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맛과 향, 구조감 그리고 만족감이라고 흔히 말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요소가 포함된다면 와인의 레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 다른 와인과의 차별화된 특성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하는 레이블은 한정된 물리적 공간 안에 다양한 정보를 보여준다. 이러한 와인 레이블의 디자인적 요소에 이목이 더욱 집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와인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구성요소들의 매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 와인의 전통을 지키는 클래식한 레이블을 비롯해 신대륙 와인에서 종종 행해지는 새로운 시도들이 관심을 이끈다.
레이블 디자인을 논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샤또 무똥 로칠드일 것이다. 매년 다양한 유명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새롭게 디자인 한 레이블을 선보여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최근 주목 받는 와인 레이블과 그 안에 담겨진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자.
미켈레 끼아를로의 니볼레 Michele Chiarlo Nivole
미켈레 끼아를로 모스까또 다스띠 니볼레
바롤로, 바르베라, 바르바레스코 내 최고의 싱글 빈야드를 보유하고 있는 부티크 와이너리 미켈레 끼아를로는 창립자의 이름을 딴 가족 소유의 와이너리로서 피에몬테 No.1 수출 브랜드다.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과 가격대비 최고의 품질을 갖추고 있다.
미켈레 끼아를로는 품질과 열정뿐만 아니라 빈야드 전체에 살아 숨쉬는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미국 오스카 시상식 세트 디자인 부분에 노미네이트된 디자이너 임마누엘 루자띠가 디자인한 빈야드 내 아트 파크로 이태리 와이너리의 상징적인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이탈리아 삽화 작가의 지안 까를로 페라리의 아트라벨링으로 레이블에서도 예술적인 영감을 엿볼 수 있다.
지안 까를로 페라리는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미켈레 끼아를로의 레이블에 예술적 영감을 탁월한 색감으로 표현한다.
지안 까를로 페라리
와인을 단지 화이트나 레드, 보랏빛으로 묘사하던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창조적인 결과물을 선보였다. 또한 미켈레 끼아를로의 체레퀴오와 라꾸르뜨 와인에 Semi di Viti라는 제목의 아트북이 포함된 미켈레 끼아를로 아트북 기프트 박스를 제작했다. ‘포도씨’라는 의미의 이 아트북은 미켈레 끼아를로 와인 라벨에 그려진 수채화, 스케치, 판화 그림들이 들어가 있어 단순한 레이블 북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이 함께 한 레이블 중 모스까또 다스띠 니볼레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미켈레 끼아를로의 와인 중 가장 달콤한 와인이기도 한 모스카토 다스띠를 375ml의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이는 병에 담았다. 여기에 모스까또의 경쾌한 색감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레이블을 부착 했다. 니볼레는 구름이란 뜻으로 이 와인의 특징인 가벼운 기포와 발랄하고 달콤한 미감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연상케 한다. 또한 현재 오너인 알베르또 끼아를로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첫 아이의 이름을 니볼라 비앙카라고 지었다.(사진 왼쪽) 포근한 구름을 머금고 있는 하늘을 고스란히 레이블에 담았다. 태양이 구름 사이로 숨은 몽환적인 풍경을 따뜻하고 잔잔한 오렌지와 옐로우 컬러로 표현했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파코라반 에디션 MARQUES DE CACERES Paco Rabanne edition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크리안자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는 스페인의 열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스페인 대표 와인이다. 그 품격은 레이블의 디자인과 고풍스러운 가문의 문장에서도 보여진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는 세계적인 권위의 와인 매거진 <와인 & 스피리츠>가 조사한 미국 레스토랑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스페인 와인이다. 지난 6년 동안 다섯 차례나 1등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이번 40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선보이는 파코라반 리미티드 에디션 때문이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 파코라반 에디션
세계적인 디자이너 파코라반이 직접 디자인해 헌정한 레이블로 현재 국내에선 출시 전인데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의 현 오너인 크리스틴 포르네르와 파코라반의 두터운 우정으로 탄생한 이 제품은 레이블에서도 보여주듯이 그들의 전통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은 채 시대를 앞서가는 세련된 감성을 나타낸다.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레드 컬러가 조화를 이루며 임팩트 있는 디자인에는 마르께스 데 까세레스의 심볼 문장이 새로운 레이블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살짝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것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진취적이며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역대 제품 빈티지 중 최고로 평가되는 2005년 빈티지에 생산된 리제르바(Reserva) 제품인 만큼 한층 더 강화된 느낌의 엘레강스함과 구조감이 특징이다. 이 제품은 국내에서는 오는 10월 출시될 예정으로 벌써부터 많은 기대를 얻고 있다.
