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여 객석을 은은하게 밝혀주던 크리스탈 샹들리에들이 서서히 천정으로 올라갔다. 미국 뉴욕 맨해튼 66가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이하 메트) 오페라극장에 불이 꺼지면 무대막이 올라가고 세계 성악계 별들이 등장한다. 무대 조명이 어둠을 밀어내면 웅장하고 화려한 공연이 펼쳐진다.
전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메트는 최고 음악가와 연출가들만이 설 수 있는 영광의 자리다. 빨간색 객석 의자에 앉아 스타들의 향연을 듣고 있으면 황홀한 기분마저 든다.
2010년 가을부터 올해 여름까지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오페라 20편을 봤는데 바그너의 음악극 '뉘벨룽겐의 반지' 4부작 중 2편 '발퀴레'와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바그너는 장중한 선율에 인간의 탐욕과 희생, 파국 등 인생사를 응축해놓아 묵직한 울림을 줬다.
오페라 [루치아]의 공연 모습들
사랑을 잃고 원치 않은 결혼식을 올린 여인이 신혼 첫날밤 남편을 살해한 루치아가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는 섬뜩하면서도 애처로웠다. 병약하고 섬세해 보이는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는 슬픔과 분노, 격정이 서린 목소리로 관객을 울렸다. 그녀의 비극적인 아리아는 오랫동안 내 가슴에 머물며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줬다.
만약 뉴욕 출장이나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면 세계적 오페라의 낭만에 젖어보면 어떨까. 해질 무렵 센트럴파크를 산책한 후 메트로 가서 명품 클래식 선율을 들어보라. 공연 쉬는 시간에 샴페인 한 잔을 마시며 창 너머 뉴욕의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
화제작을 보고 싶다면 뉴욕에 가기 수개월 전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홈페이지(http://www.metoperafamily.org)를 통해 미리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인기작이 아니라면 당일 극장에서 티켓을 살 수 있다.
9월 시작된 2011~2012 시즌 오페라 작품들 중에 가장 화제작은 도니제티의 오페라 '안나 볼레나'. 세계 톱 소프라노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안나 네트렙코(40)가 죽음 직전에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가 청중을 홀리고 있다. 9월 26,30일 공연을 시작한 이 오페라는 영국 헨리 8세(1491~1547)와 앤 불린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엄하고 비장한 선율에 담았다.
오페라 극 내용이 너무 비극적이다. 간통죄로 몰려 처형을 기다리면서 정신줄을 놓은 안나 볼레나(앤 볼린의 이탈리아 발음)는 그날이 자신의 결혼식인 줄 착각한다. 그러나 왕과 새로운 왕비 지오바나 세이무어의 결혼식 축포와 종소리가 울려댄다. 안나는 귀족들을 저주하며 단두대로 향한다.
넵트렙코는 어둡고 서정적인 목소리로 안나의 절규를 처절하게 불러 객석을 감동시켰다. 세계 최고 소프라노라는 명성에 걸맞은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에 뉴욕의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
세계 오페라 1번지 메트의 2011~2012 시즌 개막작인 '안나 볼레나'는 간판 작품으로 내세운 만큼 스타 군단이 참여했다. 넵트렙코 외에도 연출가 데이비드 맥비카와 지휘자 마르코 아르밀리아토, 테너 스테판 코스텔로(페페르시경 역), 메조 소프라노 에카테리나 구바노바(지오바나 세이무어 역) 등이 가세했다.
안나를 얻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서 독립하는 종교개혁까지 단행했으나 결혼 1000일 만에 그녀를 간통죄로 몰아 참수하는 엔리코 8세(헨리8세의 이탈리아 발음) 역할은 러시아 베이스 일다르 아브드라자코브가 맡았다. 왕은 시종 스메톤과 안나의 첫사랑 페르시경을 끌어들여 거짓 증언을 강요할 정도로 비열하다. 결국 페르시경과 안나가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참수형을 내린다.
권력을 탐했으나 철저하게 버림받은 안나 역할은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가장 유명하다. 눈물과 한이 서려 있는 칼라스의 목소리와 선박왕 오나시스에게 버림받은 실제 인생사가 겹쳐 완전한 감정이입이 가능했다.
