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그가 최후를 맞이한 곳은 알려진 대로 파리 근교인 오베르주다. 고흐와의 인연으로 한적하고 평범한 농촌 마을인 오베르주엔 지금도 수많은 방문객이 들른다. 고흐는 이 마을에서 안식을 찾았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이 마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동생 테오와의 편지 왕래에서 그는 오베르주 생활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알렉산드라 리프라는 요리 역사학자에 의해 아마도 고흐가 먹었을 만한 요리가 재현된 적이 있다. 그 요리 중의 하나가 호박 스프다. 올리브유가 귀한 대륙성 기후인 이 지역에서는 땅콩이나 호두 기름, 버터를 요리에 즐겨 썼다. 그 버터로 호박을 볶고 우유를 넣어 끓인 영양 만점의 호박 스프는 지칠 대로 지친 고흐가 원기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이다.
흔히 이탈리아나 프랑스를 스프의 나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스프를 즐겨 먹지는 않는다. 특히 같은 이탈리아나 프랑스라 하더라도 추운 지역에서 주로 먹는다. 더운 스프는 역시 추위를 이기고 체력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더운 지방에서는 스프를 별로 먹지 않고, 먹더라도 뻑뻑하고 크림이 많이 들어간 진한 스프보다는 맑은 스프를 선호한다. 이탈리아 생활 중 우리가 스프를 연상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스타일, 즉 믹서에 갈아 농밀한 퓌레처럼 보이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다. 북쪽 추운 지방에서 겨울에 먹는 스프로나 간혹 보았다. 이런 진한 스프는 열량이 높아서 겨우내 체력을 지키고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다. 우리가 한겨울에 더운 국물 요리를 더 많이 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이런 스프는 허약한 몸을 보강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흐가 아마도 호박 스프를 즐겼으리라는 짐작은 이런 연상에서 비롯한다. 특히 오베르주 지방은 비교적 온화하지만 겨울은 매서운 기후로 알려져 있다.
호박은 우리 음식에도 늘 올라가는 중요한 식재료다. 엿을 고기도 하고 떡이나 죽, 범벅의 재료로 요긴하게 쓰였다. 단호박은 상대적으로 귀한 작물이어서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건 근래 들어서의 일이다. 과거에는 어디서나 심어두고 방치하다시피 해도 큼지막하게 잘 자라 나 수확을 도와주는 재래종 호박이 대부분이었다. 호박은 영양가도 높고 특히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아서 푸성귀가 귀한 겨우내 먹으면 몸에 아주 좋았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긴긴 겨울 밤, 할머니가 호박범벅을 만들어 주시던 기억이 난다. 창고에 있는 마른 콩과 옥수수, 밀가루를 넣고 만드시던 호박범벅. 그 달큼하고 구수한 냄새가 부엌에서 피어나면 나는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가 이종형들이 떠는 소란에 잠이 깨어 범벅을 마구 입에 넣곤 했다. 그 때문인지 호박범벅을 연상하면 침이 고이고 할머니의 동백기름 바른 머리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호박으로 만드는 파스타도 있다. 파바로티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북부 모데나라는 도시는 호박 만두로 유명하다. ‘러비올리 디 주카’라는 이름의 이 만두는 달걀을 넣어 반죽한 피(皮)에 호박과 치즈로 양념한 소를 채워 소금물에 삶아 먹는 요리다. 삶아서 건진 후 위에 파르미자노 치즈(흔히 파마산이라고 부르는 미국산은 이미테이션으로 맛이 없다)를 뿌리면 정말 누가 죽어 나가야 정신을 차리는 맛이다. 호박은 입안을 꽉 채우는 속성을 지녔다. 밀도 있고 부드러우며 진지한 맛이다. 약간 단맛도 있고 향은 입에 남는다. 이 지역 특산인 가벼운 거품이 이는 람부르스코 와인을 곁들이면 모데나식 정찬이 된다. 틀림없이 파바로티도 즐겼을 법한.
호박을 퓌레로 만들어 면을 뽑기도 한다. 연한 주황색의 면이 뽑아지는데 크림과 치즈에 버무려 먹으면 겨울철 힘을 내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스프를 만드는 것도 있다. 늙은 호박이나 단호박 스프를 제대로 만들려면 몇 가지 팁이 있다. 믹서로 갈고 크림을 넣는다는 건 짐작하겠지만 뜻밖에도 놓치곤 한다. 호박을 양파와 함께 버터에 잘 볶아서 맛을 충분히 들이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호박은 잘게 썰어야 하는데, 버터에 볶아지는 단면적이 넓을수록 맛이 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좋은 육수로 맛을 더해 줘야 한다는 점이다. 걸쭉한 크림 스프처럼 보이므로 육수의 존재를 잊기 쉬운데 스프의 뒷맛은 거의 육수가 책임진다고 보면 된다. 고기국물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채소 우린 물을 넣어 맛을 보강해주면 좋다.
단호박이나 늙은 호박을 쪄서 먹는 것도 입의 즐거움이다. 혈당을 크게 높이지 않으므로 노인들에게도 좋다. 호박을 찔 때는 소금을 조금 넣으면 단맛을 더 잘 느끼게 된다. 단호박을 고를 때는 겉이 매끈하고 울퉁불퉁하지 않은 것, 무게가 묵직한 것이 좋다. 늙은 호박도 상처가 없고 무거우며 크기가 적당한 것을 고르도록 한다. 냉장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서늘한 곳에 신문지로 싸서 두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