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눈 덮인 거리를 보면 슈베르트 (1797~1828)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가 생각난다. 정처 없이 눈밭을 헤매는 방랑자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슈베르트가 죽기 직전인 1827년 남긴 이 작품은 나그네의 고독과 좌절, 실연의 아픔을 써내려갔다. 독일의 대문호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밤의 안녕’ ‘풍향기’ ‘얼어붙은 눈물’ ‘먼 가슴’ ‘보리수’ ‘넘쳐 흐르는 눈물’ ‘시냇물 위에서’ ‘고독’ 등 24곡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연속이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슬픔에 잠기고 내 발길 닿는 길도 눈 덮여 버렸네. 또 다시 방랑을 떠날지 나 알지 못하오. 캄캄한 어둠 속에 길 찾아 떠나오. 차가운 달빛 속에 내 모습 비치고 외로운 나의 발길 말없이 따르네.”
31세에 요절한 불우한 인생
이 작품은 31세에 요절한 천재 음악가 슈베르트의 자화상 같다. 그의 불우하고 황량한 삶이 시리고 쓸쓸한 선율을 통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외롭고 가난하게 살다 갔다. 불행하게도 매독에 걸려 교사직을 그만두고 약혼자와의 결혼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친구들 집을 떠돌며 살았다. 어둡고 작은 방에서 추위에 떨면서 작곡을 했다고 한다.
특히 <겨울 나그네> 수록곡 ‘넘쳐 흐르는 눈물’에서 절망은 극에 달한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흰눈 위에 떨어져 뜨거운 내 마음의 슬픔 눈 속에 녹아 버리네. 눈 속에 녹아 버리네. 파란 싹이 돋아나고 따스한 바람 불어오면 얼었던 땅은 갈라져 흐르고 부드러운 눈은 녹으리. 부드러운 눈은 녹으리. 내리는 저 눈 내 고통 알까? 가는 길을 말해 다오.”
후원해주는 교회나 귀족이 없어 굶주렸지만 그의 음악적 열정은 대단했다. 짧은 생을 예감했는지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작곡했다. 피아노를 살 돈이 없어 기타로 작곡했는데 한 번 악상이 떠오르면 신들린 사람처럼 오선지를 채워나갔다.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반주까지 작곡하는데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들어라 종달새’는 술집에서 친구가 들고 있던 실레거의 시집을 빼앗아 읽다가 메뉴판 뒤에 음표를 적어 만든 곡이다.
버려진 악기로 이별 연주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왕성한 창작열을 가진 슈베르트는 짧은 생애였지만 600곡이 넘는 가곡과 9개의 교향곡, 기악곡을 남겼다. 울림이 약하고 감정 표현의 폭이 좁아 버림받은 현악기 아르페지오네의 매력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1823년 빈의 악기제작자 슈타우퍼가 고안한 이 악기는 10여년 연주되다 사라졌다. 여섯 줄 기타 모양이지만 연주법은 4줄의 첼로와 비슷해 일명 ‘기타첼로’로 불렸다. 첼로처럼 세워서 현에 활을 그어 소리를 냈다. 음량은 적지만 연인끼리 소곤소곤 읊조리는 것 같아 ‘사랑의 기타’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슈베르트는 이 악기에 연민과 호기심을 느껴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작곡했다. 난방도 불빛도 없는 다락방에서 살던 그가 오랜만에 떠난 여름휴가 중에 쓴 곡이다. 1824년 5월부터 10월까지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저택에 머물렀는데 백작의 딸 카롤리네와 사랑에 빠졌다. 가난에 찌든 삶에서 벗어나 모처럼 기분 전환을 하면서 슈베르트의 마음이 활짝 열렸다.
헝가리 자연과 사람들, 여름날 열애의 추억과 미련은 고스란히 음악 속에 담겼다. 그해 11월 빈으로 돌아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완성했다. 사랑을 접어야 하는 슬픔과 눈물, 후회와 연민, 고독을 버무려 만든 곡이다. 감정이 끓어오르지만 기품은 넘친다.
자취를 감춘 아르페지오네 대신 첼로로 연주되는 이 작품의 1악장 ‘알레그로(Allegro·빠르게)’는 서정과 애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주 유명한 선율이다. 넋두리를 꺼내는 듯한 피아노 전주 후 첼로가 노래한다. 조금 가라앉아 있던 선율은 금세 밝고 명랑하게 바뀐다. 이별을 아쉬워하다가도 사랑의 기억 때문에 미소 짓는 것 같다. 2악장 ‘아다지오(Adagio·느리게)’는 우울하다. 애수와 동경을 품은 듯한 주제를 깊숙이 연주한다. 당시 슈베르트가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이제 다시는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전날의 슬픈 생각이 되살아나곤 한다”고 쓴 일기 내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3악장 ‘알레그레토(Allegretto·조금 빠르게)’에서는 다시 경쾌해진다. 헝가리풍 첼로의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퉁겨 연주하는 기법)가 한층 강조된 후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선율이 흘러나온다. 음악에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쏟아낸 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모양이다.