알따이르의 알따이르 Altair Altair
알따이르
알따이르란 칠레 선두 와이너리인 산 페드로(San Pedro)와 생떼밀리옹 그랑크뤼 샤또인 다쏘(Dassault)가 조인트 벤처로 설립한 와이너리다. 그랑 크뤼의 철학과 천혜의 칠레 떼루아가 결합해 탄생했다. 최상위 6%의 소비자만을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울트라 프리미엄 와인이다. 알따이르란 독수리자리에 있는 가장 맑고 밝은 흰빛을 발산하는 별(견우성)의 이름으로 이 모양을 형상화해 레이블에 옮겨 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칠레의 국민적인 화가인 곤잘로 디아즈와 제자인 새미 벤메이어에 의해 레이블은 예술로 승화되었다. 이 예술가들은 알타이르의 레이블에서 별과 우주 그리고 인간을 이야기하면서 ‘안데스 하늘에 있는 맑고 깨끗한 별’을 담아냈다.
인간과 우주, 신비, 변화, 동물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을 표현하는 그는 가끔 회화 자체로 작품을 표현하는 것과 예술가의 주관성을 이야기한다. 풍자적으로 느끼게 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실적인 표현방법에 의지함으로써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재미를 주고 있다.
최고의 까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까르미네르를 블랜딩해 만든 보르도 스타일의 블랜딩 와인인 알따이르는 나무 한 그루당 1kg 미만으로 소출해 한 그루에서 1병만을 생산하는 장기숙성용 와인이다. 이것은 알마비바나 몬테스 알파 엠등과 견줄 떠오르는 칠레의 다크호스다.
포도원은 안데스 산맥의 영향을 많이 받아 낮과 밤의 일교차 (±화씨 68도)가 커 다양하고 풍부한 아로마를 품은 우수한 포도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보통 와인은 ‘즐긴다’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마시는 것을 떠나 오감을 모두 충족시켜 그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신의 선물같은 것이다. 눈으로 마신다는 말은 레이블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한 와인 정보를 위한 레이블이 아니라 앞서나가는 디자인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말이다.
와인이 말을 건네다 김종혁 감독과 티에라스 모라다스(Tierras Moradas)
2011년 3월9일. 꽃샘추위 끝자락의 차가운 바람이 휘감고 있던 올림픽공원 내 펜싱경기장서 카를로스 산타나(Carlos Santana) 밴드의 공연이 있었다. 라틴 록의 대표주자답게 공연이 시작되자 추위에 움추려 있던 4500여 관객들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채 2~3분도 걸리지 않았다. 라틴의 힘이다. 드럼과 퍼커션으로부터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격렬한 비트, 브라스 연주자들의 거침없는 멜로디, 그리고 보컬과 건반을 하나로 엮어내는 산타나의 카리스마 넘치는 기타연주는 관객들의 몸과 마음을 열정적인 리듬에 올라타게 만들었다. 이성을 내리누르고 감정에 따르라 한다. 솔직하게! 그 순간 와인 한 잔이 간절했다. 가슴 속 깊숙이 억눌려 있던 열정을 터트려줄 라틴 음악과 같은 와인 한 잔이….
고백 하나 하겠다. 나는 10여 년 전 몰리나로 와인을 시작했다. 제대로 폼 잡고 와인세계에 입문하지는 못했다는 이야기다. 몰리나로 시작해 한동안 남미 쪽의 와인들을 적당히 골라 마셨고, 그 와인들은 또 언제나 적당한 만족감을 주었다. 마치 라틴 음악의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느낌처럼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즐기면 돼!”라고 말하듯.
슬며시 와인셀러의 문을 열어본다. 한눈에 훑어봐도 프랑스 쪽 와인이 대세다. 와인을 마셔온 세월도 제법 지났으니 어쩌면 당연해 보일지도 모른다. 한 켠에 보라색 레이블의 와인병이 보인다. 산 페드로(San Pedro)의 티에라스 모라다스(Tierras Moradas)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제3세계 와인 가운데 하나다.
이참에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게 와인은 뭐지?” 한때 “와인은 재즈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테루아르, 빈티지, 생산자에 따른 차이뿐 아니라 심지어 누구와 어디서, 어떤 병을 여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술들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차이들을 찾아내고 음미하는 재미는 정말 재즈와 닮아있다. 하지만 똑같은 질문을 지금 다시 묻는다면 “내게 와인은 그저 술일뿐이다.” 왜냐고? 중심을 ‘와인’에서 ‘나’로 옮기니 그렇게 바뀌었을 뿐이다. 와인은 ‘재즈’이기도 하지만 ‘오래된 우정’을 지켜주는 ‘부적’일 수도 있고 ‘실연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친구’이기도 하며 ‘달빛 속삭임’을 사랑으로 이어주는 ‘요정’일 수도 있으니까…. ‘나’에게는.
티에라스 모라다스(Tierras Moradas)는 자기가 자란 토양 색깔을 이름으로, 레이블로 달고 나온 아주 직설적(?)인 와인이다. 그리고 2007년은 이 와인의 첫 빈티지다. 칠레 마올레벨리의 보라색 토양에서 재배된 카르미네르(96%), 쁘띠 베르도(4%)로 만들어진 이 와인은 태생적으로 라틴리듬을 담고 있다. '신의 물방울'의 시즈쿠라면 타악기의 리듬에서 전해져오는 두근거림, 건반이 빚어내는 라틴 록 특유의 그루브함, 관악기의 화려함 그리고 이 모두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타선율까지…. 티에라스 모라다스를 통해 떠올릴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