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면 춥고 날이 개면 덥고, 천지개벽도 아니고 무슨 조화야. 안 그래요?”
약속 장소에 들어서며 툴툴대는 품이 딱 양 부장이다.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매일 한 시간 일찍 출근하는 게 나름의 면죄부이자 자랑거리인 그가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되뇌는 슬로건은 ‘내추럴 본 월급쟁이’. 태어날 때 부터 월급쟁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데, 하루의 일상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된다는 그의 설명을 듣노라면 쓴웃음 한 번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서인지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혹은 술 한잔 마시고 땡, 이 뻔한 스케줄에 동참하지 않는 부하직원도 땡이다. 그리하여 부서원 대부분이 강제적 아침형 인간이 됐다.
“MB 때 아침형 인간이 좋다고 그렇게 떠들더니, 정권 바뀌자마자 아침형보단 올빼미형이 좋다나 뭐라나. 난 이미 아침형 인간이 됐는데 어쩌라고. 그때 바뀐 생활패턴이 지금까지 그대로예요. 올빼미형이 크리에이티브 하다나? 또 바뀌었으니 이번엔 어떤 인간형이 튀어 나올는지 원.”
어제 저녁 마무리를 술 한잔으로 땡 친 덕에 가까스로 일어났다는 양 부장, 그럼에도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며 무용담을 이어갔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아침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속이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왠지 다른 걸 먹고 싶더라고. 매일 똑같은 우유에 시리얼을 먹고 나오는데, 어제도 그제도 내일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답답한 거야. 생전 쌩쌩하던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내뱉듯 쏟아낸 양 부장의 사연을 요약하면 일상의 시작과 끝이 똑같은 테두리 안에서 반복된다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나 뭐라나. 그러더니 생전 안 하던 시적인 푸념을 랩처럼 읊어댔다.
“스마트한 일상을 산답시고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그 네모난 상자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월급쟁이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살았어요. 생각해 보니 여름휴가도 안 갔지 뭐야. 그래서 오랜만에 호텔 예약했어요. 애들 데리고 호캉스로 힐링 좀 해보려고….”
양 부장의 푸념이 머리에 맴돌았을까. 걷기 위해 찾은 길 입구에 ‘사유원’이란 간판이 선명하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에서 이름을 땄다는 이곳은 대구 군위군의 팔공산 지맥 약 70만㎡에 조성된 수목원이자 사색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 세계적인 건축가와 조경가, 예술가들이 참여한 건물과 숲이 자리했다. TC태창(태창철강그룹)을 이끌던 유재성 전 회장이 평생 아꼈다는 바위와 소사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모과나무도 곳곳에 자리했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이름하여 무념 산책이다. 사심 없이 잠시 자신을 잊고 두루 살피다 보면 바람을 품은 산세와 거친 콘크리트가 눈에 들어온다. 카와기시 마츠노부, 승효상, 알바로 시자, 웨이량…. 세계적인 건축가와 조경가, 예술가의 작품이 그득한 산책길에는 얼마나 살았는지 가늠하기 힘든 나무들이 아름다운 풍광에 방점을 찍는다. 물론 이 길의 주인공은 내로라는 유명인의 작품이 아니라 그저 걷는 이들이다. 그들을 위해 꽃이 피고 나무는 그늘을 만든다. 바람이 오가며 스치는 소리도 휴식과 명상을 위한 장치가 된다. 2021년 일반인에게 공개된 사유원은 비싼 관람료(평일 5만원, 주말·공휴일 6만 9000원)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모았다. 산을 채운 건축과 정원의 조화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너무 넓어 어디부터 들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도 있는데, 어떤 코스로 산책에 나서건 ‘풍설기천년’은 꼭 들러야 한다.
수백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108그루의 모과나무가 연출한 이 정원은 카메라에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200년의 세월을 자랑하는 배롱나무들이 하늘로 향한 ‘별유동천’, 느티나무숲 ‘한유시경’, 솔향기 그득한한국정원 ‘유원’도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도 산책의 포인트 중 하나. 알바로 시자의 ‘소요헌’과 ‘소대’ ‘내심낙원’, 사유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승효상의 ‘명정’, 가장 먼저 지어진 ‘현암’까지 눈에 담고 체험할 수 있는 곳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3면이 통창으로 마무리 돼 숲과 하늘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현암에선 티하우스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사담’에선 런치와 디너 패키지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선택에 따라 1시간에서 5시간까지 걷고 또 힐링한다. 호캉스 부럽지 않은 일정이다.
목련길-1시간 정도 소요된다. 치허문에서 출발해 비나리길을 따라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인 소요헌과 소대를 관람할 수 있다. 울창한 리기다 소나무숲을 지나 한참을 걷다 보면 시자가 좋아한다는 목련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높이가 20.5m나 되는 소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백일홍길-2시간 코스다. 100일 동안 꽃이 핀다는 백일홍은 배롱나무가 원래 이름이다. 별유동천에서 신선처럼 자리잡은 백일홍 고목들을 만날 수 있다. 풍설기천년을 바라보며 잠시 땀을 식힌 후 승효상이 설계한 현암에 오르면 소나무 숲이 펼치는 숲의 파도가 객을 맞는다.
모과길-3시간 코스로 한유시경과 전통 정원인 유원을 따라 보현산의 맑은 기운을 받은 내심낙원에 이르는 길이다.
고송길-소나무의 솔향을 느낄 수 있는 4시간 코스 길이다. 오당과 와사를 들를 수 있다.
[안재형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0호 (2025년 9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