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이 아닌 진짜 정사장면을 촬영했다는 점에서 상영 전부터 논란이 많았지만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다. ‘영화에서 실제 섹스가 필요했나’라는 논란을 되풀이하며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실제 섹스를 했든, 하는 척 했든 영화에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드코어 포르노라 비난하는 사람들의 엄격한 기준도 그런 면에서 안타까울 뿐이다. 잘려진 성기를 들고 며칠을 돌아다니다 잡힌 여주인공의 엽기행각이 섬뜩하기만 해서도 아니다. 실제 주인공인 아베 사다의 범행 당시 나이가 남자의 성기를 소유하겠다고 잘라내기에는 마냥 연약하기만 한 28세였다는 사실이 놀라워서도 아니다.
영화의 충격에서 벗어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사랑의 방식이 결국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차이일 뿐 그다지 사다와 다를 바 없다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차이일 뿐
사다는 남편의 빚 때문에 유곽에 들어가고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유곽주인 키치조우와 눈이 맞아 3개월간 밤낮없이 정사를 나눈다. 사다는 키치조우가 자신의 아내와 정사를 나눌 때도 극심한 질투를 느낀다.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늘 키치조우와 함께하기를 원할 정도로 집착한다.
사랑하는 키치조우를 소유하기 위해 아무리 섹스를 해도 상대의 몸을 온전히 가질 수 없고 소유욕은 채워지질 않는다. 결국의 섹스 도중 키치조우를 목 졸라 죽이고 그의 페니스를 잘라 자신의 손에 넣음으로써 그를 영원히 소유하려한다. 사다는 아마 두 사람의 사랑이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했겠지만 결국 채울 수 없는 사랑의 허기는 섹스에 대한 미친 듯한 집착으로 표현된다. 또 상대의 성기를 내손에 넣음으로써 그 사랑을 완벽하게 소유하게 됐다는 착각을 광기로 드러낸다.
남자의 소유욕이 주제인 문제작도 있다. 영화 <복싱 헬레나(Boxing Helena)>의 주인공 닉은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헬레나의 사지를 절단해 곁에 두고 돌본다. 내가 이 정도로 너를 사랑하니 나를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도 우리네 사랑 방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너무 닮아 있어 기분이 상한다.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들 없으신지. 말랑말랑한 멜로 같은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우리말 제목만 보고 이 영화를 접했다가 상대방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원초적 본능을 지독스럽게 묘사한 내용에 기가 질리고 만다.
의사 닉의 어머니는 여러 남자와 놀아나는 부정한 여인이었다. 마더 콤플렉스인지 닉은 연인이 있었지만 성적으로 대담한 마을 처녀 헬레나와 몇 번의 관계를 가진 후 완전히 매혹된다. 이를 아는 헬레나는 닉이 엿보는 줄 알면서도 애인과 거친 섹스를 나눈다.
닉은 헬레나에게서 어머니를 느끼고 헬레나를 소유하기로 결심한다. 닉은 우여곡절 끝에 교통사고를 당한 헬레나에게 수술을 빙자해 다리를 자르고 휠체어를 탄 그녀가 말을 듣지 않자 팔마저 잘라 밀로의 <비너스>처럼 만든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애정결핍과 그녀 없이는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강박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다. 사지가 절단된 헬레나는 이전의 그 자유롭고 아름답던 헬레나가 아니다. 닉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닉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닉의 인형이 돼 버린다. 진정 그가 소유하고자 했던 그 헬레나인가?
사랑에 있어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어쩌면 서로를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소유욕은 연인들 사이에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잘못이기도 하다.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물질이나 대상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속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소유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유한 자가 힘과 권력을 가진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 감정인 사랑이 물질처럼 소유될 수 있는가? 사랑을 소유하려면 물질화 될 수밖에 없다.
짝사랑과 스토킹의 차이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눈을 맞추고 같이 이야기하고 서로 스킨십을 하며 섹스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다.
사랑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사람들은 사랑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대신 사랑의 행동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오직 나와 차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하며 나 이외 사람의 손이 닿아서도 안 되고 오로지 나와 섹스를 나누어야 한다. 행동을 독점하려는 소유욕이 점점 자라면 상대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한다. 즉 사랑받는 사람을 소유가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 사랑 그 자체가 위협받는 사태에 이른다. 가학증이나 피학증은 상대를 사물로 취급하며 조절하려는 대표적인 무의식적 시도다. 병든 소유욕의 극한은 스토킹이다. 일방적 애정공세라는 측면에서 짝사랑과 닮아있지만 같이 취급할 수 없다. 스토킹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소유하려는 무시무시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함에도 사람이란 것이 참으로 묘한 동물인지라 간섭하지 마라, 소유하지 마라 외치다가도 지겹도록 전화하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귀가시간을 간섭하는 상대에게 진한 사랑의 감동을 느낀다.
여기엔 기꺼이 소유 당하려는 모순된 마음도 숨어있다. 소유당하고 싶은 욕망의 허점 또한 소유하려는 상대가 놓치지 않기에 집요해진다.
사랑이 소유의 형식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상대를 질식시키고 목을 조른다. 진료실에서 가끔 부부의 섹스 트러블을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의 소유욕이 한 사람을 황폐화시켜 말려 죽이는 경우를 적잖이 목도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라지만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에 숨은 속성 중 하나인 소유욕이 두 사람에게 괴물처럼 무섭게 다가와 있는 경우 말이다. 사랑이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자신과 상대 모두가 성숙돼 가는 과정이란 걸 모든 사람이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