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이전의 한국농촌을 고향으로 간직한 사람들에게 있어 그 고향이란 두 가지의 이미지로 얽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가 고향집이고 다른 하나는 친척과 친구로 이어지는 고향 사람들이다.
마을 앞 느티나무와 토담 사이로 꼬불거리는 골목길,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면 누렁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던 고향집이 고향인 것이다. 그 추억의 실상이 보잘 것 없이 작고 초라한 것이라 해도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그 집은 다만 집이 아니다.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그 집으로 해서 계절이 바뀔 때나 명절 때가 되면 마음의 저울추가 그쪽으로 기울고, 그리움의 문풍지가 소리를 내며 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고향다운 고향이 없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기에 어린 시절의 몇 년씩으로 토막난 시간들이 여기저기에 고여 있을 뿐, 긴 세월 나를 키워낸 곳으로 추억할 고향이 없는 것이다. 자의식이 영글고 성장의 나이테가 발효한 곳을 그래도 ‘고향’이라고 이름 붙이자면 춘천이 되겠지만 그곳조차 학교를 다니며 타향살이를 한 곳이지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은 아니다.
그런 나에게 굳이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대대로 집안이 살아왔던 곳, 생후 여덟 달이 되어 어머니의 품에 안겨 떠났다는 그곳, 할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살았던 강원도의 내지, 내설악 한 기슭이 고향일 수밖에 없다. 이 옛 고향집은 가운데 중정이 있는 미음자(ㅁ) 너와집이었다. 미음자 너와집의 구조는 이랬다. 마당이 있는 앞쪽에는 마구간과 두 개의 사랑방이 있었다. 남자의 공간이었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뒤쪽에 부엌과 안방 그리고 뒷방이 있었다. 여자들의 공간이었다. 이 두 공간을 사이에 하고, 한쪽은 대청과 머슴들의 방이었고 건너편은 곡식을 두는 광과 헛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거의 모든 방학을 나는 그 너와집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박봉의 초등학교 선생으로 객지를 떠도는 사이, 할아버지는 집에서 먼 곳부터 땅을 한 자락씩 팔아치우면서 집안은 쇠락해 갔고, 죽지가 떨어져나가듯이 미음자를 이루었던 집의 축도 하나씩 헐려나가기 시작했다. 구들장이 무너진 채 있던 머슴들의 방이 헐리고, 헛간이 헐리고, 더 이상 소를 기르지 않는 외양간이 헐려나갔다. 집안의 쇠락이 그 가족이 사는 집의 모양새와 함께 쇠락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그 어린 시절, 고향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리움이나 따스함도 함께 멀어져 갔다.
논둑길에서 쓰러진 후 이레째 되는 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가을이었다. 미음자 집은 사랑방과 안방 그리고 부엌만이 남아, 중정이 있던 자리를 사이에 하고 방 한 칸짜리 집 두 채가 덩그러니 남은 이상스런 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고 서리가 내릴 무렵, 그 집터조차 군사기지로 국가에 수용되면서 중장비에 밀려 자취도 없이 사라져갔다. 이 미음자 집이 은성했던 시절 어린 나에게 각인시킨 것이 있다면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이 선명하게 구분되던 우리의 주택구조였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방과 그 옆의 사랑방은 엄격하게 남자만의 공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안방에 들락거리는 일이 없이 거기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사람들을 만나며 일을 보았다.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엘 가면 나도 할아버지와 함께 그 방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지냈다.
학교 관사의 두 칸짜리 집에서 복작거리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지내던 나로서는 할아버지와 둘이 겸상으로 밥을 먹던 방학동안은 즐거우면서도 조금은 기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부모의 손에서 벗어난 것 같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이함이었다.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문 나그네들은 할아버지의 옆방인 사랑채에서 잠을 잤고, 밤 깊도록 할아버지에게 그가 떠돈 먼 곳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할아버지 방에 앉아 눈을 비벼가며 들었던 겨울밤, 이따금 밖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고, 깊은 밤이면 멀리 내린천의 강물이 얼어터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오곤 했었다.
대청마루 건너편은 온전한 여자들의 공간이었다. 뒤뜰 담장을 따라 늘어선 사과나무 밑에서는 벌들이 잉잉거리며 드나드는 피나무 벌통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앞 장독대 옆으로는 닭벼슬 같은 맨드라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부엌과 안방 그리고 유리가 붙은 봉창이 있던 뒷방은 할머니와 고모들의 공간이었다. 한적 필사본이 쌓여 있던 할아버지의 사랑방과 달리 안방에는 장롱이 있었고 저고리를 벗은 고모들의 치마단 위로 젖가슴골이 들어내는 살 냄새 같은 것이 은은했다. 그리고 툇마루에 그림처럼 앉아 둥근 수틀을 들고 수를 놓던 고모는 저녁 무렵이 되면 동이를 이고 우물길을 오갔다.
나는 아내에게 ‘이것만은 정말’ 하면서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아파트든 단독주택이었든 집안에서 제일 큰 방을 늘 내가 썼다는 점이다. 책이 많다 보니 그걸 꽂고 책상을 놓을 서재는 언제나 제일 큰 방이어야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흔히 안방이라는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아내는, 아니 우리 부부는 장롱이 없이 살았다. 들여놓을 곳도 없는 장을 무엇하러 사겠는가. 우리 부부가 산 세월은 요즘처럼 드레스룸이라는 방을 만들고 안방 옆에 따로 화장실을 붙여 짓던 시절이 아니었다.
안방 없이 산 우리 부부의 집이 가족의 삶이 영그는 주택으로서 최악이었다면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이상형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즈음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의문이 끼어든다. 왜 한국의 남자들은 자신의 방을 잃어버렸을까 하는 의문이다.
집에서 남자의 방이 없어졌다. 부부의 방이 있고 아이들의 방은 있지만, 가장이 집안에 자신만의 방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남편만의 공간, 아버지만의 공간이 없는 집을 만들어놓고 살아가는 남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종일 밖에 나가 일하고 집에서는 잠이나 자는 사람이 무슨 방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건 가족에게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의미이며 상징이 아니냐고.
나 혼자만의 어긋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생애의 대부분은 집안 서재에 틀어박혀서 보낸 그야말로 평생 재택근무자였던 나로서나 할 수 있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 녀석이 추운 겨울날 어깨를 움츠리고 집을 나서다가 밤을 새우고 아직 이불 속에 누워서 ‘다녀와’하고 손을 흔드는 아비를 보면서 ‘추운데 안 나가도 되고… 아하, 나도 이 다음에 작가나 해야겠다’고 이죽거린 적도 있었으니.
생활의 여유가 있는 젊은 부부가 유치원도 가기 전인 아이에게 장난감이 가득한 놀이방을 만들어 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집에도 남편의 방은 없었다. 집안에 나만의 방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때로는 당신 혼자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공간도 필요하지 않으냐고 한다면 돌아올 대답은 ‘이어폰 끼고 들으면 된다’일 게 뻔하니까. 집에 돌아와 제 방이라도 있으면 거기 틀어박혀서 인터넷 게임이나 하는 게 요즈음 젊은 가장들이니까 하는 말이다. 그에게 무슨 제 방이 필요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