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작은 피리였다. 아버지의 서랍 속에 있는 플래절렛(세로로 부는 목관악기)을 발견해 독학으로 연주했다. 기특하게 생각한 부모는 플루트를 선물하고 정식 레슨을 받게 해 줬다. 기타도 배웠다. 작은 시골 마을이라 피아노는 없었다.
작은 악기로 음악을 시작한 이 소년은 훗날 엄청난 규모의 교향곡들을 썼다. 바로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1803~1869)다. 어릴 적 마음대로 악기를 다뤄보지 못한 한(恨) 때문일까. 그는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작품들을 주로 썼다.
그의 대표작인 ‘레퀴엠’(1837년)은 무대 위 대편성 오케스트라 외에도 4개의 소규모 오케스타(관현악단)를 사방에 배치한 대곡이다. 무대 위에서는 호른 12대, 바순 8대, 팀파티 8쌍을 투입했다. 다른 작곡가들 곡에서는 호른 8대 이상 동원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바그너의 음악극 ‘발퀴레’와 말러 교향곡 6번, 8번에 호른 8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12대는 전대미문이었다.
이게 끝은 아니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테너 독창자까지 등장해야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을 연주할 수 있다. 전쟁에서 비롯된 엄청난 죽음의 공포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는 알제리 전쟁에서 전사한 프랑스 군인들을 추도하기 위해 이 곡을 썼다.
베를리오즈의 물량 공세는 한계를 모른다. 또 다른 종교음악인 ‘테 데움’(신이여, 당신을 찬양합니다)는 하프 12대를 요구한다. 대부분 교향곡은 하프 1~2대가 등장한다. 이런 대편성을 감당할 만큼 재정이 넉넉한 오케스트라가 별로 없어 오늘날 잘 연주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국내에서 그의 작품이 집중 조명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다.
집요한 사랑이 탄생시킨 걸작 ‘환상교향곡’
그나마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환상 교향곡’. 26세에 실연의 상처로 자살을 기도한 베를리오즈가 꿈속에서 끔찍한 환상을 본 후 쓴 곡이다.
그는 1827년 파리에서 영국 셰익스피어 극단의 ‘햄릿’을 보러 갔다가 오펠리어 역할을 맡은 해리어트 스미드슨에게 반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열렬한 사랑에 불타올랐다. 해리어트가 출연하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까지 본 후 짝사랑의 열병은 점점 더 깊어갔다. 온 마음을 담아 편지 공세를 하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영국 유명 여배우가 무명의 파리음악원 학생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1829년 그녀의 출신 지역인 아일랜드 민요와 토마스 모어의 시를 토대로 가곡을 작곡해 작은 음악회까지 열었다. 역시 스미드슨이 여기에 올 리 없었다.
대답 없는 상대에 점점 지쳐 사랑이 증오로 바뀌었다. 베를리오즈는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에게 눈길을 준다. 청혼까지 했지만 그녀의 어머니 반대로 좌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리는 피아노 제작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잇따른 사랑의 실패에 분노한 베를리오즈는 그녀의 남편과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포기했다.
대신 꿈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죽인다. 마약을 다량 복용한 후 빠져든 깊은 잠에서다. 오매불망 그리던 해리어트를 죽이고 단두대로 끌려가는 악몽을 꾼다. 마리보다 해리어트에 대한 애증이 더 깊었기 때문이다.
자살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경험을 토대로 만든 걸작이 바로 ‘환상 교향곡’. 지독하게 사랑했던 여인 해리어트가 하나의 선율(고정 악상)이 되어 유령처럼 곡 전체를 배회하는 작품이다.
모두 5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1830년 파리음악원에서 초연됐다. 교향곡으로는 드물게 곡 해설이 자세하게 쓰여 있다. 베를리오즈는 ‘한 예술가의 생애에 대한 에피소드’라는 전체 부제를 붙인 후 실연의 상처와 자살 과정, 꿈속의 환상 등을 자세하게 써놓았다.
1악장에는 ‘꿈, 정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젊은 음악가가 매혹적인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무서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을 몽환적인 선율로 풀어나간다.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기품 있는 합주가 사랑하는 여인을 상징하는 고정 악상이다.
2악장의 부제는 ‘무도회’. 여인을 만난 후 음악가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떠들썩한 무도회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낯선 남자와 춤을 추며 사라지는 여인을 보며 음악가는 괴로워한다.
3악장 ‘들녘의 정경’에서는 폭풍 전야의 불길한 예감이 곡 전체를 휩쓴다.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에서는 질투에 눈이 멀어 여인을 살해하고 만다. 현악기와 팀파니가 불안하게 울리고 악마적인 선율은 소름끼칠 정도로 날카롭다.
