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후반의 대학교수인 L씨(여)는 지난해 6월부터 심한 설사로 여러 가지 약을 복용했지만 낫지 않았다. 대장내시경 등 다양한 검사를 받아봤지만 별 이상이 없다는 얘기만 들었고, 이후 점점 설사가 더심해지자 한의원을 찾게 됐다.
잘 낫지 않는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찬 음식과 과일을 자주 찾게 되는 여름철에는 배가 아파 고생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다.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내시경을 받아 봐도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거나 과민성 대장증상, 기능성 소화불량 같은 애매한 병명의 진단을 받고 약을 먹어 보지만 잘 개선되지 않는다.
한의학적으로는 만성 설사가 잘못된 생활습관과 오장육부의 기능이 약해진 문제 또는 체질적인 특성 등 여러 원인으로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생활습관을 바로 잡고 장부의 기능을 활성화하면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한의학에서는 위장질환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식적(食積)’을 꼽는다. 식적은 과식, 불규칙한 식습관, 폭식 등으로 뱃속에 생겨난 묵은 체기를 말한다. 즉 음식을 먹고 체하는 것을 ‘식체’라고 하는데, 식체가 다 풀리기 전에 다시 체하기를 거듭해 만성화된 상태를 ‘식적’이라고 한다.
식적이 있으면 자주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하게 된다. 특히 식적복통은 배가 아프다가 설사를 하게 되면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배에 가스가 차거나 방귀가 잦고 속이 더부룩해 소화가 잘 안되거나 냄새가 매우 심한 대변을 보는 등 여러 가지 위장증상을 겪게 된다. 또 배를 누르면 심한 통증을 느끼고 항상 속이 안 좋다 보니 만성적인 피로감도 느낄 때가 많다. 결국 과민성 대장이나 소화불량으로 시달리는 사람들 중 식습관에 문제가 있다면 식적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체질적으로 위장이 차가운 사람들이 냉한 음식을 자주 먹거나 몸을 차게 두어 생기는 복통과 설사도 문제가 된다. 이처럼 속이 차서 생기는 설사를 한설(寒泄)이라고 하는데 배를 만져보면 찬 기운이 느껴지거나 손발이 찬 사람들에게 많다.
신장 기운이 약한 증세, 즉 신허(腎虛)도 만성적인 복통과 설사를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배가 아프거나 대변이 나쁘다면 위장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한의학에서는 몸의 밑바닥에 위치한 신장이 배안을 따뜻하게 덥히고 위장기능을 돕는 작용을 한다고 본다. 따라서 신장이 약해지면 음식물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힘이 떨어진다. 신허로 인한 설사는 아침이나 새벽에 심하며, 허리나 어깨가 아픈 증세 또는 어지럼증이나 이명(귀울음)같은 증상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
그밖에도 잦은 음주는 주설(酒泄)이라고 부르는 만성 설사를 부르고, 신경을 많이 써서 기(氣)의 흐름이 나빠지거나 심장이 약해져도 칠정설(七情泄)이라는 설사에 시달리게 된다. 칠정설의 특징은 설사를 해도 시원치 않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복통과 설사를 치료할 때는 원인에 따라 묵은 체기를 흩어서 식적을 없애거나 신장의 기능을 보충하며 위장의 냉기를 풀어 주는 따뜻한 성질을 가진 한약을 처방한다. 하지만 몸속에 열이 겹치면 서늘한 약을 쓸 때도 있고 침과 뜸 치료를 함께 쓰기도 한다. 이렇게 병의 원인과 환자의 체질에 따라 설사의 치료방법도 달라진다.
따라서 소화가 안 된다고 무조건 소화제를 복용하거나 설사가 난다고 지사제에만 의존하면, 병이 점차 고질화되기 때문에 정확한 치료로 원인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L씨의 설사는 잘못된 식습관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발병된 것으로 진단돼 3주간의 투약 후에 완치될 수 있었다.
여름철 설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생활습관이 중요하다. 먼저 찬 음식을 많이 먹지 않고, 밤에 잘 때 배를 잘 덮고 잔다. 또한 제때 식사하되 저녁식사를 가볍게 하고 식후에는 배를 여러 번 문지르며 가볍게 걷는 습관을 들인다. 과식과 폭식을 피하며 기름진 음식과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 것도 좋지 못하다. 배가 살살 틀면서 아플 때는 따뜻한 찜질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여름철 잦은 복통과 설사는 그 자체로도 고통스럽지만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환절기에 감기를 비롯한 여러 질병에 걸리는 원인이 되므로 적절한 치료와 예방으로 건강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