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19일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넬손 괴르너. 사진제공=서울시립교향악단
가을 달빛을 보면 ‘피아노의 시인’ 쇼팽(1810~1849)이 생각난다. 그의 음악은 처연하고 애상적이다. 그의 삶도 그랬다. 못 이룬 사랑 때문에 많이 아팠다.
첫사랑부터 순탄치 않았다. 19세에 폴란드 바르샤바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에게 첫 눈에 반했지만 다가서지 못했다. 워낙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오랫동안 마음만 애태우다가 결국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얼마나 소심한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짝사랑 여인을 잊고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로 작정한 그는 한 줌의 흙을 가지고 출국했다. 그 후 두 번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쇼팽은 감당하기 버거웠던 실연의 상처를 낭만적이고 우울한 피아노 협주곡 1, 2번에 담아내며 스스로를 달랬다.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 탓에 두 곡은 아주 감상적이며 청년의 신선한 서정이 가득하다. 1829년 2번을 먼저 썼는데 악보를 분실하는 바람에 1번보다 늦게 출간돼 번호가 서로 바뀌었다.
2번이 짝사랑의 설렘과 격정을 풀어냈다면 1번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조국을 등지는 쇼팽의 심정이 절절하다. 이별을 앞둔 청년의 아픔이 배어 있는 1번은 눈물로 ‘뚝뚝’ 건반을 치는 것처럼 여리다. 그는 당시 “낭만적이고 조용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작곡했다”며 “즐거운 추억을 환기시키는 아름다운 봄날의 달밤을 바라보는 듯한 인상으로 썼다”고 심정을 밝혔다.
그래서인지 2악장은 서정적인 야상곡풍이다. 제1악장이 열정적이었다면 2악장에서는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고 제3악장에서는 다시 격정적으로 돌변한다.
쇼팽은 1830년 10월 11일 폴란드를 떠나는 고별 음악회에서 이 곡을 직접 쳤다. 이날 흰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장미꽃을 꽂은 콘스탄치아도 무대에 올라 독창곡을 불렀다.
이보다 앞서 1829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사랑에 빠진 쇼팽의 애절함이 녹아 있다. 세월이 지나도 증발하지 않을 것 같은 농도였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슬프게도 나의 이상을 발견한 것 같다. 반년 동안 매일 밤 그녀의 꿈을 꾸지만 아직 한 번도 말을 건네 보지 못했다. 그녀를 사랑하면서 협주곡의 아다지오를 작곡했다”고 털어놨다.
파혼의 충격을 격정적 선율로 풀어
쇼팽
짝사랑에 실패한 쇼팽은 평생 연애운이 없었다. 폐결핵 때문에 27세에 파혼의 아픔을 겪었다. 1836년 연인 M.보진스카와 약혼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결국 이듬해 헤어지게 됐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실연의 고통을 연습곡(에튀드) OP.25-11 ‘겨울바람(1837년)’에 풀어놓았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닮은 이 작품은 아주 빠르고 맹렬하게 건반을 두들긴다. 오른손의 빠른 움직임이 바람 소리를 연상시켜 훗날 ‘겨울바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이 세상의 부조리하고 못마땅한 것들을 모두 다 부셔버릴 듯한 기세로 연주되는 폭풍 같은 곡이다.
쇼팽은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이 곡에 쏟아내며 상처를 극복하려 했다. 삶을 포기할 수 없다면 복잡하고 어지러운 심경을 가슴 밖으로 밀어내고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가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후 쇼팽은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하며 공허한 마음을 달랬는데 이 작품을 당대 문학계에서 이름을 떨쳤던 다글 백작부인에게 헌정했다.
어둡고 격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 작품은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실험적이다. 엄청나게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며 연습곡을 한 차원 끌어올려 놓은 혁명적인 곡이다.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선율의 폭이 넓고 풍부해 관현악 소리의 경계에 이른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이 연습곡을 작곡할 때 쇼팽은 신출귀몰한 바이올린 주법의 대가인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의 영향으로 초절기교의 피아노 연주 기법을 도입하고 시적 낭만을 결합시키려 했다. 당시 보수적인 음악가들은 ‘예술의 파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지만 위대한 작곡가 슈만(1810~1856)과 리스트(1851~1919)는 ‘피아노의 혁명’으로 평가하고 환영했다.
빗속에 사라진 쇼팽의 사랑
파혼의 아픔을 겪었던 쇼팽은 여섯 살 연상의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와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구원의 여신처럼 다가온 상드는 여리고 섬세한 쇼팽을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유약한 천재 음악가와 나이 많은 여인의 열애를 바라보는 파리 사교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요양도 할 겸 복잡한 파리를 떠나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로 향했다.