넵트렙코도 깊고 비장한 음색으로 비련의 여인 안나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출산 후 살이 좀 쪘지만 외모도 여전히 아름답고 섹시하다. 건강하고 빼어난 가창력으로 세계 무대를 뒤흔들고 있는 특급 성악가답다. 지난 2월 메트에 공연된 도니제티의 오페라 '돈 파스콸레'에서 계단을 뛰어다니면서 노래하는데도 음정이 흔들리지 않아 무척이나 놀랐다. '안나 볼레나'는 10월 3,6,10,15,18,21,24,28일, 내년 2월 1,4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메트는 이번 시즌에 '안나 볼레나'를 포함해 대작 오페라 26개 작품을 공연할 예정이다. 주목을 끌고 있는 작품은 바그너의 음악극 '뉘벨룽겐의 반지' 4부작 중 3편 '지그프리트'와 4편 '신들의 황혼'. 지난 시즌에는 1편 '라인의 황금'과 2편 '발퀴레'를 초연해 큰 성공을 거뒀다.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전경
캐나다 공연단체 '태양의서커스'의 라스베가스 상설 공연 '카쇼'(MGM그랜드호텔)를 제작한 로버트 레파지의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 연출이 압권이었다. 무대 위에 거대한 기둥들이 합쳐지고 흩어지면서 절벽과 평지를 만들었다. 그 기둥 위에 각종 영상이 펼쳐지면서 신과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부른 파국을 사실적으로 그려나갔다.
바그너가 26년에 걸쳐 작곡하고 대본을 쓴 '뉘벨룽겐의 반지' 4부작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게르만 신화를 녹였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신과 거인, 난쟁이 부족 니벨룽, 인간이 싸움을 벌이다 결국 모두 멸망에 이른다. 탐욕스러운 니벨룽 알베리히는 요정들이 지키고 있는 라인강 밑 ‘라인의 황금’을 훔쳐내 반지를 만들어낸다. 이 반지를 소유하게 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 권력이 그러하듯 반지의 소유자는 계속 바뀌고 이 과정에서 탐욕과 증오, 사랑, 배신이 여러 대에 걸쳐 펼쳐진다.
이번 시즌에 새로 선보이는 3편 '지그프리트'는 지휘자 데릭 이노우예와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브륀힐데 역), 테너 게리 레만(지그프리트 역), 바리톤 브라이언 터펠(방랑자로 변장한 신들의 왕 보탄 역) 등 스타 군단을 내세웠다. 공연은 10월 27일,11월 1, 5일 열린다. 4편 '신들의 황혼'은 내년 1월 27, 31일, 2월 3,7,11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또 다른 화제작으로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을 눈여겨 볼만하다. 이번 시즌에 처음 메트 무대에 오르는 이 작품은 로렌트 펠리의 연출작이다.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에서 공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치와 허영에 빠져 살다 결국 사막에서 최후를 맞는 치명적 매력의 여인 마농은 역시 뇌쇄적 매력을 지닌 소프라노 넵트렙코가 맡았다. 40년 동안 메트의 음악 감독을 맡아온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를 대신해 메트의 음악을 맡고 있는 수석 지휘자 파비오 루이지가 나온다. 내년 3월 26,31일,4월 3,7,11,14,17, 20,23일 관객을 찾는다.
11월 말에는 어김없이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이 공연된다. 눈 내리는 날 죽음을 맞는 가난한 예술가 연인의 슬픈 운명을 그린 이 작품은 겨울 시즌 오페라다. 뉴욕에서 여주인공 미미의 대명사는 바로 한국 소프라노 홍혜경 씨(52)다. 1984년 '티토왕의 자비'로 데뷔해 27년 동안 ‘메트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녀의 아성을 확인하고 싶다면 11월 18,22일 메트로 가라. 11월 25, 28일, 12월 2,8일에는 소프라노 히블라 게르츠마바가 미미 역을 노래할 예정이다.
이번 시즌에 메트 무대에 서는 또 다른 한국 성악가는 테너 이용훈 씨(38)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서 이스마엘레 역할을 맡아 9차례 공연한다. 9월 27일 첫 공연에 이어 10월 1,5,8,12,15,29일,11월 2,17일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