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찌를 듯한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한 핀란드의 숲 속. 소년은 그 곳을 거닐면서 몽상을 즐겼다. 어딘가에 몰래 살고 있다는 요정을 찾아 헤매고 동물들을 사냥했다. 자연과 벗하면서 성장한 소년은 조국 땅이 주는 영감을 음악에 담았다.
바로 핀란드의 국보급 음악가 시벨리우스(1865~1957년)로 산타클로스, 사우나와 더불어 핀란드를 상징하는 음악 영웅이다.
그는 음악으로 스웨덴과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핀란드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였다. 1899년 교향시 ‘핀란디아’는 민족 운동에 불을 지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의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행사로 기획된 연극 <역사적 배경>의 음악으로 작곡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줬던 이 선율은 러시아 폭정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애국가처럼 불렸다. 바로 1899년 ‘2월 선언’때였다. 러시아가 핀란드 의회정치를 폐지하고 불법 징병을 강행하자 민족의식이 폭발한 것이다.
시벨리우스는 가혹한 민족의 운명과 핀란드의 신비한 자연을 이 교향시에 담아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곡의 서두에서는 민중의 고난을 묵직한 관악과 애잔한 현악에 실었다. 비탄에 젖어있던 선율은 점점 격해지다가 단호해진다. 투쟁을 외치듯 팀파니와 나팔이 날카롭게 울어댄다. 한창 강하고 단단해진 리듬은 클라이맥스 이후 부드러워진다. 이내 아름다운 민요풍의 찬가가 흘러나오며 차분해진다.
러시아 정부는 이 곡의 파장을 우려해 연주를 금지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외국으로 나가 ‘핀란디아’가 아닌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를 강행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독립적인 관현악곡으로 연주해 세계에 핀란드 독립 문제를 알렸다. 지휘자 로버트 카야누스(1856~1933년)와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장엄한 선율을 들려주자 파리 청중이 갈채를 보냈다. 그 여세를 몰아 스톡홀름, 오슬로, 코펜하겐, 함부르크, 베를린, 암스테르담, 헤이그, 브뤼셀 등에서도 연주했다.
애국심과 자유를 향한 외침이 오롯이 담겨 있는 이 곡의 염원은 결국 이뤄졌다.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자 그해 12월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 국가로 탄생한 것이다.
예술성과 정치적 목표를 동시에 성취한 덕분에 시벨리우스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핀란드 정부는 시벨리우스가 살던 별장 위로 비행기가 날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가 조용하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비행 경로를 바꾼 것이다. 심지어 시벨리우스를 만나고 싶은 외국인들은 정부 허가를 받아야 했다.
법대 중퇴하고 작곡가의 길 선택
차갑고 강철 같은 푸른 눈, 굳게 다문 입. 시벨리우스는 태어나서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것처럼 생겼다. 전형적인 북구 사나이답게 억센 인상이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 인근 바닷가에 있는 시벨리우스 음악 공원에 있는 그의 두상 표정은 너무 심각하다. 핀란드 여류 조각가 엘라 힐투넨이 1967년 그의 사후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작품이다. 두상 옆에는 강철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기념비가 있다. 600개의 강철 파이프는 그의 강건한 음악 세계를 웅변한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그의 음악은 7세에 시작됐다. 핀란드 헤미린나에서 태어난 소년은 7세에 이모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군의관이었던 아버지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누나는 피아노, 동생은 첼로를 연주했다. 삼남매는 피아노 3중주를 연주하면서 놀았다.
몽상을 즐겼던 시벨리우스는 악보대로 치는 데 염증을 느끼고, 마음 내키는 대로 건반을 누르는 즉흥 연주를 더 좋아했다. 그때부터 작곡가 자질을 보인 셈이다. 14세에는 바이올린에 매료됐다. 군악대장에게 연주법을 배웠는데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으나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음악가의 생활이 불안정하기 때문이었다.
내성적인 시벨리우스는 부모의 뜻을 어기지 못했다. 결국 헬싱키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더 뜨거워졌다. 차선책으로 법대에 다니면서 음악 공부를 병행했다. 헬싱키 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마르틴 베겔리우스에게 음악 이론과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이미 음악원에 진학하기 전까지 실내악 소품 20여 편을 작곡했을 정도로 준비된 학생이었다.
작곡을 공부할수록 더 음악에 빠져들어 갔다. 결국 법대를 중퇴하고 작곡에 매진했다. 교내 현악4중주단에서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기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길도 생각했지만 교내 연주회 ‘사건’ 후 꿈을 접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도중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큰 실수를 했다. 무대 체질이 아닌 게 분명한데 어설픈 바이올린 연주자보다는 작곡가로 성공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헬싱키음악원에서 그는 좋은 벗이자 스승인 동갑내기 피아노과 교수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페루치오 부조니(1866~1924년)를 만나 지음지교를 나눴다. 친구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부조니는 시벨리우스가 유학을 떠날 때 브람스에게 제자로 받아달라는 추천서를 써줬다.
