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 어느 날, 곽홍길 건원건축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별일 없으면 오후 시간 좀 내라고 했다. 마침 일정도 없는 터라 그러자고 했다. 커피 한잔 하러 가는 줄 알았는데, 차는 강남을 빠져 올림픽대로를 지나 서울-춘천 간 고속도로를 달렸다. 강원도에 다녀오자 했다. 그것도 오지 중의 오지 인제 현리로. 그때야 감이 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주말 여가활동과 은퇴 후 삶을 이야기 한 것 중 하나인 패밀리 주택(전원주택) 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직장 선후배로 시작해 지금껏 만나는 지인 중 한 분인 곽 회장과 그렇게 일상 탈출에 시동을 걸었다.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윤광중은 생활명품 중에서 “좋은 것만 누리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물건은 시간이 담겨야 아름다워진다”며 “명품은 지속의 힘, 품질의 힘, 그리고 아우라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집은 우리 모두의 살아가는 동안 필수 도구다. 그 안에 희로애락이 있으며, 아름다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가치와 철학이 존재한다.
수많은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정작 내가 살 집을 설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피부로 느꼈다. 서로의 집에 대한 생각과 주변사람(전원주택생활자)들이 살면서 축적한 이야기와 서로의 라이프스타일, 집에 대한 철학을 종합하였다. 고심 끝에 강원도 오지라는 지역성과 경제성, 시공성을 고려해 아름다운(디자인이 절제된) 집을 짓자고 했다.
지형 고려한 설계
진동리는 평지가 거의 없는 골짜기 경사지형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온다. 일조량이 타 지역보다 적으며 봄철에는 바람이 많고, 여름은 시원해 에어컨이 필요 없다. 이러한 자연조건을 고려해, 동선계획부터 집의 구조 형식 및 마감재를 검토했다. 구조형식을 일반적으로 많이 적용하는 벽돌조나 콘크리트조보다 친환경적이고 주변과 어울리는 목구조의 목조주택으로 택했다. 설계하며 고려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대지의 조성은 파거나 옮겨야 하는 흙의 양(정성 토량)과 균형을 맞춰 반입 또는 반출토가 없도록 한다.
* 대지의 조성고(건물지반고)는 기존주택(옆집) 지반고와 홍수위를 고려한다.
* 토목구조물(옹벽)을 지양하고 자연경사지 또는 돌쌓기와 조경식재로 한다.
* 기존 수목은 최대한 살려 조경계획에 반영한다.
* 건물의 규모는 가급적 1층으로 계획한다.
* 건물의 구조체를 노출하는 공간을 계획한다.
* 거실의 규모를 온가족이 즐길 수 있는 주 생활공간으로 계획한다.
* 에너지 절약을 위해 바닥 벽 지붕을 단열 설계한다.
* 난방 방식은 지열난방(유사 시 유류난방 대체가능)과 벽난로를 겸용한다.
* 외벽의 비율을 적게 하며, 북측 광이나 문은 작게 디자인 한다.
* 경관과 조망을 고려하여 계획한다.
진동리 주택은 대문→마당→현관→거실→침실에 이르는 동선상,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고자 대문 앞 진입공간과 후정 부지 경계부간의 레벨차가 11m임을 감안해 공간적, 시각적 변화와 다양성을 추구했다. 목재계단과 석축에서의 진입하는 공간, 앞마당에서 연출되는 자연경관, 현관 앞 데크에서 보는 또 다른 외부경관, 거실 내부공간에서 창을 통해 보는 자연의 풍광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하였다.
거실은 가족 모두의 커뮤니티 공간이다. 우리의 주생활 공간이 안방문화 공간의 중심에서 거실문화 중심으로 바뀌었다. 여기선 활동, 담소, 사교, 오락, 취침, 식사, 접객 등에 대한 기능별로 독립된 공간 계획을 세우는 대신 복합적 공간계획 개념으로 거실 공간을 다른 공간보다 크게 계획했다. 주방은 외부공간(뒤뜰이나 데크) 접근을 용이하게 하려고 다용도실을 통해 밖으로 나오도록 동선계획을 세웠다.
안방은 독자성을 갖도록 거실 레벨보다 1m 낮게 했다. 남측 방태천과 앞산의 조망을 고려하여 창문과 데크를 계획했고 욕조가 있는 화장실 옆에 화장할 수 있는 공간을 할애하였다. 또한 거실 측에 있는 화장실엔 별도 세면공간을 확보했다.
경사지붕으로 생기는 공간적 형태를 적극 활용하여 천정을 노출, 거실공간의 아이덴티티와 풍요로움을 극대화했다. 작은방, 주방, 다용도실과 안방화장실의 상부공간을 옥탑방 또는 창고로 계획해 공간의 실용성과 효용성을 갖고자 하였다.
목조지만 외부와 조화 추구
목조주택 특성상 구조는 가구식이다. 외벽 마감을 목재 플로어링으로 할 경우 구조체인 기둥이 노출되지 않는다. 한옥에서 보이는 기둥, 보, 서까래만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세련된 비율을 거실부문에 적용해, 노출된 4개의 장방형기둥과 9개의 서까래를 1200mm 간격 모듈로 계획해 다자인 완성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아름다운 집, 품격 있는 집, 친환경 집에 대한 이미지는 내·외부 마감재에 따라 정해진다. 외벽 마감은 허리벽 상부는 목재 플로어링 위 오일스테인으로 나무의 질감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고, 허리벽 하부는 파석쌓기로 주변 환경에 동화 되도록 하였다. 거실 앞 데크와 진입 계단 역시 방부 처리된 목재로 하여 드러나 보이지 않되, 자연 속에 어울리는 질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드는 재료를 썼다.
