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대사를 재구성한 다큐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秘史)>가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청률 전선에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5월 12일(일) 밤 11시에 첫 전파를 탄 <대한민국 정치비사>는 지난 50년간 한국 현대사에 집중하며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현대사 실록에 도전하고 있다. 방송은 현대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사건과 격랑 그 자체인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역사의 중심에 선 정치인이고 명사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사건을 재구성, 베일에 가려진 진실을 집중 조명한다.
다큐멘터리 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의 등장인물과 대사, 행동 등은 작가의 상상력보다 정치적 상상력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공과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탄탄한 재연기법을 통해 스토리를 전달한다. 특히 실제 주인공 인터뷰와 함께 뒷이야기 고백 등이 이어지며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5월 12일 첫 방송된 ‘제1화 박정희의 승부수 : 핵무기 개발’ 편에선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비사를 이야기했다. 미국의 강력한 반대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림수와 당시 숨 가쁜 현장이 전파를 탔다. 방송에는 10·26사건과 12·12사태, 전두환과 최규하, 지하경제의 메이퀸 장영자, 7·4남북공동성명, 언론 통폐합의 역사, 전두환과 노태우, 프로야구 개막 비사 등 역사적 사건들이 촘촘하게 이어져 관심을 모았다. MC에는 탤런트 김성원이, 박정희 역에는 박 전 대통령을 빼닮은 외모로 ‘박정희 전문 배우’라는 별칭을 얻은 탤런트 이창환이, 전두환 역에는 배우 윤동환 등이 열연했다. 이외에도 MBC 라디오 <격동 50년>의 해설을 맡은 성우 김종성이 내레이션을 진행해 안정감을 더했다.
MBN 측은 “격동기 현대사 중에서 베일에 싸여진 비사들의 진실을 밝혀내고 역사를 통해 교훈을 찾기 위한 의도로 제작됐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정치비사>는 매주 일요일 밤 11시에 방송된다.
<대한민국 정치비사> 하이라이트 제2화 국보위에서 청와대까지 - 전두환과 최규하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그날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2·12 이후 10여개월 간 길고 긴 군부 쿠데타의 완성이었다. 그 시작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직에 올라 박정희 시해사건을 수사했다. 그리고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전격 체포하면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1980년 5월 어느 날,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이희성을 만난다. 그리고 이희성에게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계엄령 전국 확대’ 안건을 낼 것이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후 진행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안종훈 군수사령관의 반대에도 전두환은 백지서명을 받고, 최규하 대통령에게도 재가를 요청한다. 그리고 반대하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한다.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찬반 토론 없이 계엄령 전국 확대를 가결했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계기였다.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두 정보부처를 장악한 전두환 장군은 이 힘을 바탕으로 다시 최규하 대통령과 힘겨루기에 들어간다. 광주에서 계엄 확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지 이틀째인 5월 19일, 전두환은 최광수 비서실장을 만난다.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 설치가 시급하다고 최광수를 설득한다. 이 사실을 최광수로부터 전해들은 최규하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불러 전두환의 계획을 흘린다. 그리고 이희성은 전두환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런 이희성에게 협조를 가장한 협박을 한다. 12·12 직후, 이희성을 계엄사령관으로 추대한 장본인이 바로 전두환이었던 것이다.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기구 설치에 동의한다. 전두환은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오르고 군 인사들로 자리를 채운다. 마침내 1980년 5월 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가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전두환에게는 마지막 꿈이 남아있었다. 바로 청와대 입성, 대통령이었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국보위를 통해 국정 전반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유신헌법 개정에 들어갔다. 전두환은 대통령을 단임으로 하고 임기를 7년으로 정한다. 그러나 최규하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기겠다는 마지막 결심을 실행한 것이다. 바로 정치일정이었다. 놀란 전두환은 최규하의 오랜 친구인 김정렬을 부른다. 그리고 최규하에게 하야를 권할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7월 31일,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 오랜 침묵 끝에 자신이 대통령직을 내려놓기로 했다는 결심을 전한다.
제3화 지하경제의 메이퀸, 장영자
1982년 5월 4일, 언론과 방송은 일제히 한 부부에 집중했다. 39세 미모의 여성 장영자, 그리고 그의 남편 이철희였다. 이들 부부가 사채시장을 끼고 어음을 할인해 7111억원의 자금을 굴렸고, 그 과정에서 건실한 기업들을 맥없이 쓰러뜨렸기 때문. 당시 탄탄했던 공영토건과 일신제강이 연이어 부도 처리되며 근로자들은 길거리로 나앉았고, 소액주주 1만여명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그 가운데는 한 할머니가 식모살이, 콩기름 장수로 모은 900만원도 들어 있었다. 대기업부터 서민까지 모두가 피해자였다. 장영자는 남편 이철희나 형부이자 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이란 권력 실세를 뒤에 내세워 어음사기를 가능케 했다.
먼저 자금이 달리는 기업에 돈을 빌려주어 생명을 연장시킨 후 어음을 몇 배로 받아서 사채시장에 돌린 다음 현금을 챙기는 방식이었다. 공영토건과 일신제강이 부도처리된 5월 11일, 이종남 대검 중앙수사부장의 중간수사 발표는 전격적이었다. 세상에서는 장영자가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의 돈줄이었다거나 대통령 처가의 비호를 받으며 사채업을 해왔다는 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민심으로 인해 청와대는 사건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마침내 사건 보름 만에 전두환의 처삼촌이자 장영자의 형부인 이규광이 구속됐다.
당시 권력 핵심부의 관심은 실체적 진실규명보다는 빠른 해결에 있었을지 모른다.
마침내 장영자 사건으로 11개 부처에 대한 개각이 단행되고, 여당인 민정당 사무총장 경질을 비롯한 당직개편으로까지 이어졌다. 건국 이래 최대금융사기의 주범 장영자. 그녀는 끝까지 정치권 연루를 주장했지만 이 사건은 결국 금융실명제 실시도 유야무야됐고 사채업을 중심으로 한 지하경제의 실상을 밝히는 데서 봉합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