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기괴하고 파격적인 ‘1001가지 스타일’…20세기 클래식 혁명가 스트라빈스키
입력 : 2013.12.20 11:01:09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연주하고 있는 라디오 프랑스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사진제공 = 빈체로
1910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 ‘불새’. 오묘한 현악 선율에 이어 기묘한 관악 합주가 보태지자 화려한 불새가 나타났다. 이반 왕자는 그를 뒤쫓고 있었다. 날카로운 불협화음 후 불새는 왕자에게 붙잡힌다. 불새가 신비로운 힘을 지닌 깃털을 줄 테니 놓아달라고 하고 왕자는 그 청을 들어준다. 그러자 얼마 후 12명의 소녀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들은 사악한 마법사에게 사로잡혀 있으니 돌아가라고 한다. 멀리서 포악한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왕자가 결투를 결심하자 마법사와 괴물들이 나타난다. 왕자가 깃털을 흔들자 불새가 날아오고 마법사는 깊은 잠에 빠져든다. 왕자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청혼을 하고 불새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국적인 선율에 반해 버린다. 이 발레곡의 작곡자가 바로 불과 28세의 러시아 청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다. 공연을 관람한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1862~1918)가 무대 뒤로 찾아와 찬사를 보냈다. 훗날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1908~1992)은 ‘1001가지 스타일을 가진 작곡가’ ‘카멜레온 음악가’라고 극찬했다.
‘불새’로 일약 스타가 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발레단을 설립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에게 발탁됐다. 천재적인 흥행사였던 디아길레프는 젊은 음악가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스트라빈스키는 유럽 음악양식에 러시아 민요 선율을 녹여 파란을 일으켰다. 전통 화성을 파괴하고 혁신적 선율을 창조해 ‘음악계 이단아’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디아길레프 덕분에 발레 ‘페트루슈카’(1911년)와 ‘봄의 제전’(1913년)을 잇달아 작곡해 파리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현대인의 자화상 ‘페트루슈카’
발레 ‘페트루슈카’는 측은하고 왜소하게 생긴 인형 페트루슈카의 비극적 사랑을 고독하고 날카로운 선율에 녹였다. 막이 열리고 마법의 플루트가 연주되면 세 개의 인형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피노키오처럼 엉성하게 생긴 페트루슈카, 아름다운 발레리나, 아프리카 무어왕자 인형이 생명을 얻어 움직인다.
외로운 페트루슈카는 발레리나의 사랑을 얻으려 애쓴다. 하지만 발레리나의 마음은 돈 많은 무어 왕자에게 쏠려 있다. 절망한 페트루슈카는 신세를 한탄하고 슬픈 비명을 지른다. 스트라빈스키는 고통 받는 페트루슈카가 벽을 치고 화를 내는 장면을 클라리넷과 바순으로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했다. 페트루슈카는 발레리나와 무어왕자가 다정하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다. 갑자기 페트루슈카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놀란 발레리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만다. 열을 받은 무어 왕자는 페트루슈카를 매정하게 발로 차 버린다.
가엾은 페트루슈카는 무어왕자에게 쫓기다 결국 그의 손에 죽는다. 군중들은 눈 속에 쳐 박힌 불쌍한 페트루슈카를 넋을 잃고 쳐다본다. 늙은 마술사가 나타나 인형을 치우는데 교회 꼭대기에서 페트루슈카가 지켜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넓은 페테르부르크 광장에는 정적만 깔리며 발레는 끝난다.
서글픈 발레 동작과 암담한 선율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 이 작품은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이리저리 채이고 상처받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외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 페트루슈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이다. 불안한 사회에 단단하게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이 작품에는 러시아를 떠나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간 스트라빈스키의 고독한 삶도 투영돼 있다. 전쟁과 이념 갈등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던 그는 파리와 스위스, 미국 등을 전전했다.
‘봄의 제전’으로 지옥 문턱까지 갔던 스트라빈스키
승승장구하던 스트라빈스키가 시련을 겪게 되는 사건은 1913년 파리 상젤리제 극장에서 일어났다. 그가 작곡한 발레 ‘봄의 제전’ 공연은 관객들의 야유로 아수라장이 됐다. 작품에 선사 시대를 연상시키는 원시적인 리듬과 이교도적 분위기의 선율이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과격하고 직선적인 리듬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이 곡은 기존의 음악적 감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극한의 리듬을 사용했다.
