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대신 노트북PC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카드 결제 사인도 손가락으로 대충 사인패드 위에 휘갈기는 시대. 글 대신 말로 구동하고 구현하는 AI 시대에 과연 클래식의 상징 중 하나인 만년필이 설 자리가 있을까. 결과부터 공개하면, ‘있다.’ 그것도 무려 100년간 전 세계 명사들의 사랑을 받은 브랜드가 존재한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Meisterstuck)’이 주인공이다.
자, 기억을 더듬어 보자. 1963년 독일과 프랑스의 우호 조약이 맺어질 때 당시 이 기념비적인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독일을 찾았다.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와 퀼른을 찾은 케네디 대통령은 아네나워 총리가 방명록 서명을 위해 펜을 찾자 슬며시 만년필 한 자루를 건넨다. 1990년 10월 3일, 당시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동독의 로타어 데 메지에르 총리가 통일 조약 서명에 나선다. 두 총리의 손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졌고, 서명하는 장면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들의 손엔 같은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때, 당시 임창열 재정경제원 장관도 이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있었다.(뭐 좋은 일에 사인하냐며 무수한 질타가 이어졌지만….) 이 모든 순간의 공통점도 몽블랑 마이스터스튁이다. 위에 나열된 인물들 외에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스페인의 소피아 여왕,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몽블랑 만년필의 애호가로 알려졌다. 국내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일화가 독보적이다. 이 회장은 한꺼번에 수 십 개의 몽블랑 만년필을 구입해 하나하나 공들여 써보곤 했다고 전해진다. 소설가 이문열도 서명할 때면 이 만년필을 사용한다고 알려졌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일상의 주요한 순간마다 손에 몽블랑 마이스터스튁을 쥐는 걸까.
우선 몽블랑의 탄생기부터 살펴보자.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상인 알프레드 네헤미아스와 베를린 출신의 엔지니어 아우구스트 에버스타인은 1906년 한동안 미국에 체류하며 여러 선진 기술을 목격한다. 아직은 개발 단계였던 새로운 만년필 기술도 그중 하나였다. 유럽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문구 도매상이었던 클라우스 요하네스 포스와 함께 ‘심플로 세이프티 펜 컴퍼니’란 회사를 설립하고 잉크가 새지 않는 만년필(세이프티 펜)을 생산하기로 한다. 일체형 잉크 용기를 장착한 새로운 개념의 만년필이었다. 1909년 클라우스 포스와 빌헬름 잠보어, 크리스티안 라우센이 이 회사의 경영권을 인수했고, 3년 여의 개발 끝에 ‘루즈 앤 느와’를 선보인다. 첫 번째 세이프티 펜이었다.
1910년 심플로 세이프티 펜 컴퍼니는 사명을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으로 바꾼다. 이후 1913년 몽블랑의 눈 덮인 여섯 봉우리를 상징하는 하얀 별 모양(화이트 스타)의 엠블럼이 완성됐고 이때부터 생산되는 모든 필기구에 장식된다. 1920년대 들어서며 몽블랑은 독일에서 유럽으로 영향력을 넓혀 나간다. 여기엔 바우하우스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광고 캠페인이 한몫 단단히 했는데, 자동차에 대형 만년필 모형과 엠블럼을 부착하거나 항공기에 몽블랑 이름을 커다랗게 넣은 새로운 형식의 광고가 주목받았다. 몽블랑의 아이콘인 마이스터스튁은 1924년 첫선을 보인다. 그러니까 올해 100주년이 됐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탄생 설화에 따르면 일부 고객들이 매일 사용하는 용도가 아닌 특별한 필기구를 요청했고, 때마침 수년간 사보아 페어(Savoir-Faire·고유한 기술)를 연마해 온 장인들에게 제작 중인 필기구가 있어 출시하게 됐다는 것.
