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딜 가야할지 모르겠다. 바다 건너 어딘가로 떠나자니 홀쭉한 지갑이 탈탈하고 국내로 방향을 틀자니 거기가 거긴 것 같아 아쉽고. 여름휴가 어디 갈 데 없냐?”
오랜만에 만난 친구 입에서 푸념이 한 가득이다.
분기마다 한 번씩 만나 서로 분기모임이라 부르는 자리엔 어김없이 짜증 한 무더기가 메인 메뉴다. 매년 2분기, 여름 시즌의 안주거리는 역시 여름휴가. 마음은 태평양을 날아가건만 현실은 현해탄도 건너지 못한다고 툴툴, 어쩌다 큰 맘 먹고 비행기라도 탈라치면 3, 4분기 허전한 마음이 올드랭사인 울릴 때까지 가슴을 후벼 판다고 왱왱이다.
친구가 꿈꾸는 여름휴가의 시나리오는 스위스 하이킹. 그것도 2년 전 제주 올레 6코스와 우정의 길을 맺은 체르마트의 하이킹 코스가 로망이다. 스위스엔 근처도 못 가본 놈이 줄줄 읊어대는 품은 여행박사다.
“왜 이곳이냐. 체르마트 주변 하이킹 코스가 400㎞거든. 짧은 일정으론 불가능해 그런데 제주올레와 우정을 맺은 체르마트 다섯 개 산정 호숫길(5-Seenweg: 5-젠베그)은 케이블 철도를 타고 수넥가까지 이동하고 곤돌라로 해발 2571m에 올라 시작한단 말이야. 산에 자리한 다섯 개의 호수를 지나 수넥가 파라다이스까지 가는 길인데,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2시간 코스야. 아무리 더운 날에도 산 정상 부근은 눈에 덮여 있지, 내려올수록 탁 트인 호수가 바람을 일으키지, 군데군데 레스토랑도 이국적이지, 얼마나 멋지냐.”
야무진 꿈이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 진 감감하지만 짜증 한잔, 푸념 한 젓가락이 오간 후 결정된 휴가지는 경북 분천역에서 시작되는 영동선 오지 트래킹. 최근 취재지를 소개하자 덥썩 문다. 이곳은 코레일에서 선보인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와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코스다. 게다가 한국과 스위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분천역과 체르마트역이 자매결연을 맺어 왠지 이국적인 정취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담한 분천역에서 시작된 백두대간
분천역으로 가기 위한 첫 여정은 서울 용산역에서 시작된다. 중부내륙순환열차가 시작되는 곳이다. 청량리, 제천을 거쳐 영월과 단양으로 갈라지는 이 열차는 추전, 태백, 철암, 분천, 봉화, 풍기 등을 순환한다. 단양으로 가는 열차를 택하니 봉화를 거쳐 분천에 이르는 코스다.
열차 안은 국내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 차창 쪽을 바라보는 자유전망석, 칸막이로 구분된 커플석, 패밀리석 등의 구조가 개성을 살렸다면 알록달록한 인테리어는 여행의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서너 시간 후 도착한 분천역은 말 그대로 아담한 시골역이다.
중부내륙순환열차와 백두대간협곡열차를 환승할 수 있는 이곳은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이 살아 숨 쉬는 동네다. 경험해보진 못했으나 마치 그랬을 법한 풍경이 멋스럽다. 동네 청년의 말을 빌자면 환승역이 되고서 주말이면 10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 사람들의 살림이 폈다. 몰리는 사람이 늘면 늘었지 줄지 않아 주말에 열차를 이용하려면 예약은 필수다. 백두대간협곡열차 구간은 분천에서 양원, 승부, 철암역을 순환하는 코스. 영동선 오지 트래킹은 분천역에 마련된 카쉐어링을 이용해 비동승강장으로 이동, 양원역에 이르는 약 1시간 코스를 맛보기로 택했다.
기차 길을 따라 이동 후 산 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겨우내 수북이 쌓인 낙엽이 푹신한 길을 내고 있다. 좁다란 비탈을 따라 오르다 보니 이름 모를 야생화가 지천이다. 트래킹의 진미 중 하나는 꽃과 흙 향기라 했던가. 흐릿했던 낙동강이 가까워질 무렵 울진과 봉화의 경계에 자리한 양원역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차창 밖 가득한 시원한 풍경
백두대간협곡열차는 최근 한 달 동안 예약이 2만명이나 몰릴 만큼 인기 있는 열차 상품이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아이디어를 낸 코레일의 새로운 먹을거리다.
지금껏 임시정거장이던 양원역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지만 찾는 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옹기종기 모여 두릅을 파는 할머니들은 하루 5만~6만원의 돈벌이가 생겼고, 주변 땅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관광 상품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마을 사람들은 철로 주변의 땅에 자진해서 꽃을 심고 길을 내 찾는 이들의 편의를 돕고 있었다.
도착한 열차를 타보니 커다란 차창이 인상적이다. 지붕 아래까지 뻥 뚫려 바깥 풍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놓인 철로 주변엔 갖가지 기암괴석과 동굴이 승객의 시선을 유혹한다. 내부는 냉난방 시설 없이 여름엔 창을 열어 자연풍이 들어오고 겨울엔 중앙의 커다란 난로를 떼는 식이다. 한여름과 한겨울엔 글쎄….
하지만 짧은 시간 운치를 즐기기엔 협곡열차만한 상품도 없다. 오랜만에 여행에 나섰다는 노부부의 짧은 코멘트에 들뜬 기운이 가득한 건 그 때문이다. “같이 여행에 나선 게 얼마 만인지. 열차도 타고 계곡도 구경하는 게 이국적입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열차만 갈아타면 다 볼 수 있으니 조금만 젊었어도 당일치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