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발발 이후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기업의 열망이 국제적 인수합병(M&A) 시장의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 자국을 넘어 해외에서 인수 대상을 찾는 기업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한국,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과 데카콘(10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이 쏟아지는 아시아는 크로스보더 M&A(국경을 넘어선 M&A)의 중심에 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법인 어네스트앤드영(EY)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지역 크로스보더 M&A 규모는 2020년 1630억달러(약 200조원)에서 2021년 3450억달러(약 423조원)로 1년 만에 2배 넘게 증가했다.
특히 한국은 아시아 지역 크로스보더 거래 성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매일경제 자본시장 전문 뉴스 서비스 레이더엠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이 주요 참여자로 진행한 M&A 딜에서 금액 기준으로 상위 10개 중 8개가 크로스보더 거래다. 라이나생명이 글로벌 보험 그룹 처브그룹에 5조원에 매각된 딜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이마트가 미국 이베이 본사에서 이베이코리아를 3조4400억원에 인수하고, 넷마블이 홍콩 소셜 카지노 업체 스픽엑스 지주사 리어나도인터랙티브를 2조5130억원에 사는 등 조 단위 국경 간 거래가 줄을 이었다.
이에 성공적인 크로스보더 딜을 위한 법률 자문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추세다. 해외 기업에서 투자를 유치하거나, 반대로 해외 기업에 투자할 때, 법률적 문제없이 효과적인 거래를 진행하고 싶은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국내 대기업들은 종종 양국의 기업 관련 법체계 차이에서 난관을 겪곤 한다.
최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만난 존 박 모건루이스(Morgan Lewis) 파트너 변호사(53)는 “미국 기업에 투자하겠다는 의욕만 가지고 접근했다가 막상 양국 법체계 차이에 당황하는 한국 기업들이 있다”며 “두 나라의 법 차이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면, 각종 투자 관련 과정을 보다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판례 중심의 미국법, 투자도 ‘솔루션 중심’으로 만들어
모건루이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세계적 로펌이다. 변호사를 중심으로 법률 전문가 2000여 명을 두고 있다. 박 변호사는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스타트업 등 고성장 기업이 자금을 유치할 때 법률 컨설팅을 제공한다. 20명의 팀원을 이끌며 1년에 30~50개의 거래를 지원하고 있다. “제가 자문에 응하는 범위는 초기 시드 투자부터 벤처캐피털(VC)의 가장 마지막 투자 단계, M&A 거래와 기업공개(IPO)를 아우릅니다. 투자자와 기업 양측 모두를 지원해요. 저는 특히 전략적 투자자(SI)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회사의 입장에서 재무적 조건 외에도 지배구조와 기업 통제 문제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에요. 대기업이 스타트업과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때, 기술적 측면을 검토하는 것도 임무에 포함됩니다.”
박 변호사는 한국계라는 장점을 살려 한미 양국을 넘나드는 여러 거래에 자문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는 성문법 체계인 한국에서보다 판례법 중심인 미국에서 협상의 폭이 넓을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거래는 판례와 법령을 기초로 하는 델라웨어주 법을 따릅니다. 반면, 한국 기업법은 보다 법령 중심이고 엄격하죠. 델라웨어주 법은 유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넓은 범위의 시나리오를 두고 법원의 지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투자 협상은 해결책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문제 해결책과 비즈니스 및 법적 고려 사항이 필요합니다.”
그가 법률 자문에 응한 한국 기업은 투자사부터 대기업까지 다양하다. LG그룹은 여러 계열사가 그를 통해 글로벌 투자를 진행했다. “해외 벤처 투자 전문 기업 LG테크놀로지벤처스가 딥러닝 보안 솔루션 업체인 딥인스팅트의 4300만달러(약 530억원) 규모 시리즈C 투자에 참여할 때, 전 LG 측을 대표했습니다. 제가 거래에 상당한 기여를 한 대규모 투자 중 하나였습니다. 딥인스팅트는 이스라엘에 기반을 두고 있어 한국, 미국, 이스라엘을 넘나들며 투자 규제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 밖에 LG전자가 미국 모바일 세탁 플랫폼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를 하는 등 국내 대기업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나갈 때, 그는 복잡하게 얽힌 법률 이슈를 푸는 해결사로 나섰다.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에요. 고객은 본인들의 요구에 시기적절한 응답을 기대하니까요. 특히 신속한 자금 조달이 필요한 스타트업의 경우 거래를 완료하는 데 기한이 촉박합니다.”
실리콘밸리의 유망 스타트업이 외부 자금 유치를 시도할 땐, 전 세계에서 투자자가 몰린다. 투자 기회를 받는 것 자체가 치열한 경쟁인 것이다.
