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처음 패션쇼 무대를 접하곤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핫한 패션잡지를 보며 가꾸던 꿈은 의상학을 전공하며 구체화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 말고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현실이 버거웠다. 그렇게 패션 디자이너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20대엔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겠다고 되뇌었다. 어딜 가도 늘 그 생각뿐이었다. 평생 즐길 수 있는 일인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선택한 일이 패션지 어시스턴트. 하지만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업무량과 근무환경이 걸림돌이었다. 다시금 훌훌 털어버렸다.
패션 에디터의 꿈을 접곤 홍보대행사에 취직했다. 브랜드 홍보로 좌충우돌하며 수많은 클라이언트와의 회의가 이어졌다. 그때 붙은 별명이 야생마. 꼼꼼하거나 논리적이진 않지만 하겠다고 한 일은 꼭 해낸다고 클라이언트가 빗댄 말이 별명이 됐다.
그런데 이 길도 평생의 업이 되진 못했다. 즐기면서 일했지만 갈수록 지쳐갔다.
월급쟁이 생활을 접고 택한 길은 미국 유학. 훌쩍 뉴욕으로 떠나 뉴욕 디자인스쿨 FIT에서 패션 머천다이징 매니지먼트를 공부했다. 예쁘고 실용적인 제품과 브랜드를 수입하는 바이어가 되고 싶었다. 우선 디자인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이력서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YES가 아닌 NO. 100통의 이력서가 무색했다. 영어가 서툰 키 작은 동양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백수가 됐다. 그것도 미국에서….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며 백수로 지내길 1년여, 어느 날 같이 지내던 룸메이트가 구두 만드는 걸 보곤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처음 접한 구두 제작이 눈물겹게 재미있었다. 시간을 늘려 하나 둘 과정을 반복하며 익히고 또 익혔다. 하지만 이 또한 걸림돌이 존재했다. 미국에는 여자구두를 만드는 공장이 없어 더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던 것.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짐을 꾸렸다. 그렇게 또 훌쩍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제화 인프라가 풍부한 한국에선 배울 게 많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일이 즐거웠고 절실했다.
하고 싶은 걸 어떡해?
구두 디자이너이자 자신의 영문이름을 딴 브랜드 지니킴(JINNY KIM) 김효진 대표의 20대는 드라마틱한 좌충우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은 되고 싶어 안달인 직업을 뒤로 하고 평생의 업으로 선택한 길은 구두. 물론 그 길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서울 성수동 구두골목의 한 공장에서 막내 디자이너가 된 김 대표는 제조과정을 익히며 서서히 구두에 눈을 떴다.
“시스템을 익힐 수 있어서 좋았지만 제가 디자인한 구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어요. 재능이 없나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창업했죠. 하고 싶은 걸 어떡해요. 그땐 1인 기업이라 뭐든 스스로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행동했어요. 진정한 좌충우돌이랄까.(웃음)”
2006년, 28세의 나이에 부모님께 400만원을 빌려 차린 지니킴의 첫 달 매출은 6000만원. 파티의 화려함이 연상되는 지니킴 구두의 성공스토리가 첫 획을 그은 시점이다. 지니킴이 내세운 콘셉트는 할리우드 스타일. 레드카펫이 떠오를 만큼 화려하고 굽이 높은 구두가 지니킴만의 디자인이다. 하지만 창업 당시엔 떠억 내세운 콘셉트 때문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할리우드 셀러브리티가 즐겨 신는 구두로 화제를 낳게 된 건 순전히 콘셉트 때문이었다.
“창업하고 온라인으로 구두를 판매했는데 직접 홍보하면서 할리우드 브랜드라고 소개했어요. 그런데 사실 할리우드와는 관계가 없었거든요. 거짓말쟁이가 안 되려면 할리우드에서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달랑 구두만 들고 LA에 갔습니다. 처음엔 매장에 내 구두만 갖다 놓자고 생각했어요.”
할리우드에서 연예인과 패션에디터가 즐겨 찾는 구두 매장을 찾은 김 대표는 무작정 구두를 들이밀었다. 쉽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달리 매장 주인의 답은 ‘YES’. 브랜드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개성을 우선시 하는 그곳 분위기가 한몫했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예스란 답은 고스란히 매출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바이어와 연락이 닿았고, 미국 내 백화점에서도 팔리는 브랜드가 됐다.
“패션지와 홍보사에서 일했던 경력이 도움이 됐어요. 일례로 2007년에 가장 핫한 스타가 린제이 로한이었는데 그녀가 좋아할 만한 콘셉트로 구두를 디자인해 자주 들른다는 매장에 진열했었거든요. 한참 뒤에 매장에 들렀더니 점원이 제 구두를 가리키며 린제이 로한이 색깔별로 구입한 구두라고 소개하더군요.”
20대에 포기했던 경력은 오히려 지니킴의 성장동력이 됐다. 홍보를 위해 시즌별로 패션에디터가 찾을 만한 구두를 디자인했고, 별다른 비용 없이 패션지에 소개되는 행운을 누렸다. 패션지 어시스턴트 시절과 매일 아침 15개의 일간지와 패션월간지를 섭렵한 홍보대행사 시절의 경험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브랜드 스토리를 만들었고 나름 스타마케팅에 주력했어요. 특별한 날에 자신을 빛내줄 수 있는 구두를 내세웠는데, 시상식에서 여자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신는 구두가 돼 있더군요.”
미국에서 방점 찍고 중국으로
현재 김 대표의 꿈은 미국 진출 성공. LA 베벌리힐스에 지니킴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마련해 본격적인 미국 공략에 나설 계획이다.
“올 10월경으로 계획하고 있는데, 개발 시간 때문에 내년 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서양인들은 280㎜까지 제작해야 하거든요. 한국에선 250㎜까지만 만들어봐서 큰 치수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겪곤 있는데, 최고의 제품으로 수출해야죠.”
지니킴은 미국 플래그십 스토어에 지미추, 주세페 자노티 등 세계적인 명품과 겨룰 수 있는 블랙라벨을 선보일 예정이다. 10만원 중반부터 50만원 후반이었던 가격대도 고가의 하이엔드로 구성했다.
“미국에서 글로벌 브랜드의 입지를 굳히고 중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어요. 지금도 한국에 온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거든요. 최근에 중국의 굵직한 신발회사와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데, 중국도 프리미엄 슈즈로 승부할 예정입니다. 한국에서 생산해 진출할 계획이에요. 중국 측에서 요구하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의 프리미엄이거든요. 한국 제품의 우수성과 한류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요. 그게 또 하나의 꿈입니다.”
Mini INTERVIEW창업 당시 롤모델이 있다면
당연히 지미추.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도 아니고 스타마케팅으로 훌쩍 큰 브랜드 아닌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창업 후 8년이 지났다. 성과가 만족스러운가
아직은.(웃음)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야 진정한 브랜드 아닐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30대 중반인데, 결혼은
아직 안했다. 최근 공중파를 통해 지니킴 스토리가 소개됐는데, 35세 노처녀로 소개해서 충격받았다.(웃음)
본인을 평가한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되돌아보면 남보다 유행할 게 뭔지 직관적으로 아는 것 같다. 늘 행동했다.
최근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종 꿈을 이야기한다면
지니킴을 통해 미국에 진출해 그곳에서 레스토랑과 리빙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 지니킴처럼 화려하고 톡 튀는 감성의 인테리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