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해줘.”
영화의 첫 대사가 심상치 않다. 여주인공이 감정 없는 하룻밤 섹스를 끝내고 익명성을 요구하는 원나잇의 룰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모텔을 나선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여성 19금 놀이터 핑크영화제 관계자들로부터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핑크성클리닉’이란 대담을 맡아달라는 섭외와 함께 올해 상영되는 핑크영화 중 한 편의 코멘트 요청을 받게 되어 나름 심사숙고 끝에 고른 말랑말랑한 소프트 핑크영화 'OL 러브채팅'의 도입부다.
먼저 핑크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필자의 무식함을 고백해야겠다. 핑크영화가 ‘일본의 소프트 포르노물’이라고 여기던 나로서는 처음에는 별난 여자들의 별난 이벤트로 알고 있던 핑크영화제 담당자의 대담 제의를 받아들여 과연 내게 득이 될 것이 있겠나 하는 고민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으로 홍보물을 챙겨들고 나타난, 일본에서 수년간 영화공부를 하던 중 핑크영화를 발견하고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장르의 영화가 없을까라는 생각에 핑크영화를 소개하는 작업을 시작해 올해로 4년째라는 이 매력적인 여성의 놀라운 태도에 마음을 급수정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기회에 핑크영화가 어떤 것인지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욕심과 그런 영화를 챙겨보는, 섹스가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이들은 평소에 뭘 궁금해 하는 걸까 하는 개인적 궁금증이 오히려 더해져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다. ‘핑크브런치; 여성 성 클리닉’이란 부대행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트윗온에 동영상까지 떠있다.
50년 전통의 일본식 에로영화
핑크영화는 50년 전통을 지닌 일본식 에로영화를 지칭한다. 촬영기간 3~5일에 제작비 300만 엔, 상영시간 60분에 5회 가량의 섹스신 등장이라는 룰만 지키면 감독에게 모든 걸 맡기는 좀 별스런 제작 방식으로 유명하다. 자율성을 강조하는 핑크영화의 토양은 예기치 않게 일본 영화의 거목들을 키웠다. 일본 영화는 불황기에 저예산 에로영화를 찍으면서도 예술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다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섹스신이 들어가는 야한 영화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꽤 깊은 성찰이 엿보인다.
필자가 'OL 러브채팅'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다양한 고민과 애정과 섹스를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영화에서는 요코, 가오리, 요코와 가오리의 어머니 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입장,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각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나 대체물을 통한 교류로 각자가 바라는 바를 고민하고 접근해가는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요코는 네온테트라. 엔젤피시 등 물고기의 이름을 딴 닉네임을 사용하며 인터넷 채팅을 통해 끊임없이 하룻밤 섹스 상대를 구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섹스를 나눈다. 어머니를 외롭게 방치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알코올중독을 선택한 어머니에 대한 미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가족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그 지독한 고독감은 하룻밤의 육체적 쾌락으로 달랜다.
요코의 섹스를 보고 있자면, 하지 않으면 지구상에 자기 홀로 남아 그대로 죽을 것 같은 고독 때문에 살기 위해 하는 섹스 같이 보여 힘겹다. 마주보며 하는 섹스에서 켄트의 등을 두드리는 그녀로 보아서 후배위는 결코 그녀가 좋아하는 섹스가 아니다. 마치 섹스중독자의 그것처럼 후회하고 자신의 섹스를 나쁘다고 여길만한, 교류하지 않는 섹스를 습관처럼 반복하며 스스로를 학대한다.
직장동료와의 뒤로 하는 섹스에서 ‘너무 싫어’ 하면서도 ‘그럼 왜 왔냐’는 말에 ‘시간을 때우러’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시간을 때우는 섹스다. 어머니의 가출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신을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케이크를 들고 나타난 아버지의 새삼스러운 친한 척이 싫고, 그 자리를 피한 육신은 또 갈 곳이 없다. 후회스럽더라도 그러리라 알더라도, 또 육신의 부대낌에 몸을 맡긴다.
오래 사귄 커플들의 갈등의 섹스
요코의 동생 가오리는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일이 궤도에 오르지만 이를 질투하는 남편의 시선을 느낀다. 일하는 유부녀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일도 성공하고 가정생활도 성공하고 싶다는 것이다.
가오리의 섹스는 결혼한 커플이나 오래된 커플들이 흔히 겪는 갈등의 섹스를 보여준다. 아무리 물고 빨고 애써도 아내의 승승장구가 내키지 않는 남편의 자격지심은 부실한 페니스가 그대로 반영한다. 유부녀들은 이번 달 가계부가 적자라든가, 저 인간이 내 어머니한테 무심하게 굴었다거나 지난번 관계에서 내가 하자 했건만 파트너가 거부해서 꽁한 마음이 덜 풀어졌다거나 동창회에서 잘나가는 친구 부부를 보고 상대적으로 남편이 찌질해 보일 때 섹스가 김빠진 맥주 같아지고 상대도 그것을 민감하게 느낀다.
만족하지 못한 섹스라도 만족한 척 하면서 고민하지만 그래도 남편과의 섹스를 지속적으로 영위하고 싶다. 부모님 같이 살지 않겠노라고 사표를 내고 농사를 짓겠다는 남편을 따라나서겠다고 언니에게 공언하고 남편과 길을 나서지만 중간에 차에서 내리는 가오리.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남편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인지? 단시 결혼에 실패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인지?
젊은 날 일 중독증이었던 남편에 대한 애정 결핍으로 알코올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어머니. 이제는 당뇨라는 병을 달고 가정으로 돌아온 늙고 초라한 남편에게 분노와 회환이 겹친다. 젖은 낙엽이라고 했던가? 그토록 필요했던 젊은 날에 남편의 직무를 유기하고 퇴직 후 병든 몸으로 아내 옆에 달라붙는, 이제는 아내 없이는 지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늙은 남자.
남편의 자리는 이미 알코올이 대신하고 있고 남편은 귀찮고 성가시기만 하다. 가출을 감행하여 갈등의 최고조를 보여주었던 어머니가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던 중 부상하여 연락이 된 병원에 모인 아버지와 요코의 모습에서 마치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새롭게 시작하는 섹스에서 어머니가 하는 말. “가능할까?” 오랜 시간 내버려두었던 질(vagina)의 쓸쓸한 독백은 또 다른 문제들이 산재해 있음을 의미한다.
야한데 야하지 않은…
요코는 뒤로 섹스하고 자신을 던져놓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서로 마주보며 하는 섹스를 나누고 자신의 음부를 예뻐하는 켄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가오리는 실패하지 않은 결혼을 가장하기 위해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정직한 선택을 한다. 요코와 가오리의 어머니는 뒤늦게 자신에게 돌아온 아버지가 성가시고, 갈등한다. 아버지와의 섹스가 많이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그래도 마치 처음처럼 다시 시도한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에로틱한 섹스가 아니다. 섹스가 인간의 고독감을 어루만지고 포옹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란 게 실감나게 해준다. 이 영화의 섹스를 보고 있으면 성욕을 자극하는 상업적 의도가 전혀 없다. 최근 트렌드인 에로틱 한국 사극영화에 등장하는 성기 무노출의 정사신보다도 더 섹시하지 않다. 성행위에 대해 과감한 표현을 하지만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라는 점에서 핑크영화는 포르노영화, 에로영화와 구분된다. 야한데 야하지 않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