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상징 후지산이 지난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후지산은 녹차, 참치와 함께 시즈오카현의 3대 명물 중 하나다. 후지산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녹차를 만들고 일본 3대 미항인 시미즈항은 일본 내 참치 어획고 1위다. 시즈오카는 다시 한번 전 세계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다.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굳이 세상일에 불만을 가질 일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본분이니 분노를 적으로 알라. 이길 줄만 알고 질 줄을 모르면 해(害)가 그 몸에 이르느니라. 자신을 책망할지언정 남을 책망하지 말라. 미치지 못함은 지나침보다 나으리라. 풀잎 위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일본 전국시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종지부를 찍고 260여 년의 평화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의 무덤에 걸린 유훈이다. 바늘 없는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린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과 비길 만하다. 카카오톡,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것에 반사신경처럼 반응하고 행동하는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도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한국인으로서는 오래 걸린다는 것은 때론 실패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도쿠가와는 일본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교토 중심 시대를 마감하고 에도(지금의 도쿄) 시대를 열어 현재 일본 문화의 뿌리가 시작됐다고 하는 분석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거리인 시즈오카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조선을 침략했다 패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제압하고 일본 통일을 이룩했다. 도쿠가와는 <대망>이라는 소설로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했다. 도쿠가와는 8~14세의 어린 나이에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시)에서 12년간 인질로 보냈으며 29~45세에는 시즈오카의 하마마쓰성에서 시련의 시대를 맞았다.
66세에는 쇼군직을 아들에게 물려준 후 75세까지 시즈오카오고쇼에서 보냈다. 그의 일생의 상당부분을 시즈오카현에서 보냈다. 그의 무덤까지 이곳에 있다.
통일 후 1607년 조선과 국교 정상화를 위해 467명의 조선 사절단 방문을 성사시켰다. 당시 조선 사절단의 숙소가 시즈오카 시에 있는 세이켄지라는 절이다. 이후 200여 년간 12차례의 조선통신사들이 도쿄로 가는 길에 세이켄지에서 숙박했다. 절 입구에는 1711년 여덟 번째 조선통신사 현덕윤이 쓴 ‘동해명구(東海名區)’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들의 글, 그림 등이 지금도 보존돼 있다.
무인 출신인 도쿠가와는 문인을 중용했고 외국과의 교역에도 힘썼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약 260여년에 걸친 평화 시대를 맞게 된다. 일본의 힘은 도쿠가와 시대에 축적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시즈오카시 구노잔 도쇼구라는 신사 내에 묻혀 있다. 시즈오카현관광협회 니시 유미 씨는 “도쿠가와가 생전에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에도(도쿄)를 등 뒤로 하고 정적들의 주무대였던 교토를 바라보며 그의 육신이 묻혀 있다”고 했다. 죽어서까지 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이 신사는 에도시대 초기 최고의 기술과 예술을 기반으로 금으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으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즈오카에는 후지산, 녹차, 참치 3대 명물이 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펼쳐지는 녹차밭. 스루가만의 바닷바람과 후지산 만년설이 녹은 물이 차의 풍미를 더한다. 시즈오카에서 일본 녹차의 절반가량이 나오며 품질도 뛰어나다. 에도시대 이 지역 귀족들은 향, 맛, 색깔 등 어떤 가문의 차가 좋은지 내기를 했는데 이것이 현재 축제로 발전했다. 공항 인근에 있는 세계 차 박물관에는 일본 녹차뿐 아니라 세계 30개국 90종의 차가 전시돼 있으며 일본 차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400년 전 에도시대의 가옥에서 일본 전통방식의 다도 체험도 가능하다.
일본의 상징인 후지산은 급격한 화산활동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다. 일본인들은 후지산을 여신으로 받들었다. 12세기 화산활동이 잦아들자 절이 세워지고 15세기 이후 일반인의 등산이 본격화됐다. 19세기 전반기까지 후지산에 오르는 것은 남성의 특권이었고 여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신성한 후지산에 오르기 전에는 목욕재계했다.