근래 들어 한국 투자자가 타국 후보를 제치고 참여하는 투자 라운드가 많아지는 이유도 있을까. 하나는 한국의 발달한 정보기술(IT) 체계다. 한국 투자자들은 IT를 활용해 각종 투자 라운드에 신속하게 참여하기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혁신 기업이 탄생하고 있는 한국에서 투자를 이끌어내면, 향후 한국 내 다른 스타트업 및 대기업과 협업을 도모하기 유리하다는 부분도 있다. “한국 투자자는 다른 국제 투자자에 비해 우위가 있습니다. 일단 한국 자체가 혁신의 중심이고요. 모바일, 소셜미디어, 전자상거래의 선두주자이기 때문이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가치 평가가 매우 건전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해당 회사들에 대한 한국 기업의 투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인해 투자 증가 속도가 둔화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는 직접적인 영향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대기업이 성공적인 투자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 VC 투자 모델의 도입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그는 도움말을 남겼다. 회사 내에서 투자를 담당하는 인력에게 보다 과감한 보상을 함으로써 확실한 동기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VC 펀드에 참여하는 출자자(LP)는 자신들의 자금으로 투자를 집행한 VC에 투자 이익의 20% 상당을 ‘캐리(Carried-Interest)’라는 형태로 나누는데, 기업 내 투자 부서에도 이러한 방식의 보상을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기업이 VC 투자 모델을 따르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투자 이익에 대해 ‘캐리’를 제공함으로써 최상위급 VC에서 투자 관리자를 영입하기도 하죠. VC 사업 모델은 광범위한 투자를 진행한 뒤, 그중 2~3개 투자에서 10배 이상의 수익이 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투자 대상이 되는 스타트업의 강점과 약점을 이해하고 선별하는 것은 높은 수준의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이죠."
▶“게임·전자상거래 등 한국 스타트업 미국 자본의 러브콜 늘어날 것”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일도 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 유치를 지원하기 위해 2013년부터 국외 벤처캐피털이 운용하는 글로벌 펀드를 조성해왔는데, 여기에 미국 자본이 참여하는 비중이 높다. 지난해 말 기준 총 4조8559억원 규모의 39개 글로벌 펀드가 운용 중인데, 이 중 미국 VC가 24개에 달한다. 박 변호사는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자본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는 경우가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 기업과 VC는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게임, 전자상거래 및 소셜 미디어 분야에서 주목받는 다수의 한국 스타트업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죠.”
박 변호사는 미국에서 투자를 받고 싶은 한국 스타트업을 위한 조언도 남겼다. 그는 창업 극초기 단계에 조력해준 에인절투자자(angel investor)부터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인절투자자는 기술과 아이디어는 있지만 자금력이 없는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경영 컨설팅도 제공하는 투자자를 일컫는다. “스타트업은 먼저 에인절투자 라운드를 완료하기 위해 자신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몇몇의 주요 투자자에 집중해야 합니다. 에인절투자자는 스타트업이 더 큰 VC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양자컴퓨터·AI·핀테크, 실리콘밸리서 가장 뜨거운 분야
근래 들어 실리콘밸리에서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는 분야를 묻자 그는 “양자컴퓨터, 인공지능(AI), 핀테크가 모두 뜨겁다”며 “최근 나 역시 양자컴퓨터와 AI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7억달러(약 8600억원)를 조달하는 작업에 참여했다”고 답했다.
실제 미국 듀크대 김정상 교수가 창업한 양자컴퓨터 기업 아이온큐는 삼성전자, 현대차, 구글벤처스, 아마존웹서비스(AWS)의 잇단 투자를 이끌어냈으며, 지난해 10월엔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일련의 고성장 기업에 대해선 ‘거품’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투자가 몰리는 모든 영역엔 관심의 물결에 편승했지만 실제론 경쟁력이 약한 회사가 있다”며 “해당 기업의 역량을 판단하는 방법은 그 회사가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를 관리한 경험이 풍부한지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VC들의 정보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실리콘밸리 ‘VC태스크포스’에서 ‘기업 벤처캐피털 워킹 그룹’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전 기업투자자를 위해 VC들의 최근 거래 동향과 법률 이슈를 논할 수 있는 패널 토론을 주최해요. 의장으로서 저는 LG를 포함해 제가 함께 일하는 실리콘밸리의 거의 모든 기업의 연사를 초대할 수 있습니다.”
▷He is
존 박 변호사는 미국 윌리엄스 대학을 졸업해, 하버드에서 공공정책석사(M.P.P.) 학위를 받았으며, 버지니아 대학교 법대에서 법무박사(J.D.)를 취득했다. 한국에는 1년에 두어 차례 방문해, 한국과 미국 기업 사이 거래를 지원하고 있다. 최근 코스닥 시장 상장을 앞둔 미국 기업 지원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