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대표작 ‘카르멘’과 더불어 ‘아를의 여인,’ ‘진주잡이’가 영원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1838년 10월 25일 파리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악 교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부모에게 음악 재능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뛰어났다. 1848년 불과 10세에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A.마르몽텔에게 피아노를, F.브누아에게 오르간과 푸가를, P.지메르만에게 작곡을 배웠다. 오페라 작곡가 구노의 강의도 들었다. 1857년 19세에는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로 로마 대상을 수상해 3년간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돌아온 후 생계는 막막했다. 피아노를 가르치고 편곡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오페라 ‘진주잡이’(1863년 초연)가 리리크 극장 공모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에 들어선다. 이 오페라는 어부 두목과 진주조개잡이꾼이 한 여자를 두고 갈등하는 내용을 담았다. 생동감 있고 입체적인 등장인물, 세련된 작곡기법, 이국적 선율로 오페라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31세인 1869년 6월에는 은사인 알레비의 딸 주네비에브와 결혼식을 올렸다. 가장이 된 후 더욱 작곡에 몰두했다. 1872년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오페라 무대로 옮긴 ‘아를의 여인’은 호평을 받았다. 유작 ‘카르멘’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나 훗날 수많은 사람들을 중독시켰다.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인 카르멘은 팜 파탈(femme fatale)의 상징으로 연극과 무용, 영화, 그림으로 변주됐다. 발레 거장 롤랑 프티와 화가 피카소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