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점의 그림이 있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어느 시골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골 처녀가 밭일을 하다 말고 잠시 울타리에 기대어 쉬고 있다. 이때를 놓칠세라 동네 청년들이 다가와 수작을 건다. 처녀는 애원하듯 구애의 눈길을 보내는 청년들을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그러나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저들의 눈길 속에 오가고 있는 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의 의무다. 우세한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만나 후손을 남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들은 그것이 자신의 유전자에 각인된 의무인 줄도 모른 채 낭만적인 사랑이라고만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 인간이 지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유전적 본능은 역사를 만들어 왔다. 종을 이어주는 끈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소재가 됐고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한 나라를 멸망시키기도 했다.
현대인들이 술이나 마약, 게임에 탐닉하는 것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이라는 학계의 보고가 있을 정도다. 인간은 유전자 복제를 성공시키기 위해 ‘유혹’이라는 기술을 사용한다.
미국의 유명 작가 린다 손탁은 '유혹, 아름답고 잔혹한 본능'에서 신석기시대 동굴 벽화에서부터 현대의 성형외과 수술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숨겨진 유혹의 코드를 찾아냈다. 인간은 유혹을 성공시키기 위해 제일 먼저 자신의 몸에 손을 댔다.
중세 여인들은 몸을 모래시계형으로 만들기 위해 코르셋으로 몸을 졸라맸고 인체에 유해한 화장품을 겁 없이 사용했다. 성기 중심적인 사고를 지닌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에 보형물을 삽입했다. 지금도 성기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상품은 꾸준히 은밀하게 유통되고 있다. 근현대 문명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는 더했다. 목을 잡아 늘리고 입술을 절단하고 혓바닥을 뚫어서까지 이성을 유혹하고자 했다.
인간은 언젠가 소멸한다. 그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복제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고 인간의 삶을 지배했다. 단정 짓기 부담스럽지만 인간의 사랑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슬픈 욕구다.
신체 일부가 붙어서 태어난 샴쌍둥이들의 소원은 분리수술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사망 확률이 아무리 높아도 용기를 내서 수술을 선택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개성(Individuality)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유일한 ‘나’를 찾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물음이 고개를 든다. 개성은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양육가설로 유명한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쓴 <개성의 탄생>은 개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일단 해리스는 개성과 유전자는 별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유전자가 거의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조차 성격과 행동양식이 다르다는 것만 봐도 해리스의 주장은 쉽게 이해된다. 해리스는 개성을 만드는 메커니즘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관계체계, 사회화체계, 지위체계가 그것이다. 관계체계는 차별화를 배우는 장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 속에 놓인다.
이 관계망 속에서 아이는 남과 나를 구별하는 법을 알게 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해야 하고 또 좋아해야 하는지를 자기도 모르게 배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이 편저자인 거대한 인물사전 하나를 완성하게 된다. 이것이 아이가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성격과 행동양식의 큰 틀이 되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서 관계를 경험했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사회화체계는 소속감과 소속된 집단을 통해 자기 모습을 찾는 과정이다. 가장 비합리적인 개성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는 가정을 벗어나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용납되는 행동방식을 터득한다.
똑같이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이슬람 국가에서 자란 사람과 기독교 국가에서 자란 사람은 성격과 행동 패턴이 다르다. 즉 소속감은 한 사람의 개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밑그림을 완성해준다. 평소에는 애국심이 별로 없던 사람도 축구 한·일전이 벌어지는 날은 애국자가 된다. 바로 옆집에 사는 유대인과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독일인들도 히틀러가 게르만과 유대인이라는 구분법을 들이댔을 때는 대부분 유대인 친구와 쌓았던 우정을 버리고 게르만 편에 섰다.
결국 이러한 소속감이 개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집단 소속감과 관련된 강렬한 감정은 한 집단이 대부분 동일한 혈연집단이었던 원시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본능이기도 하다.
지위체계는 자기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관계를 통해 인물사전을 완성하고 사회를 통해 소속된 집단의 특성을 몸에 익힌 사람은 마지막으로 자기 지위를 확인한다. 비로소 개성이 완성되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확인하는 과정은 복잡한 지도에서 특정한 지점을 찾는 작업이다. 내가 힘이 센지 약한지, 똑똑한 편인지 아닌지, 예쁜 편인지 아닌지 이런 것들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인간은 개성을 완성해 간다. 이 위치 확인은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최종시험이다.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특별한 실험을 했다. 미모의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을 구분해 놓고 똑같이 무례한 대우를 했다. 미모의 여성들은 평균 3분20초 만에 불만을 터뜨렸고, 그렇지 못한 여성은 평균 9분이 지나서야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 외모가 개인 성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결국 세상에 오로지 한 명뿐인 ‘나’는 태어났다기보다는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