내부 마감재 역시 외부와 같은 느낌의 재료로 했다. 천정은 목재 플로어링, 벽은 한지와 석고보드 위 스투코 미장(거실 주방 식당), 타일(화장실) 바닥은 패널히팅 위 온돌마루로 했다. 안방 창문은 완자무늬창, 문과 붙박이장은 자작나무목을 사용하였다.
자연 살린 외부 조경
북쪽으로는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형 대지에 외부의 풍부한 자연녹지자원을 바탕으로 사계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게 열린 경관의 조경계획을 수립하였다.
기본적으로는 대지가 가지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기존수목을 최대한 존치시키고, 자연석을 이용하여 구조적 안전성을 확보하였으며, 기존 물길을 이용한 작은 연못을 도입하여 자연과 가까이 하는 친환경적인 공간을 조성하였다.
공간별 개념으로는 계절별 다양한 경관을 느끼면서 남쪽의 산과 물을 조망할 수 있는 앞마당이 있다. 또한 텃밭과 유실수원, 장독대와 우물을 조성하여 간단한 생산 활동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후정을 계획하였다. 입구 및 외곽부는 소나무 등의 상록수와 벚나무, 단풍나무, 철쭉 등을 식재하여 경관을 향상시키고 아늑한 분위기의 정원을 위요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공사는 돌발변수 많아
집짓기 전 선행 작업으로 대한지적공사에 의뢰해 경계복원측량을 했고, 산본엔지니어링에 의뢰해 지형측량을 병행했다. 행정 절차상 필요한 개발행위(토지형질변경)허가, 하천점용허가 지하용수개발허가와 건축허가를 받은 후, 2010년 4월 30일에 착공했다. 그해 9월말 준공 예정으로 공사에 들어갔으나 기초단계부터 어려움이 생겼다. 당초 설계에서는 토질과 지형을 보아 일반적인 지내력 줄기초로 계획했으나 굴토 결과 수맥이 흐르는 수렁의 뻘지반층이 나타났다.
구조담당과 감리자와 논의해 유공관을 매설하고 흙을 치환하고 슬라이딩과 부동침하를 방지하기 위해 매트기초와 피트층을 두는 것으로 지반층 구조를 완전히 변경했다. 거기에만 2개월이 걸려 장마철 전 골조 공사를 끝내는 게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하층과 거실바닥 콘크리트 구조물이 끝나 목조 골조 공정을 진행할 때는 우기가 되어 차양막을 설치해 가며 공사를 했다.
또한 추위가 오기 전 공사를 마무리하려 했으나 오지라서 자재수급이나 인력수급이 원활치 않았고 민원까지 있어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설계변경에 따른 공사비 문제로 시공사와 이견까지 생겨 공사는 이듬해로 넘어갔다.
결국 12월부터 3월까지 공사를 못하는 동안 시공자와 수없이 의견을 조율해 최종 설계변경에 따른 공사비 증액과 손실금을 보전키로 한 뒤 잔여 공정을 마무리해 7월에 준공허가서를 받으며 1년 3개월의 건축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에도 10월에 지열 난방공사, 11월에 석축공사 보완, 2012년 4월 조경공사를 하면서 전 공정을 마쳤다.
자연의 오묘함에 절로 감탄사
2011년 7월 준공 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두 번 지났다. 그 동안 많은 부문에서 생활의 변화를 느꼈다. 주말이면 진동리로 간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철정리부터 진동리까지 약 60여km의 산길은 계절·시간·장소 따라 변한다. 자연의 오묘함과 변화무쌍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여유가 생겨서 의욕을 북돋아주는 기분이다. 오가며 만나는 자작나무 숲, 철따라 피어나는 이름 모를 들꽃, 해장국집 아주머니, 추어탕집 아저씨, 막국수집 아저씨를 보면 모두 반가워한다. “주말마다 오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며 시골 인심을 전해준다.
봄이 되면 농협에 들러 농기구와 씨앗 고추 옥수수 상추 토마토 모종도 사서 심는다. 여름이면 제초제와 살충제 등을 난생 처음 사고, 겨울이면 눈 치울 삽과 가래 등을 사온다. 시골생활 실습이다. 고갯마루에서 집 전경이 눈 앞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산촌마을에 인접하여 목조로 지은 집이다. 올 때마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하고 반갑게 맞는 옆집 누렁이의 인사를 받으며 대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면 나무 냄새가 난다. 거실 커튼을 열면 한 폭 산수화가 거실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집 앞 연가리 계곡(강원도의 유명한 계곡 4가리-아침가리,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 중 한 곳이다)을 산책하다 보면, 자연이 만들어낸 공간이 인공 구조물 공간보다 위대함을 느낀다.
가끔은 도시에서 내려 온 옆집 부부와 텃밭에서 기른 오이, 상치, 치커리, 깻잎, 고추 등을 따서 불판에 구운 삼겹살과 막걸리와 함께 즐기기도 한다. 먼저 내려온 선배로부터 농사짓는 법과 예초기 사용법 등을 배우며 애송이 필자는 그렇게 적응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