몸을 정갈히 씻던 곳이 와쿠타마이케라는 연못이다. 때마침 장마철이라 연못에 닿는 빗방울이 마치 가녀린 피아니스트의 손끝이 건반을 두드리며 연주하는 느낌이다. 이 연못은 후지산을 모시고 있는 1300개 센겐신사의 총본산인 후지산혼구센겐타이샤 내에 있다. 이 신사의 본전과 참배당은 도쿠가와스가 희사했다.
여성에 비유하는 후지산은 좀체로 그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는다. 항상 구름과 안개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다. 니시 씨는 “시즈오카 사람들조차 후지산은 마음씨 착한 사람들만이 그 실체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후지산은 7, 8월 두 달만 등산이 허용된다. 나머지 기간에는 눈으로만 오를 수밖에 없다.
시즈오카현 거의 모든 곳에서 후지산을 볼 수 있지만 후지노미야시에 있는 일본의 전통 료칸 타치바나는 일본에서 후지산이 가장 잘 보이기로 정평이 나 있다.
후지노미야 시가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어 야경 또한 만점이다. 주인 아주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스시를 즐기고 달빛이라도 고요히 비치는 밤이면 후지산을 바라보며 자그마한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면 환상이다. 그런 다음 아침 햇살 속 자태를 뽐내는 후지산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면 금상첨화다.
후지산 자락의 다누키코 호수는 힐링의 명소다. 폭 4km, 수심 8m로 주변에 초원과 숲을 갖추고 있어 낚시는 물론 사이클링, 캠핑, 걷기를 즐길 수 있다. 호수에 비치는 후지산이 좋은 사진 작품거리가 된다.
시즈오카 앞바다는 스루가만으로 수심 2500m, 일본의 만 중에 가장 깊다. 여기에 일본의 3대 미항으로 불리는 시즈오카시 시미즈항이 있다. 이 시미즈항과 이즈시 토이항을 65분 만에 오가는 페리가 일품이다. 2500m의 깊이를 내려다보고 높이 3776m의 후지산을 올려다보라. 그것을 나 자신이 단숨에 오르내린다 상상해보라. 얼마나 찌릿한가. 페리를 타고 가다 운 좋으면 바다에 노니는 고래와 말없는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야이즈수산센터의 나카야마 유키 부장은 “깊은 수심과 태평양 덕에 시즈오카는 일본 내 참치 어획량 1위를 자랑한다. 이곳 수산센터에서는 참치는 물론 각종 해산물을 값싸게 사고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이곳 스시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시즈오카현 어느 곳에서도 맛좋고
싱싱한 스시와 회를 맛볼 수 있다.
싱싱한 스시를 즐겼다면 이번에는 나가이즈미초에 있는 반지조각정원미술관에 들러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건 어떨까.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이자 미켈란젤로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줄리아노 반지의 작품이 아름다운 정원에 설치돼 있다. 평범한 인간의 순간적인 표정과 몸의 움직임, 그중에서도 고통의 순간을 다양한 재료로 탁월한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행의 쌓인 피로를 푸는 데는 이즈시에 있는 슈젠지온천이 제격이다. 가쓰라강을 따라 이루어진 자그마한 시골 온천마을인 슈젠지온천은 120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고즈넉한 분위기는 밤이면 더욱 고요해진다. 산책하다 지친 발은 노천온천에 담그고 골목길을 걷다 선술집에 들러 사케 한 잔을 하는 것도 좋다. 안주는 따로 주문할 필요가 없다. 동네 아줌마 같은 선술집 주인이 내주는 잔멸치면 충분하다. 한국의 여느 막걸리집 같은 분위기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치는 빛난다. 후지산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구성자산 중 신사가 8개나 된다. 신사가 순수한 민간토속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신사 참배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하면 탄압은 물론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대한민국 조상들은 유네스코에 이렇게 물을 것 같다. “신사가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정말 합당하는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