경치 좋은 곳에 집을 마련했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쇼팽이 결핵환자라는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내쫓았다. 어쩔 수 없이 마요르카 섬 북쪽의 버려진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됐다. 사람들이 거의 왕래하지 않는 이곳에서 쇼팽은 평안을 찾게 됐고 창작열도 되살아났다. 명곡인 ‘폴로네즈 A장조’와 ‘녹턴 F단조’ ‘24개의 전주곡’ 모두 이 수도원에서 완성됐다.
24개의 전주곡은 자연의 순수함을 그대로 오선지에 옮긴 듯하다. 특히 ‘빗방울 전주곡’은 이별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떨어지는 빗방울에 비유했다. 곡 전체에서 내림 A음이나 올림 G음이 낙숫물 소리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와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준다. 고음부는 빗방울 소리 같은 단조로운 음향이 끝임 없이 울리고 저음부는 울적한 선율이 구슬프게 깔리는 이 곡에는 애처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쇼팽의 약을 구하러 나갔던 상드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에 돌아오니 방안 피아노 건반에서 더 세찬 빗방울이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 피아노를 치고 있던 쇼팽은 “사랑하는 조르주, 내 앞에 서 있는 건 분명 당신이겠지? 난 당신이 급류에 휘말리는 환영을 봤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이별이 들이닥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은 얼마 후 현실이 됐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채 사랑했던 두 사람은 9년 만에 헤어진다. 상드의 아들과 딸을 키우는 문제로 크게 다퉜던 것.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의 병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일자리도 가질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영국 순회 연주를 떠났지만 병세가 더욱 악화됐다.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지만 쇼팽은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849년 10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프랑스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조국인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날 때 가져온 한 줌의 흙이 그를 덮었다. 사체에서 분리된 그의 심장만 고국인 바르샤바 성 십자가 교회로 돌아갔다.
15세에 작곡한 천재, 피아노의 매력을 확장시켜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임동혁씨
평생을 피아노곡에 바친 쇼팽의 어머니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도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폴란드 명문 귀족이었던 크지노프스카는 프랑스어 교사인 니콜라스 쇼팽과 결혼했고 1810년 3월 1일 폴란드 젤라조바 볼라에서 쇼팽을 출산했다.
쇼팽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스승은 보이치에흐 지브니였다. 불과 8세 꼬마 쇼팽이 엄청난 재능을 보이자 지브니는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고 말했다.
12세에는 바르샤바음악원 창설자인 J.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웠다.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극찬을 받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쇼팽은 연주보다는 작곡에 전념했다. 15세에 첫 작품 ‘론도(1825)’를 발표했다. 3년 후에는 아버지 친구 야로츠키 박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독일 음악에 자극을 받았다.
20세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 당시 폴란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동경하던 파리는 그를 외면했다. 1832년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그의 실력을 인정받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시적인 피아노 선율은 서서히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완전한 포로로 만들었다. 리듬도 자유롭고 급진적이었다. 불협화음과 반음계를 구사하면서도 부드럽고 서정적이었다. 고국 폴란드 민속음악도 세련되게 흡수했다. 페달을 사용해 음색 종류를 늘린 덕분에 피아노 연주법이 확장됐다. 대담하고 독창적으로 악기의 매력을 살린 피아노곡 200여곡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피아노 협주곡 2곡, 피아노 소나타 3곡, 발라드 4곡, 스케르초 4곡, 즉흥곡 4곡, 폴로네즈 10곡, 마주르카 51곡, 첼로와 피아노의 소나타 등이 있다.
위대한 작곡가는 떠났지만 폴란드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열고 있다. 세계 3대 콩쿠르로 자리 잡은 이 대회에서 걸출한 피아니스트들이 배출돼 왔다. 그 중 ‘최고 쇼팽 전문 연주자’로 불리는 피아니스트는 스타니슬라프 부닌. 그는 1985년 쇼팽 콩쿠르에서 19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피아니스트 윤디 리는 불과 18세 나이로 2000년 쇼팽 콩쿠르에 우승했다. 수정처럼 깨끗하고 맑은 쇼팽 연주로 전 세계 음악팬들을 사로잡았다
국내에서는 2005년 쇼팽 콩쿠르 3위에 입상한 피아니스트 임동혁 씨가 유명하다. 그의 연주는 애상적이고 서정적인 쇼팽 음악의 장점을 완벽하게 살린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넬손 괴르너도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꼽힌다. 지난해 5월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