5악장 ‘마녀 축일의 꿈’에서는 유령들이 남자를 땅에 매장시키려 한다. 멀리서 애인의 멜로디가 들려오지만 예전의 고상한 선율이 아니다. 야비하고 천박하며 기괴하게 변해 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해 종이 울린다.
다양한 관현악법을 들려주는 이 작품은 낭만주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호평을 받는다. 파격적인 연주법도 등장했다. 5악장에서 마치 해골들이 춤을 출 때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듯 오싹한 느낌을 주기 위해 활대로 현을 치는 콜 레뇨(Collegno) 주법을 시도했다. 베를리오즈는 한 음을 빠르게 반복하는 트레몰로(Tremolo)와 두 줄을 한꺼번에 긋는 이중음, 현을 손으로 퉁기는 피치카토(Pizzicato) 주법도 즐겨 사용한 혁신적인 작곡가다.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고정악상은 바그너의 음악극에 사용되는 유도동기(등장인물의 테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절망의 수렁에 빠져 작곡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환상 교향곡’은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바로 꿈에도 그리던 여인 해리어트가 그의 마음을 받아주는 계기가 됐다. 극단의 흥행 실패로 내리막길을 걷던 이 여배우는 마차 사고로 발을 다친 후 실의에 빠져 있었다. 반면 베를리오즈는 ‘환상 교향곡’ 성공으로 음악계 주목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1833년 결혼식을 올렸다. 자녀도 한 명 낳았지만 성격 차이로 파경에 이른다. 이기적이고 아름다운 여배우와 병적으로 민감하고 정열적인 음악가의 결합은 결국 온전하지 못했다.
가혹한 운명에도 꺾이지 않은 음악 열정
운명은 그렇게 잔인했다. 그의 인생은 잦은 불행으로 삐걱거렸다. 음악을 시작할 때도 반대에 부딪혔다. 의사 아버지는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다. 베를리오즈는 어쩔 수 없이 파리 의과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의학보다는 오페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화성학’ 책만 자꾸 뒤적거렸다.
결국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재능은 금세 빛을 발했다. 1830년 로마대상을 수상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 곳에서 서곡 ‘리어왕’, ‘로브 로이 맥그리거’ 전주곡, 모노 드라마 ‘렐리오’ 등을 작곡했고 2년 후 이 작품들을 들고 프랑스로 귀국해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1838년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가 참패했다. 파리 청중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사람은 바로 당대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파가니니(1782~1840)였다.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는 베토벤을 계승한 작곡가이며 이 시대 최고 작곡가”라고 극찬했다. 작곡료 2만프랑을 주며 작곡까지 의뢰했다. 베를리오즈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해 파가니니에게 헌정했다.
파가니니는 베를리오즈에게 엄청난 가능성과 자신감을 선물했다. 보수적인 음악계에서는 평가절하 당했지만 베를리오즈는 음악 열정을 불태웠다.
1840년에는 프랑스 정부 요청을 받고 7월 혁명 10주년 행사에서 연주될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을 작곡했다. 군악대 200여 명을 이끌고 파리를 행진하며 연주한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로서 영향력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오페라 실패 후 파리 극장과 멀어졌고 간혹 편곡 요청만 들어왔을 뿐, 본격적인 작품 의뢰를 하는 곳은 없었다.
파리에서 설 자리를 잃자 해외로 나갔고 1842년 벨기에와 독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의외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관객들도 베를리오즈의 작품에 환호했다.
그러나 파리로 다시 돌아오니 달라진 게 없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평론까지 써야 했다. 1845년 오라토리오 ‘파우스트의 겁벌’ 연주 실패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친구들의 도움으로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지만 낙심한 베를리오즈는 1847년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떠나 버린다.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면서 큰 돈을 벌었다. 영국 런던 돌위리렌 극장 지휘자로 일하게 되면서 안정된 직장도 얻었다.
하지만 1848년 파리로 돌아온 후 불행이 겹쳐 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별거 중이던 아내 해리어트가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그 해 2월 혁명 후 파리 음악계도 완전히 침체되어 있었다. 1850년에는 필하모닉 협회를 설립해 지휘자로 열정적으로 활동했으나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신경통을 견디며 1858년 오페라 ‘트로이의 사람들’을 완성했으나 초연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재혼한 아내 마리도 1862년 운명을 달리했다. 5년 후에는 뱃사람이 된 외아들 루이마저 떠났다. 고독한 날들을 보내던 베를리오즈는 러시아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시베리아 추위가 그의 병을 악화시켰다. 프랑스 남부에서 요양을 했지만 결국 1869년 3월 향년 65세로 파란만장한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사랑했던 한 남자는 쓸쓸하게 떠났지만 그의 그림자는 후세에도 강렬하게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