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비애로 가득 찬 말러 교향곡 6번
T S 엘리엇(1888~1965)의 ‘황무지’에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가 나온다. 이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구절이 나온다. 엘리엇은 1922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신앙 부재와 정신적 황폐를 불모지에 비유하며 이 시를 썼다.
절망이 깊이 드리워진 시어들을 보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가 생각난다. 그는 무척 염세적이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평생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병적으로 죽음에 집착했다. 그 영향으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만들고 나자 딸이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말러의 교향곡은 인간의 불안과 인생무상, 삶과 죽음, 자연 회귀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절망과 비애가 넘실대는 교향곡 제6번 ‘비극적’은 염세주의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 교향곡에서 묘사되는 영웅의 성공과 회의, 패배 등은 그의 자화상이다.
보헤미아(체코) 출신의 독일계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31세에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됐지만 주변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36세에는 빈 궁정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발탁되고 이곳에서 10년간 최고의 영화를 누리면서 빈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 그 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으로 옮기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맡게 되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성격과 신랄한 말투 때문에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다.
당시 그는 최고 오페라 지휘자였고 바그너를 숭배했지만 바그너 부인의 반대로 독일 바이로이트축제 극장에 서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말러는 유대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지휘자로서 영욕의 시간을 반복한 그의 교향곡 6번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비극을 암시하는 화음 변화, 먼 곳으로 인도하는 신비로운 소 방울 소리, 악마적인 스케르초(경쾌하고 해학이 넘치는 기악곡)에 끼어든 천진한 오보에 솔로, 레퀴엠을 연상시키는 트롬본의 울림 등은 마치 암호처럼 느껴진다.
역경 이겨내는 거인을 형상화한 교향곡 1번
말러.
말러는 미완성 작품을 포함해 모두 11곡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의 선율은 한결같이 웅장하고 진지하다. 삶과 죽음, 불멸, 존재의 본질과 같은 철학적·우주론적인 질문을 반영하고 있다. ‘교향곡은 우주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말러의 교향곡은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연주도 까다롭다. 오케스트라 역량의 최대치를 요구하는 험준한 산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더없이 아름답고 예민해 외면할 수도 없다.
세상 살기가 참 팍팍하게 느껴질 때 힘을 주기도 한다. 교향곡 1번 ‘거인’은 강인한 의지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거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188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된 이 곡은 한 인간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디고 인격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나갔다. 제1, 2악장은 청춘의 기쁨과 고뇌, 낭만이 아름답게 드리워져 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제1악장의 뻐꾸기 울음소리(목관악기)는 청춘의 봄을 상징한다. 2악장에서는 부드러운 왈츠 풍의 춤곡이 펼쳐진다.
그러나 청춘은 그리 길지 않다. 3악장에서는 이내 허무에 빠진다. 장송행진곡 풍의 선율은 상실감 속에 진행된다. 이 대목에는 고뇌와 방랑의 연속이었던 말러의 우울한 청춘이 녹아 있다. 그는 전업 작곡가가 되기 위해 ‘탄식의 노래’를 작곡해 베토벤상에 응모하기도 했지만 수상에 실패해 지방 소극장을 전전했다.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려는 강렬한 의지는 4악장에서 폭발한다. 공연장을 뒤흔드는 대규모 관현악 편성은 처절한 투쟁 끝에 진정한 거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극적으로 표출했다. 20대의 말러가 쓴 곡이니만큼 에너지가 넘친다. 고통과 분노 끝에 승리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이 악장을 듣고 있자면 가슴 속에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할 때 많이 연주된다. 교향곡 3번은 ‘한여름 아침의 꿈’이란 제목이 붙여진 적이 있으며 대자연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선율이 우아하고 환상적이다.
죽음의 신과 화해하는 선율 교향곡 4번
서울시향 연주 "천인교향곡".
교향곡 4번은 현세의 절망이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에 찬 천상의 세계를 표현했다.
이 곡을 연주할 때 악장은 두 대의 바이올린을 들고 나와 번갈아 연주한다. 악보에 한 음을 높여 조율한 바이올린으로 바꿔 연주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말러는 한 음 높인 바이올린 독주로 독일 전설 속 죽음의 신 ‘하인(Hein)’을 묘사하려 했다. 좀 더 신경질적이고 자극적인 음색으로 저승에 인도하는 소리를 내라는 뜻이다.
