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이 없다면 비장함도 없을 것이며, 비장함이 없다면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 덮인 봉우리가 위대한 것은 도처에 등산가의 유체가 묻혀있기 때문이며, 바다가 위대한 것은 역시 곳곳에 파손된 배의 잔해가 떠다니기 때문이다. 인생이 위대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늙음과 필연적인 이별 그리고 영원한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이 문장은 중국의 뛰어난 역사학자이자 예술이론가인 위치우위(余秋雨)의 책 '중국문화답사기'에 실린 ‘폐허예찬’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인 위치우위의 글은 ‘흔적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는 거대한 역사나 웅장한 궁궐을 말하지 않는다. 같은 책에 나오는 ‘밤비 속의 시정(詩情)’이라는 글은 ‘밤비’라는 우울한 흔적에다 그가 어떻게 생명을 부여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보통 밤비는 사람들을 처량하고 암울하게 만들며 의욕을 빼앗는 자연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위치우위는 다음과 같은 헌사를 바친다.
“밤비의 매력은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찾을 수 있다. 밤비가 갑자기 솟구치는 야심을 삭혀준 적이 있으며, 들썩거리는 마음을 달래준 적이 있다. 또 일촉즉발의 싸움을 저지해주거나 흉악한 음모를 사라지게 해준 적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밤비로 인해 웅장한 큰 뜻이나 용감한 전진 또는 강한 열정이 사그라든 적도 있지만 말이다.”
동양사상이 그대로 배어 있는 멋진 문장이다. 땅을 적셔 나그네의 바쁜 발걸음을 잡고 우울한 추억과 만나게 해주는 밤비에 대한 그의 예찬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렇다. 밤비 때문에 어느 폭군은 화를 삭였고, 어느 호걸은 냉정을 찾았으며, 달리던 말은 쉴 수 있었고, 빼어 들던 칼은 다시 칼집을 찾아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위치우위 글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의 글은 묘한 자기장(磁氣場)을 형성한다. 그 자기장에 갇힌 사람들은 왠지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의 글에서는 폐허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알함브라의 헤네랄리페에서 바라본 나사리에 궁전과 알카사바 요새 모습
그의 '유럽문화기행'의 한 대목을 보자.
“모든 길은 저마다의 해답을 품고 있다. 이전에 떠나온 길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가 위대한 산문가인 이유는 뛰어난 규정 능력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기막힌 규정 해낸다. 그래서 그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 또 한 번 기막힌 규정을 한다.
“아마도 ‘죽음 직전의 고운 화장’이라는 표현이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비유인 것 같다. 이미 죽음은 임박했지만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직도 기운이 충만하고 정신이 맑은 그들은 곱게 화장을 시작했다.”
알함브라 궁전을 가 본 사람들은 ‘죽음 직전의 고운 화장’이라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규정인지 안다.
나는 운 좋게 알함브라를 가본 적이 있다. 가서 본 알함브라는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이었다. 무슨 말도 떠오르지 않는 아름다움, 도대체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죽음 직전의 고운 화장’이라는 말을 떠올린 위치우위는 역시 대단하다.
알함브라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700년 동안이나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의 마지막 궁전이었다. 7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동안 왕국을 유지했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도들의 끈질긴 공격에 밀려 지금의 그라나다에 포위된 채 왕조의 최후를 맞게 된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지어진 것이 알함브라다. 알함브라는 누구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지은 궁전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는 마지막 증거였던 것이다.
드디어 궁전을 버리고 북아프리카로 도망가던 날. 왕의 어머니는 젊은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울거라, 아들아. 사내로 태어나 자신의 공적조차 지키지 못했으니 눈물을 흘려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그라나다는 유럽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죽음 직전의 마지막 화장’만을 남겨둔 채.
사실 폐허의 매력은 정지의 매력이다. 아무런 여지도 남기지 않고 정지한 아름다움. 우리가 가끔 정지된 흑백사진에서 느끼는 것과 흡사한.
폐허가 아닌 마천루는 진행형이다. 뭔가 새로운 용도와 사연을 끊임없이 쓸어 담으며 진화하고 있는 마천루는 정지해 있지 않다.
‘정지’라는 건 인간이 느낄 수 있고,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극점이다.
폴 오스터는 자신의 소설 '폐허의 도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끝이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상상의 목적지 말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멈출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멈춘 것뿐이다. 그래, 멈출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