더욱이 태양신에게 바치기 위해 선택된 처녀들이 제단 앞에서 이교도적 의식을 치르자 관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기독교 문화에 젖어있던 청중들이 분노하고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공연장은 난장판이 됐다. 경찰까지 출동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스트라빈스키는 한 달 넘게 앓아누웠다. 발레 ‘불새’와 ‘페트루슈카’의 성공 여세를 몰아 발표한 야심작이 외면을 받자 큰 상처를 입은 것. 안무를 맡은 러시아 최고의 발레리노 니진스키도 오랫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스트라빈스키는 훗날 자서전에 그 충격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 복잡한 악보는 많은 횟수의 리허설을 요구했다. 몽퇴는 평소의 숙달된 태도로 능숙하게 지휘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갑자기 조소가 터져 전주의 몇 마디만 들었을 뿐이다. 나는 객석에서 나왔기 때문에 판단을 내릴 자격은 없다. 나는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처음에는 고립되어 있었던 이들 시위 행위는 곧 연대를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반대 시위가 일어나서 금세 두려울 만치 큰 소동이 됐다.”
그런데 ‘봄의 제전’의 운명은 1년 후 급반전했다. 발레 없이 음악만 연주하자 갑자기 청중들이 환호를 질렀다. 이교도 의식을 다룬 발레 동작 없이 선율에만 집중하자 음악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듬지 않은 순수한 음향과 카멜레온처럼 천변만화하는 리듬, 도발적인 음색은 클래식의 혁명처럼 느껴졌다. 말랑말랑하고 우아한 낭만주의 선율에 익숙해져 있던 파리 시민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초연 당시 한바탕 몸살을 겪었던 ‘봄의 제전’은 여전히 대중에게 불편한 작품이다. 파격적이고 기괴한 리듬은 귀에 설익고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새로운 음악을 창조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독일 피나 바우쉬 무용단의 ‘봄의제전’ 공연. 사진제공 = LG아트센터
이념과 전쟁으로 오랜 타향살이
20세기 음악의 혁명을 일으킨 스트라빈스키는 1882년 6월 17일 러시아 오라니엔바움(현재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났다. 울창한 녹음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페테르부르크 오페라극장 성악가로 활약했다. 음악가 집안이라 자연스럽게 9세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화성법과 대위법 기초를 익혀 ‘타란텔라’ 등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11세에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지휘하는 차이콥스키를 보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스트라빈스키가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음악원 진학을 반대했다. 아들이 고달픈 예술가의 길을 걷기보다는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페테르부르크 법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법률에 집중하지 못하고 각종 음악회를 찾아다녔다. 방황하던 중에 당대 최고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의 아들을 만났다. 그 인연으로 그의 제자가 되어 음악 수업을 받는다. 스승의 격려로 풍부하고 색채적인 선율, 힘이 넘치는 원색적인 울림, 러시아 슬라브 민족 문화 전통이 깃든 음악을 완성해나갈 수 있었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향곡 Eb장조 op.1을 만들어 호평을 받는다.
이듬해에는 사촌 누이동생 카테린 노센코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 때 ‘목신과 양치기 소녀’ ‘꽃불’ ‘환상적 스케르초’ 등을 작곡했다. 발레곡으로 파리에서 명성을 얻은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로 떠났다. 그 곳에서 러시아 민요를 채집해 알리겠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그러나 얼마 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스위스 각지를 전전하며 생활고를 겪었다.
하지만 힘든 상황에 굴하지 않고 ‘신고전주의’ ‘고전으로의 회귀’라는 음악 목표를 세운다. 어린 시절부터 고전주의 작곡가 하이든과 베토벤을 존경했으며 그들의 음악을 토대로 새롭고 보편적인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이 때 ‘피아노와 관악기의 협주곡’ ‘오이디푸스 왕’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론’ ‘요정의 입맞춤’ 등을 열정적으로 작곡했다.
1934년에는 보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 프랑스 국적을 획득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무대에 서고 음반도 활발하게 제작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불운했다. 딸 류드밀라가 세상을 떠나고 아내 카테린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요양소에 입원했다. 베라 드 보스라는 새 연인도 생겼다.
1939년 아내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스트라빈스키는 미국으로 간다. 하버드대학에서 ‘음악의 시학’을 강의하고 다음해 1월 보스를 뉴욕으로 불러들여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날씨가 좋은 LA에 살았다. 근처에 작곡가 쇤베르크(1874~1951)가 살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쇤베르크는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왔다.
처음에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친구로 지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를 표방하고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확립하면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서로의 음악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대립했다.
하지만 1951년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은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12음 기법을 공부하고 음악에 반영했다.
그 후 20년 후 스트라빈스키도 폐부종 때문에 뉴욕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그의 주검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드리아해에 위치한 산 미케레 섬에 안장됐다. 바로 옆에는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디아길레프도 잠들어 있다. 디아길레프가 생전에 좋아했던 섬이다. 말년에 자녀들과 불화를 겪었던 스트라빈스키는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디아길레프 옆에 묻히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