독일어로 ‘명작’ ‘걸작’을 의미하는 마이스터스튁이 제품명이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출시 당시 이 만년필은 전 세계 60여개국에서 판매됐다. 마이스터스튁의 펜촉에 각인된 4810이란 숫자는 몽블랑의 해발고도를 의미한다. 1929년부터 장식되며 몽블랑의 새로운 상징이 됐다. 1926년부터 필기구에서 가죽 소재의 아이템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한 몽블랑은 현재 손목시계, 스마트워치, 헤드폰까지 영역을 넓혔다. 가죽 제품과 시계 등 필기구 외 제품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이미 필기구를 훌쩍 뛰어넘은 상황. 명품업계의 한 관계자들은 “브랜드의 시작이자 상징이 된 만년필을 고급화시키며 한정판 등 특별한 마케팅을 도입해 최고의 명맥을 잇고 있다”며 “대중적인 아이템이 아닌, 희귀 아이템으로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만년필 관련 국내 커뮤니티에서 거론되는 브랜드 중 절반 이상은 몽블랑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가장 인기가 높은 제품은 마이스터스튁 라인이다.
마이스터스튁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가운데가 불룩한 ‘시가’ 모양과 캡 윗부분의 몽블랑 엠블럼이 시선을 끈다. 로듐 코팅 인레이를 활용한 세련된 투톤 디자인의 골드 소재 닙에 각인된 ‘4810’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라우센, 포스, 잠보어 등 초창기 몽블랑 설립에 기여한 세 인물을 상징하는 캡 부분의 골드링으로 마무리된다. 세 개의 골드링이 있는 첫 제품은 1937년에 출시됐다.
몽블랑은 올해 마이스터스튁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마이스터스튁 오리진 컬렉션’을 선보였다. ‘프레셔스 레진 149’ ‘프레셔스 레진 르그랑’ ‘프레셔스 레진 클래식’ ‘두에르그랑’ ‘두에 클래식’ ‘솔리테어 르그랑’ 등 오리진 컬렉션은 오리지널 콘셉트를 재해석하고 강조한 새로운 마이스터스튁 라인업이다. 몽블랑의 필기 문화 디렉터인 알레산드라 엘리아는 “디지털 시대의 정점에서도 마이스터스튁은 계속해서 문화와 창의력, 연결성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라며 “이번 컬렉션을 통해 몽블랑은 마이스터스튁을 규정하는 특징이 된 디자인 속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하거나 재발견하는 여정에 몽블랑 필기 문화 애호가를 초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선 각 에디션은 숫자 ‘100’과 연도 ‘1924’ ‘2024’를 표시한 특별한 디자인 닙으로 장식됐다. 또 특별히 디자인된 캡링도 두 가지 중요한 연도로 장식된다. 처음엔 마이스터스튁이라는 이름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독일어로만 유지하게 됐다. 이처럼 제품명의 중요성을 인정해 독일어로 새겨진 오리지널 로고가 모든 에디션의 캡 옆부분에 새겨진다. 모든 엠블럼은 각각의 에디션 컬러로 둘러싸여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 ‘예거 르쿨트르’ ‘IWC’ ‘까르띠에’ ‘반클리프앤아펠’ ‘끌로에’ ‘몽블랑’ 등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리치몬트그룹의 지난해 국내 매출이 1조 5000억원을 넘어섰다. 최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개된 리치몬트코리아의 지난해 회계연도(2023년 4월 1일~2024년 3월 31일) 매출액은 1조 5014억원. 전년 동기 대비 약 7.4% 증가한 수치로 사상 최대 금액이다. 이로써 리치몬트코리아는 2년 연속(2022년, 2023년 회계연도) 국내시장에서 1조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반면 호실적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기부금은 5억 7000만원에 불과했다. 전년 대비 2배가 넘는 금액이라지만 매출액의 0.04%에 불과해 형식적인 수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몽블랑은 1997년에 리치몬트그룹에 인수합병됐다. 한국 법인인 몽블랑코리아는 리치몬트인터내셔널홀딩스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9호 (2024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