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선거 앞두고 ‘보수층’ 잡으려는 스가, 개헌 나서나… 평화헌법에 ‘자위대 명기’ 추진, ‘아베’의 길로
김규식 기자
입력 : 2021.05.25 16:04:58
수정 : 2021.05.25 16:05:23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한국이 크게 경계하는 헌법 개정과 독도·징용 등 외교현안과 관련해 전임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길을 따라가는 모양새를 굳혀가고 있다. 특히 무력행사와 전력보유를 포기해 ‘평화헌법’으로 불렸던 헌법에 대해 작년 9월 취임 후 개정에 적극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나 최근 자세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때 맞춰 개헌논의의 전 단계로 평가받는 ‘국민투표법 개정안’이 중의원을 통과하고 참의원 절차만 남겨뒀다. 작년 9월 스가 총리 취임 이후 처음으로 내놓은 ‘외교청서’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 징용 배상 등과 관련해 아베 정권에서의 입장들이 그대로 담겼고 위안부 판결 내용이 추가되기도 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5월 “현재 헌법은 제정된 지 70여 년이 경과해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 부족한 부분은 개정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자민당은 ‘자위대 명기’ ‘긴급사태 조항의 신설’ ‘교육 충실’ 등 4개 항목에 대해 검토의 장을 마련해 제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3월에는 “헌법 개정은 우리 당의 방침이다. 우선 첫발로서 국민투표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총리가 헌법 개정에 강한 의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취임 이후 개헌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들이 있었는데, 가을로 예상되는 중의원 선거와 자민당 총재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의 지지기반인 보수층에 어필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민당이 개헌 논의를 띄우는 배경에는 ▲코로나19 등 긴급 상황에 대한 대처 ▲대만해협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중국의 위협 강화 등이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나 대규모 재해, 테러 같은 긴급 상황에 대처하려면 개인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기존 법률로는 한계가 있으니 헌법에 긴급사태 조항을 넣어 정부 권한을 강화시키자는 게 자민당의 주장이고 야당은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고 있다.
‘헌법 9조를 개정해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안’에 찬성하는 국민이 늘었다.
개헌과 관련해 특히 한국 등의 염려를 자아내는 부문은 아베 전 총리의 숙원이었고 자민당의 방침인 ‘자위대의 명기’이다. 헌법을 개정해 ‘전쟁 가능 국가로 한발 더 다가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온다. 일본의 헌법 9조에는 ‘(1항)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는 영구히 포기한다. (2항) 전항(前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외 전력을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전범국가인 일본의 헌법을 기초하며 포함시킨 내용이며 전쟁·무력행사, 전력보유를 포기한 것으로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헌법 9조를 근거로 자위대의 존재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해왔다. 아베 전 총리는 2017년 5월 이런 비판을 빌미 삼아 ‘위헌 소지를 없애겠다’는 이유를 들며 자위대를 명기하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펼친 후 이를 임기 내내 추진했다.
일본은 2014년 이미 헌법 해석을 변경해 ‘집단권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전쟁 가능 국가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염려를 샀다. 집단권 자위권은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주변국을 비롯해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나라가 공격받으면 이에 대해 무력개입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위대를 명기하면 전쟁 가능 국가로 좀 더 접근해 갈 수 있다는 비판이 국내외에서 나왔고 입헌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도 이에 대해 반대해왔다.
일본 헌법은 중의원·참의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국회가 발의하고 국민투표에서 과반 찬성으로 개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개헌의 핵심 절차 중 하나인 국민투표와 관련한 개정안이 3년여 논의 끝에 국회의 문턱을 넘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자민당이 헌법 개정에 나설 준비도 갖춰지고 있다. 국민투표법 개정안은 역·상업시설에 공동투표소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보다 많은 사람이 쉽게 투표할 수 있게 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아베 정권이 2018년 제출했으나 야당의 반대로 처리되지 못하다가 최근 중의원을 통과했다. 3년 안에 ‘국민투표와 관련한 광고 규제’ 보완책을 마련하는 조건으로 야당인 입헌민주당 등이 통과에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6월에 참의원을 넘어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법률안은 국회 하원과 상원 격인 중의원·참의원 본회의를 각각 통과해야 발효한다.
입헌민주당은 국민투표법 개정안의 광고규제 보완책이 마련될 때까지는 개헌논의가 어렵다는 분위기지만, 자민당은 올가을로 예상되는 총선(중의원 선거) 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올 것으로 보인다. 중의원의 임기가 10월, 자민당 총재 임기가 9월이어서 가을께 중의원 해산·총선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스가 총리는 올해 가을로 예상되는 중의원 선거(총선거) 때 자민당의 공약으로 개헌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며 “골자가 되는 몇 개의 중요 정책 중에 넣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스가 정부의 보수 움직임은 외교청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외교청서는 지난 한 해의 국제정세 분석 내용과 일본 외교활동 전반을 기록한 백서이다. 일본의 외교에 대한 입장과 향후 전망을 가능케 하는 자료이다. 일본은 최근 내놓은 올해 외교청서에서도 독도·위안부·징용 등에 대해 한국의 반발을 불러온 주장을 되풀이한 가운데, 지난 1월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서울중앙지법)을 비판하는 내용을 새롭게 넣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고교 사회과 교과서에 독도가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로 표기돼 있다.
일본은 올해 외교청서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칭하며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을 계속 이어갔다. 동해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확립된 유일한 호칭이 ‘일본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은 외교청서에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국제법과 양국 간의 합의에 명백하게 반하는 것이며 매우 유감이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 정부에 대해)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강하게 요청한다’고 명기했다. 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일 간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됐다’고 기술하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의해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 해결을 확인했다’는 기존 주장을 거듭했다.
일본은 징용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 법원이 일본 기업 자산의 압류와 현금화를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고 현금화에 이르면 한일관계가 매우 심각한 상황을 맞기 때문에 이를 피해야 한다’며 한국이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올해 외교청서는 일본 정부가 한미 양국 등 국제사회와 협력해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는 내용을 기술했다.
한국 외교부는 일본의 독도·위안부 주장 등에 대해 강력 항의했다.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해 또다시 부질없는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1993년 고노 담화 및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에서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 통감과 사죄·반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올해 일본의 외교청서는 중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등 중국 견제 표현을 강화한 것이 눈에 띄었다. 중국의 군사력 확충과 동·남중국해 해양 활동을 ‘일본을 포함한 지역과 국제사회 안보상의 강한 우려 요인’으로 규정했다. 작년 판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홍콩과 신장웨이우얼(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인권 상황에 ‘우려’ 입장을 밝히는 등 설명을 늘렸다. 하지만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담긴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에 대해선 외교청서에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