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EAN-Indepth] 경기 불황 속 민생 외면하는 왕실에 분노… 돌파구로 탁신 전 총리 거론, 90년 만에 재현된 시민 봉기… 흔들리는 泰 왕실
문수인 기자
입력 : 2020.10.27 15:47:07
수정 : 2020.10.27 15:47:28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2020년 반정부시위’ 양상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시위대와 이를 막는 당국 간의 직접적 충돌 양상이 빈번해지면서 유혈 사태에 대한 우려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위는 ‘총리 퇴진’ ‘왕실 개혁’ 등 과격한 구호에 비해 비교적 평화적으로 진행돼 왔지만 이달 들어 상황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단초는 왕실 개혁을 향한 시위대의 행보가 노골적으로 전개되면서 부터다.
사건은 지난 10월 14일 발생했다. 이날 수티다 왕비의 차량이 방콕 시내 사원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반정부 집회 장소 인근인 핏사눌록 거리를 이동 중이었는데, 시위대 일부가 왕비의 차량에 대고 ‘세 손가락 경례’를 했다. 세 손가락 경례는 이번 반정부시위대의 시그니처 인사로 독재에 반대하는 뜻이다. 특히 이 같은 행동이 왕실 인사의 지근거리에서 직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태국 사회에 던진 충격파는 컸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위대의 왕실에 대한 분노 게이지가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시위대의 항의 방식은 결국 왕실과 정부의 ‘인내 임계점’을 넘어서게 했다.
정부는 당장 다음날인 15일 5인 이상의 집회를 금지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시위 때마다 1만여 명 이상이 몰렸던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시위 자체를 원천 봉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온라인 통제 등 시위대의 소통 수단에도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 같은 정부의 통제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말인 16~17일 “독재타도”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이어나갔다. 경찰이 애초 알려진 시위 장소를 폐쇄하자 이동을 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봉쇄에도 주말 시위에는 수천 명씩 가담했다.
인내심을 거둔 당국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모인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은 물대포를 쏘는 등 강경대응에 나섰다. 2020년 반정부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보인 첫 물리적 행동이었다. 물에 맞은 시위대가 눈 주위에 따가움을 호소해 화학물질이 들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반정부시위대가 독재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반정부시위대는 누구
왕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등 태국의 2020년 반정부시위가 과거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 것은 시위 주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이번 태국 사태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시위대라는 것이다. 시위대의 핵심은 10대를 포함한 20~30대의 젊은 층들인데, 이들은 2014년 태국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와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2014년 태국 반정부시위가 정권을 두고 벌이는 정치 게임 성격이 짙었던 것을 감안하면 레드셔츠와 옐로셔츠는 일종의 정치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위의 주축인 학생들은 민주화 등 태국의 근본적 변화를 바라는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시위를 이끌고 있는 학생을 ‘학생’ 그 자체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번 시위의 성격을 반만 이해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정부시위대가 자신들을 ‘라싸던’이라고 부르는 데서 엿볼 수 있다. 라싸던을 우리말로 하면 민중·시민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현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 혹은 시민 봉기로 현 시위대는 자신들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태국 반정부시위대는 한국어로 만든 호소문에도 “태국 시민은 더 견제 없이 고삐 풀린 잔혹한 독재를 견디지 않을 것”이라고 적으며 학생이 아닌 시민들이 군부독재 정권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 라싸던의 개념은 태국 정치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1932년 절대군주제였던 태국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꾼 주역들이 바로 ‘라싸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도 학생들이 주축이었지만 ‘라싸던’의 힘이 보태져 국가 체제를 바꾼 원동력이 됐다.
때문에 이번 학생이 주축이 된 반정부시위대가 자신들을 라싸던으로 부르는 것은 1932년과 같은 태국의 근본적 변화를 반드시 이끌어 내겠다는 뜻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금기시되던 왕실 개혁을 요구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김홍구 부산외대 총장은 “약 90년 만에 라싸던이 다시 태국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흐름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어쩌다 왕실이 개혁대상에
반정부시위대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쁘라윳 찬 오차 총리의 퇴진과 왕실 개혁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이슈다.
