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 기자의 브라보 클래식 ⑨]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피아노 협주곡 2번’…우울한가? 라흐마니노프 선율에 빠져보라
입력 : 2012.06.01 17:10:29
수정 : 2012.06.25 17:34:13
라흐마니노프
배우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지하철 환풍구에서 펄럭거릴 때 남성들은 숨을 죽였다. 영화 <7년만의 외출>의 명장면 덕분에 그녀는 섹시 미인의 대명사로 세계인의 환호를 받았지만 조명이 꺼지면 우울증을 앓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영화 배경 음악인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만든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도 같은 병에 시달렸다. 1897년 생전 처음으로 발표한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았기 때문. 선배 작곡가 큐이(1835~1918)는 “모세가 애굽(이집트)에 내린 일곱 재앙 중 하나에 속한다”고 맹렬하게 비판했다. 비난만 쏟아졌고 아무도 찬사를 보내지 않았다.
사실 순전히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이 곡을 지휘한 작곡가 글라주노프(1865~1936)도 문제였다.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채 지휘했다고 한다. 당시 글라주노프의 건강이 좋지 않아 리허설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건 이 곡의 실패로 라흐마니노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불과 24세 청년이었던 그는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금방이라도 발작을 일으키고 기절할 것처럼 멍한 나날을 보냈다’고 그는 당시 절망감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3년 동안 곡을 쓰지 못했다. 대신 피아니스트로 전향했다. 탁월한 재능이 있어 금세 정상에 올랐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다시 창작 욕구가 샘솟았다.
하지만 여전히 교향곡 실패의 악몽이 그를 짓눌렀다. 그래서 모스크바 정신과 의사인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갔다. 최면과 자기 암시 요법 치료를 받은 끝에 라흐마니노프는 슬럼프를 극복했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발표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는 다시 작곡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달 박사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초연에도 크게 성공한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도약할 수 있었다.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로서 상승 가도를 달렸다.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가 되는 영광도 얻었다. 이 곡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는 암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갔을 때 이 작품에 위로를 받았다.
이 선율의 매력과 가치는 아름다운 승화에 있다.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뒀던 격정과 서러움, 애증을 한꺼번에 폭발시켜 깨끗하게 정화한다. 러시아 특유의 애상적인 관현악과 화려한 피아니즘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1악장 모데라토(Moderato)는 어둡고 장중한 피아노 건반을 강렬하게 내리치면서 시작된다. 피아노 선율의 세기가 점점 강화되면 비장한 관현악이 휘몰아친다. 격정이 차츰 가라앉으면 섬세하고 서정적인 피아노가 이어진다. 이후 화려하고 정열적인 악상이 전개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3악장 알레그로 스케르잔도(Allegro scherzando)는 씩씩하고 자유롭다. 눈부시게 열정적인 악상이 펼쳐진다. 늪에 빠졌다가 힘차게 다시 일어나는 느낌이다. 라흐마니노프도 그렇게 다시 살았다. 하지만 실패한 교향곡 1번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그의 사후 2년 뒤 두 대의 피아노와 관현악으로 편곡한 악보가 발견됐다. 그에게는 특별한 작품이라 다시 고친 것으로 보인다. 20대 시절 청춘과 실연의 상처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악보 첫머리에는 비극적 사랑을 담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발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음표 사이사이에서 강렬하고 격정적인 감정이 숨어있다.
한 손으로 13도 짚던 거구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는 암 투병 중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 위로를 받고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라흐마니노프는 평생 피아노 협주곡 4곡을 남겼다. 그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기교가 너무 어렵다. 특히 한 손으로 온음 9개 간격을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손이 커야 한다. 190㎝의 키로 거구였던 그는 한 손으로 13도 음정을 거뜬히 짚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그를 가르켜 ‘6피트 반의 괴물’이라고 했을 정도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커다란 손으로 복잡한 화음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손가락 힘도 굉장했다. 그러나 힘을 남용하지 않았다. 날렵하고 섬세하게 큰 음역의 건반을 짚으며 투명하고 서정적인 선율을 뽑아냈다.