핀란드 국비 장학생으로 발탁된 시벨리우스는 독일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 베커(A. Becker)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훅스(R. Fuchs)에게 작곡법과 기악법을 배웠고, 브람스와도 교유할 수 있었다. 다시 빈으로 옮겨 골드마르크(K. Goldmark)의 문하생이 됐다.
음악 본고장에서 대가들을 사사하면서 그의 시야는 더 넓어졌다. 특히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후안’을 듣고 교향시에 매료됐다.
32세에 국가 연금 받아 작곡에 전념
핀란드 지휘자이자 작곡가 카야누스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이노 교향곡’ 연주는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됐다.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담은 이 교향곡은 시벨리우스가 조국의 전통 음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1892년 민족주의 교향곡 ‘쿨레르보’의 초연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주류 음악계에 진입했다. 모교인 헬싱키음악원 교수로 임용되어 작곡과 바이올린을 가르치게 된다. 약혼녀 아노이와 결혼식도 올렸다.
그는 핀란드 민속 음악을 세계적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다른 국민주의 작곡가들처럼 자국의 전설과 설화, 서사시를 소재로 작품을 많이 썼다. 대표작인 교향곡 ‘쿨레르보’와 ‘레민케이넨’, ‘카렐리아’ 등은 한결같이 민족 정서가 넘친다. 32세의 젊은 나이지만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 핀란드 정부는 1897년 의회법까지 개정해 그에게 종신연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작곡에만 전념하라는 국가의 배려였다.
내친 김에 학교를 그만두고 작곡에 몰두했다. 대표적인 성과물이 교향곡 2번(1902년)과 바이올린 협주곡(1903년)이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은 오늘날 클래식 음악회에서 멘델스존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더불어 가장 자주 연주되는 걸작이다.
시벨리우스는 1904년 이 곡을 직접 지휘해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의 능력 부족으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교향적 색채를 더 입혀 이듬해 베를린에서 연주했다. 위대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휘와 바이올리니스트 카렐 할리르의 협연에 힘입어 갈채를 받았다. 시벨리우스를 추앙하는 러시아의 바이올린 거장 레오폴드 아우어와 야샤 하이페츠가 곡의 핵심을 잘 살려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시벨리우스는 바이올린의 한계를 뛰어넘은 기교로 곡의 절정을 이끌었다. 그의 조국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북유럽의 서늘한 기운과 신비한 마력이 곳곳에 흐른다. 바이올린 선율은 서정적이면서도 애절하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 같다. 당시 귀를 앓았던 시벨리우스는 베토벤처럼 청각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절박한 심정을 날카로우면서도 뜨거운 선율로 승화했다.
건강을 걱정한 그는 1904년 헬싱키에서 30㎞ 떨어진 예르벤페 호숫가에 집을 짓고 창작에 몰두했다. 핀란드 민족 정서를 바탕에 깔았지만 예전의 국민주의적인 태도와 달리 좀 더 세련된 선율을 선보였다. 1909년 발표한 현악 4중주곡 ‘친애하는 목소리’와 1911년에 작곡한 ‘교향곡 4번’은 내면으로 파고드는 깊이가 느껴진다.
조국은 그의 음악적 업적을 지속적으로 높이 평가해줬다. 1915년 전국적으로 그의 50세 생일을 축하해주고 연금도 올려줬다. 그 보답이라도 하듯 교향곡 5번, 6번, 7번을 세상에 내놓았다. 특히 7번은 교향곡의 모든 표현 가능성을 담은 걸작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1926년 뉴욕에서 초연한 교향시 ‘타피올라’는 극찬을 받았다.
1917년 10월 혁명의 결과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다. 핀란드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다. 그토록 원하던 꿈이 이뤄졌는데 이상하게도 시벨리우스는 ‘타피올라’ 이후 별다른 곡을 쓰지 못했다. 30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래도 20세기 민족주의 음악을 확립한 그에 대한 존경은 그치지 않았다. 60세 생일에 또 한 번 연금이 증액되고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70세 생일에도, 80세 생일에도 국가 축제가 계속 열렸다. 심지어 독일에서도 그에게 괴테 메달을 수여했다.
핀란드 음악 영웅은 1957년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자택에서 관을 떠나보낼 때 사위가 시벨리우스의 만년 작품 ‘폭풍’을 연주했다. 시신은 그의 집 뜰에 안장됐고 후에 아내도 그 옆에 묻혔다. 그렇게 시벨리우스는 핀란드를 세계적인 음악 강국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