2014년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현 정권은 민정이양 약속을 수차례 했지만 헌법을 뜯어고쳐가며 재집권에 나설 정도로 정권 유지에 악착같은 모습을 보였다. 태국 정치에서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이처럼 재집권에까지 나설 수 있는 것은 왕실의 보이지 않는 동의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태국 정치에서 왕실은 쿠데타의 최종 승인자로, 쿠데타 세력은 거사를 성공시킨 후 왕실의 승인만 받으면 국가 통치에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집권한 세력은 왕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 태국에서 왕실모독죄는 중범죄로 다뤄진다. 이런 순환적 구조로 인해 태국 정치 개혁 어젠다에서 왕실과 군부세력은 사실상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국민적 신망이 두터웠던 고 푸미폰 전 국왕의 재임시절 이 같은 문제가 표출될 분위기는 아니었다. 왕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돼 있기도 하지만 고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이 가져다주는 정치적 안정감은 어떤 집권세력보다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하 와찌랄롱꼰 새 국왕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즉위 전부터 자질논란을 일으킨 새 국왕은 통치를 시작한 후에도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코로나19 사태하에서 보인 왕의 행보가 국민적 공분을 샀다. 새 국왕은 자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와중에 자국을 떠나 독일에서 장기체류를 했는데, 뒤늦게 알려진 이 사실에 비판의 목소리는 컸다. 여기에다가 수조원에 달하는 왕실 재산을 사실상 개인 몫으로 돌리는 등 국가의 안정적 관리보다는 자신의 치부에만 골몰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된 또 다른 원인이 됐다. 현재 왕실 재산이 구체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지만 33조원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 같은 막대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국가 예산을 통해 매년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시위대의 저항구호에서 ‘세금’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새 국왕이 2014년 이후 집권한 현 집권 세력의 독재에 대해 전혀 견제역할도 하지 못하고 의지도 없자 시위대는 태국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왕실 개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현 군부 정권은 지난해 총선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자 젊은 층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신생정당인 미래전진당을 헌법재판소를 통해 해산해버렸는데, 이때도 왕실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미래전진당은 총선에서 군부재집권을 막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반정부시위대의 주축인 젊은 층들은 표를 몰아줬다. 고 푸미폰 국왕 재임시절 집권 세력들은 과도한 정책을 펼 때면 왕의 심기를 살피곤 했는데, 새 국왕이 들어선 이후 왕실과 정권 사이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2020년 시위대는 군부와의 관계 절연을 요구하고 있고, 왕실 재산 관리도 투명하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시민 봉기 가라앉힐 해법은
현 사태를 진정시키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쁘라윳 총리의 자진 퇴진이다. 이후 과도 내각을 구성하고 시위대가 요구하는 헌법 개정 수순에 돌입하면 어느 정도 현 과격 시위 양상이 잠재워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쁘라윳 총리는 스스로 물러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왕실과 호흡을 맞추며 시위대에 대응하고 있다.
대표적 예가 5인 이상의 집회금지를 단행한 비상조치다. 이 조치는 왕실에 대한 시위대의 시위가 직접적으로 행해진 직후에 발표됐다. 이후 공권력을 동원한 시위대의 강경 진압도 이어졌다. 왕실을 의식한 행보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현 정부도 강경 대응을 지속하기에는 부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14년 시위와 달리 정치 세력 간의 싸움이 아니라 태국의 민중이 들고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시위의 주축인 젊은 층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면 왕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은 더 직접적일 수밖에 없고, 사태 전개에 따라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면 상황은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최근 새롭게 거론되는 카드가 바로 축출된 탁신 전 총리다. 현 집권세력의 대안으로서 거론되고 있는데, 탁신 전 총리는 태국 서민층을 기반으로 해 기존 기득권층과는 결이 다르고 현 국왕과의 친분설도 있다. 개혁성향도 있어 왕실이 현 국면에서 택할 수 있는 부담 없는 인사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최근 탁신 전 총리의 전 부인이 탁신계 정당의 고위직으로 자리 잡은 점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물론 왕실이 현 집권세력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면 강경 모드를 유지하며 반정부시위대에 대항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군사쿠데타가 다시 일어나는 상황도 가정해 볼 수 있다. 방콕 외곽에 우리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 격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왕실과 가까운 인사들이 주축이 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 태국 전문가는 “다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명분도 약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선택이 될 것”이라면서 “태국 정국은 최악의 상황으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탁신 카드로도 시위대의 민주화와 왕실 개혁을 위한 요구를 잠재울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홍구 총장은 “레드셔츠로 대변되는 탁신계 세력들은 반정부시위대에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있다”면서 “반정부시위대 입장에서는 탁신계 세력들도 기존의 기득권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시위가 극단적 사태로 전개되지 않으려면 왕실은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