다스리는 선율 폭이 넓어 그의 연주는 성당 종소리를 연상시켰다. 러시아 대륙처럼 호방한 음색에다 기교도 뛰어나 피아니스트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1909년 미국 순회 연주를 다니며 극찬을 받았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이 투어를 위해 작곡한 작품이다. 장대한 스케일과 고난도 테크닉을 요구해 ‘악마적 협주곡’으로 불렸다. 하지만 작곡자인 그는 너무도 편안하게 소화했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rubato, 연주자 마음대로 박자를 바꿔도 되는 기호)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 들어갔다”고 평했다.
창작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한 후 작곡한 이 작품은 굉장히 화려하다. 기교를 과시하기 때문에 곡의 구조가 복잡하고 상당히 까다롭다. 무겁게 가라앉다가도 갑자기 솟구치고 극도로 절제하는 대목이 반복돼 어지럽다. 체계적인 화음이 진행되다가도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힘과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장엄한 분위기의 느린 악장에서도 대담한 화성을 감행한다. 마지막 악장에서는 긴 파도를 타는 듯 선율이 끊임없이 등장하다가 눈부시게 끝난다.
곡을 소화하기 힘든 탓일까. 영화 ‘샤인’ 실제 주인공인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이 연주하다 미친 작품이기도 하다. 헬프갓은 성공을 위해 가족을 버렸다는 자책감과 완벽한 연주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정신적 혼돈에 빠졌다고 한다.
마지막 로맨티스트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러시아 노보고로트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이고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다. 그런데 부친이 재산을 탕진해 가세가 기울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총명한 어머니는 아들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음악 공부를 시켰다. 라흐마니노프는 12세에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즈베레프 집에 얹혀살면서 연주법을 익혔다. 14세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다. 사촌형 알렉산더 실로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는 졸업 작품인 1막짜리 오페라 ‘알레코’ 덕분에 선배 작곡가인 차이콥스키(1840~1893)의 총애를 받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라흐마니노프를 작곡과 공연에 참여시켰다.
막강한 후견인을 둔 라흐마니노프는 젊은 시절 큰 성공을 거둔다. 미국 투어 성공으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종신 지휘자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고국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애상적이고 몽환적인 러시아 선율로 가득 차 있을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다.
하지만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은 그의 안정된 삶을 방해했다. 정치에 관심은 없었으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썰매를 타고 헬싱키로 떠났다. 2000루블이 든 손가방과 작곡 노트, 두 개의 악보만 지닌 채 목숨을 건 망명을 시도했다.
러시아 국경을 넘은 후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그런데 1931년 소련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소련 정부는 즉각 그의 모든 작품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2년 동안 그의 작품은 소련에서 연주되거나 연구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35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하지만 지독한 향수병에 걸려 제대로 정착할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캘리포니아 집에서 러시아 의상을 입고, 러시아 하녀를 고용해 러시아 사람들과 파티를 즐겼을까.
마치 러시아에 영감을 두고 온 사람처럼 작곡도 하지 못했다. 고향을 떠난 후 죽을 때까지 6개의 작품만 완성했다. 자신의 감성적 음악이 구식이 됐다는 사실에 절망한 그는 “나는 고립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유령처럼 느껴진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의 음악이 울음을 애써 참다가 터트리는 것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고국에 대한 미련과 애정을 행동으로 옮겼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패색이 짙어지자 모금 연주회를 개최하며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일로 조국과 화해한 그는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 준비를 하던 중에 사망했다. 1943년 미국 전역을 순회 연주하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였다.
20세기에 살면서도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전통을 지켰던 마지막 로맨시스트 라흐마니노프. 낭만주의자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 그의 영혼이 담긴 음반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1919~1942년 직접 연주한 음원을 발췌한 음반 ‘디 아트 오브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피’가 음악 애호가들의 소장품 목록에 들어 있다.
후손을 잘 둔 덕분에 그의 음악이 새롭게 부활하기도 했다. 2007년 손자인 알렉산데르는 그의 교향곡 2번을 피아노 협주곡 5번으로 재탄생시켰다. 작곡가 알렉산데르 바렌베르크가 그 작업을 맡았다. 원곡에 녹아있는 피아노 선율을 끄집어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니즘이 살아있는 협주곡을 만들었다. 꽉 찬 중저음으로 장대하고 중후한 러시아 특유의 낭만을 기품 있고 섬세하게 빚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