오싹한 죽음의 신이 등장하지만 말러의 교향곡 4번은 그다지 날카로운 선율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후 천국으로 들어간 것처럼 온화하고 평화롭다. 세속의 공포에서 초월한 듯 차분하고 나른하기 때문에 2악장을 들으면서 꾸벅꾸벅 조는 관객들도 있다.
3악장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다. 말러가 기독교 성녀의 이름을 따서 ‘성 우르술라의 미소’라고 부른 이 악장에는 사무치는 그리움이 배어 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가다보면 갑자기 천국의 문이 열리는 듯 장엄한 선율이 솟구친다. 4악장에서는 하늘나라의 꿈결 같은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천사가 등장한다. 그 천사는 하늘나라에 사는 말러의 동생일 수도 있고 어머니일 가능성도 있다. 1900년 마이어니히 호숫가의 새 별장에서 작곡한 이 곡은 기존의 말러 음악에 짙게 드리워진 절망적 어두움이 사라지는 대신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차 있다. 천국 생활의 목가적 분위기를 드러내기 위해 트롬본과 튜바 등 무거운 악기를 배제하고 밝은 음색의 간결한 악기 편성이 두드러진다.
거대한 사운드 ‘천인교향곡’
교향곡 8번 ‘천인교향곡’은 1시간 20분 동안 연주하는 대작이다. 스케일도 아주 커서 1000여 명의 연주자가 매달려야 한다. 1910년 초연 당시 858명의 성악가와 171명의 연주자를 동원해 웅장한 선율로 관객을 압도했다.
말러는 “이 교향곡은 대우주가 울리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나의 교향곡은 이 곡의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혔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전의 그의 교향곡이 인간의 불안과 인생무상, 자연 회귀 등 주관적인 비극을 다룬 반면 ‘천인교향곡’은 신의 영광과 환희를 찬양했다.
제1부에서는 라틴어 찬가 ‘오라 창조주이신 영이여’가 사용됐고, 제2부는 괴테의 ‘파우스트’ 대사가 인용됐다.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이 곡은 음악 어법이 너무 난해하고 연주 시간이 길어 무대에 거의 오르지 못했다.
말러 사후에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작품을 부활시킨 사람은 바로 세계적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그는 1960년대에 이 곡으로 ‘말러 붐’을 일으켰다. 번스타인의 스승이었던 브루노 발터(1876~1962)가 말러의 제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번스타인은 같은 민족인 말러의 곡을 들을 때마다 “내가 작곡한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지휘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말러 교향곡 명반
번스타인이 음악적 사명감을 가지고 녹음한 말러 교향곡 전집 음반(12개 CD)은 말러 해석의 교과서로 꼽힌다. 뉴욕 필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음반으로 2009년 번스타인 탄생 90주년을 맞아 소니 마스터워크스에서 발매됐다.
말러 제자인 브루노 발터가 녹음한 말러 교향곡집 (7개 CD-소니 마스터스 발매) 역시 독보적이다. 뉴욕 필과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음반으로 20세기 최고 지휘자의 역량이 총집결돼 있다. 발터는 말러가 함부르크 시립 오페라 합창단 지휘자로 일할 때 처음 만났다. 평생 말러를 우상으로 여겼으며 말러도 그를 끔찍이 아꼈다. 발터는 말러의 조수이자 제자로서 공동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말러 해석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미국 지휘자 데이비드 진먼(76)의 말러 교향곡 시리즈(소니 마스터스 발매)도 화제작이다. 그는 스위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를 유럽 1급 오케스트라로 끌어올린 거장. 말러 교향곡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화려한 금관을 억제하고 얇고 투명한 음색을 살렸다.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1번 음반(EMI 발매)도 전설의 명반이다. 말러의 작품 밑바닥에 흐르는 괴기스러우면서도 부자연스러운 감정을 통렬하게 도려낸 것 같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지난해 말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녹음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EMI)도 주목할 만하다. 래틀의 아내인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제나와 영국 소프라노 케이트 로열이 녹음에 참여했다.
말러 탄생 150주년을 맞아 발매된 ‘말러 더 피플스 에디션(Mahler The People’s Edition)’은 세기의 연주만을 모았다. 음반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DG)과 데카의 말러 교향곡 음반 중 가장 사랑받는 것들을 뽑아 말러 교향곡 전집을 구성한 것. 음악 애호가 5000여 명을 대상으로 투표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음반들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