차마 끝내지 못한 교향곡 8번 ‘미완성’
슈베르트 실내악 작품을 연주하는 첼리스트 양성원
슈베르트는 교향곡 8번의 마침표를 찍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2악장까지만 쓴 후 3악장은 불과 9마디로 절필했다. 미완성의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쓴 후 6년을 더 살았지만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그가 부활하지 않는 한 나머지 2악장은 절대 채워질 수 없기에 이 곡은 묘한 매력으로 마음을 끌어당긴다. 두 개의 악장밖에 없지만 형식이나 내용으로나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혹자는 더 이상의 선율을 첨가할 필요가 없어 미완으로 남겼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물론 미완성의 미스터리에 대해 이견도 많다. 미국 음악학자인 마이클 그리펠은 슈베르트가 이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한 이유가 베토벤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논리적인 전개방식을 모방하려고 했으나 작품 수준이 기대에 못 미쳐 포기했다는 것. 슈베르트가 베토벤이 안장된 벨링크 묘지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로 베토벤을 존경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나왔다.
분명한 것은 1822년 25세의 슈베르트가 썼기에 이 곡은 지극히 낭만적이며 청춘의 애상이 감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암울한 선율과 바이올린의 가녀린 떨림이 어우러지는 제1악장은 요절한 슈베르트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제2악장은 방황하는 젊음을 보상받으려는 듯 사랑과 위안의 선율이 가득하다.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서정적인 선율은 평화로운 전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꺼질듯 이어지는 애절한 피날레는 왠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슈베르트의 짧은 인생을 닮은 미완성 교향곡은 사망 후 37년이 지난 1865년에야 비로소 초연된다. 생전에 별로 성공 운이 없었던 그는 다른 작품도 연주할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교향곡의 초연이 거부되거나 연기되는 등 잦은 수모를 겪었는데 연주 시간이 길고 기교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의 교향곡이 제대로 연주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으면서도 상상만으로도 놀라운 관현악법을 구사하며 천재성을 보여줬다. 그의 삶은 완전하지 못하고 불행했지만 작품만은 불멸의 생명력을 얻게 된 이유다.
뒤늦게 발견된 위대한 교향곡 9번 ‘그레이트’
작곡 능력에 회의를 느끼고 비평에 몰입하던 슈만(1810~1856)은 1839년 1월 음악 잡지를 창간했다. 그리고 어느 날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를 찾았다. 그곳에서 슈베르트가 남긴 악보 뭉치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먼지를 뒤집어쓴 그 악보는 빛나는 악상을 담고 있었다. 바로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 C장조 ‘더 그레이트(The Great)’. 연주 시간이 50분이 넘는 대곡이다. 작곡가는 31년이라는 짧은 생을 한풀이하듯 한없이 깊고 웅장한 선율을 남겨 놓았다. 슈만은 이 작품이 ‘베토벤 이후 최고 교향악’이라고 판단했다. 걸작이건만 작곡가 생전에 제대로 연주되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만큼 슈베르트의 교향곡은 늘 무시당했다. 이 작품도 너무 길고 연주가 어렵다는 이유로 교향악단원들이 외면했다.
바이올린 파트가 똑같은 리듬 패턴을 88번이나 반복하는 대목에서 연주자들이 폭소를 터트려 초연 연습이 엉망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곡을 발견한 슈만은 주저 없이 멘델스존(1809~1847)을 찾아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연주로 초연해줄 것을 부탁했다. 1839년 3월 21일 마침내 완전한 초연이 이뤄졌다. 슈베르트 사후 11년이 지나서야 빛을 본 셈이다.
슈만은 슈베르트 작품을 재평가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음악신보’에 실린 그의 비평에는 슈베르트 예찬 일색이다. 교향곡 9번에 대해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마치 사람 목소리 같아 꼭 합창을 듣는 것 같다”며 “동화나 마법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사랑스런 잔향을 남긴다”고 극찬했다.
래틀은 “이 위대한 교향곡은 천국과 지옥, 기쁨과 절망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조정해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무엇이 과연 정답인지 정의하기 어렵다”고 평했다.
그런데 슈만과 수많은 작곡가들을 괴롭혔던 베토벤의 악령이 이 곡에도 숨어 있다. 슈베르트가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을 보고 감동받아 쓴 작품이라고 한다. 슈베르트는 정말 베토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베토벤이 죽기 며칠 전 병실을 찾아 자신이 만든 가곡을 들려주고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며칠 후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매야 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베토벤이 안장된 벨링크 묘지에 묻혔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출판된 작품도 100여곡뿐이었고 대부분 헐값에 팔렸다. 또 큰 기대를 걸고 괴테에게 가곡 ‘마왕’ 악보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았다. 비록 화려한 연주회나 환호하는 청중은 없었지만 슈베르트는 음악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