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업체와 거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역상담회에 가보면 문의는 많지만 실제로 실적을 내기 어렵다. 첫 만남에서 다짜고짜 총판매권 혹은 아랍 지역 전체 에이전트십을 달라는 현지 업체도 있다. 가격을 협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 몇 센트를 가지고 며칠을 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은 항상 두 자리 수 퍼센트 이상을 챙기려고 한다. 수수료도 높다. 중간 역할에 대한 커미션을 확실히 그리고 높은 비율로 받으려 한다. 아랍에서 흥정은 필수다. 아랍인들은 이를 즐긴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하고 장기간 협상을 하려 한다. 주로 상품을 팔거나 플랜트를 수주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참고 또 참아야 한다. 화를 내서도 안 된다.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아니 행동과 정신에 박혀 있는 아랍의 상인정신이다.
아랍의 세계적인 민간 제조업체는 없다?
아랍의 세계적인 민간 제조업 회사 혹은 유명한 브랜드 네임 하나만 들어보자. 답은 “없다”다. 극동의 작은 나라, 자원과 자본도 없었던 한국에도 웬만한 세계인이 알 수 있는 삼성, 현대, LG 등이 있다. 아랍권 국가 수는 22개다.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는데 왜 단 한 개의 제조업체가 없을까? 아랍은 19세기부터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국보다 먼저 서구화한 곳이다. 제조업도 한국보다 더 먼저 시작되었다.
여기에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후부터 그동안 아랍의 산유국이 벌어들인 오일머니를 생각해보면 더욱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물론 저유가 시절도 있었지만 1973년부터 현재까지 약 40년 이상 중동으로 흘러들어간 석유대금은 계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수십조 달러는 족히 될 것이다. 2013년 사우디 아라비아 한 나라의 석유수출은 약 2900억달러를 넘었다. 그 엄청난 오일머니를 가지고도 제대로 된 제조업 회사가 아랍 22개국 중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가주도의 발전전략, 석유에 대한 지나친 의존, 비효율적인 경제운용, 교육의 부재, 근면성 부족한 등이다. 그러나 이런 변수들을 중동 전체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나라마다 경제 환경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산유국도 있고 석유가 전혀 없는 중동국가도 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인 나라도 있고 개방정책을 추진해온 나라도 있다. 일부 서방의 학자들은 이슬람 종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하루에 5번 예배하고 1년에 한 달을 단식하는데 어떻게 생산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에게는 좀 어색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중동인의 정신세계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머천트(merchant) 마인드’다. 상인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좀 비하한다면 ‘장사꾼’ 마인드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꼭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다. 페니키아인들처럼 이슬람 이전 시대의 사람들도 상업을 중시해 왔다. 중동 출신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장사와 고리대금에만 치중하는 민족으로 손가락질 받았다. 문제는 독립국가 형성 이후에도 이 상인정신이 중동 대부분 국가의 경제와 경제인의 마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한 시장에서 즉석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제조업보다는 장사
실제로 장사에 익숙한 사람이 제조업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계약만 한 건 잘 성사시키면 몇 십 퍼센트를 남길 수도 있고, 사재기를 잘하면 몇 배의 이익도 올릴 수 있는 것이 장사이기 때문이다. 소규모 자본으로 할 수 있을 뿐더러 제조업에 비해 관리도 쉽다. 국내외 인맥을 잘 구축해 계약 혹은 구매만 잘하면 된다. 아랍의 무역상 중 고위관리 출신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와 어느 정도 인맥을 가진 사람들은 은퇴 후 무역회사를 차리는 경우가 많다. 부지를 구입하고, 생산시설을 짓고, 인력을 관리하고, 품질을 높여야 하고, 최근에는 판매까지 신경써야 하는 제조업으로 전환하기 어렵다. 아무리 잘해도 수익 발생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는 제조업에 아랍 경제인들은 투자하기를 꺼린다. 이 때문에 지난 수십 년간 중동의 오일머니는 부동산 사업, 주식시장, 채권, 서비스업에만 집중됐다. 모두 자금회전이 빠른 분야들이다. 아랍 경제의 전반적인 실패에는 이처럼 지나친 상인정신이 배후에 있다. 정부만이 홀로 수없이 비효율적인 제조업에 투자해 왔다. 비민주화된 사회에서 부패와 나태가 만연해 공기업의 생산성은 상당히 낮다. 일부 사회주의 경제를 추구하는 나라에서는 ‘해고’가 불법인 경우가 많다. 기계 하나에 한두 명이면 될 것을 수십 명이 달라붙기도 한다. 산업이 발달하려면 정부가 주도하더라도 민간이 어느 정도 따라와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랍에서는 팽배한 상인정신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 곳이다.
(왼쪽)이라크 길거리의 담배 장사꾼, (오른쪽)알제리의 여성 스카프 방문 판매자
제조업도 장사처럼… 기술축적, 상품개발에 관심 없어
제조업을 하더라도 비즈니스처럼 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 예를 들어보겠다. 이집트의 자동차 조립은 우리보다 20여 년 빨랐다. 1956년 당시 대통령의 이름과 유사한 ‘나스르’라는 자동차를 조립했다. 피아트 회사와 계약을 맺고 부품을 들여와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제자리 수준이다. 21세기에도 이집트는 자동차를 조립만 하고 있다. 다른 아랍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조립하거나 완제차를 수입하고 있다. 1976년 ‘포니’를 처음 조립하기 시작해 현재 세계 5위 전후의 자동차 대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자동차와는 큰 대조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 기아, 그리고 대우 자동차도 이집트에 생산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이집트 자동차 업체의 사업 방식은 간단하다. 3년 전후의 부품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특정 차량의 생산라인을 설치한다. 한국 기업은 엔지니어를 파견해 생산 공정 관리를 돕는다. 이집트 측이 주로 담당하는 것은 판매다. 3년 정도 판매를 해보고 잘되면 한두 해 더 연장한다. 그리고 시장이 어느 정도 포화상태라고 판단되면, 이집트 기업인들은 한국 기업과의 계약을 종료하고 또 다른 나라의 차종을 찾아 생산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방식을 반복만 해온 것이다. 기술개발이나 부품 자국화 혹은 영구적인 협력관계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다른 중소기업도 비슷하게 운영된다. “공장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비즈니스맨이 많다. 하지만 이들도 주로 빨리 돈이 되는 조립만 한다. 한 공장에서 다양한 제품들이 생산되곤 한다. 플라스틱 사출기계가 돌아가는 라인, 알루미늄 용기를 제조하는 라인, 종이컵을 찍어내는 라인 등이 같은 회사 내에서 운영된다. 외국에서 기계를 구입한 후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기계가 노후해져 사용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면 관련제품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고 다른 제품을 생산한다. 사실상 전문으로 하는 업종이 없다는 것이다. 한 비즈니스 가족을 예로 보면 아버지는 전자제품 수입, 아들은 플라스틱 사출 공장, 다른 아들은 자동차 부품 수입 등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 여러 종류의 제품을 생산하거나, 에이전트로 활동하는 일도 흔하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기술축적, 생산성 제고, 상품개발 등에는 관심이 없다. 이는 제조업이 아니라 장사다.
(왼쪽)바레인 시장의 대추야자 등을 파는 건과물 상점, (오른쪽)전쟁직후 혼란 속 바그다드의 환전상.
위폐 여부를 돋보기로 확인하고 돈은 무게로 잰다.
국가경제와 가계에도 악영향
결과적으로 과거 수십 년간 엄청난 오일 달러에도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일부 왕족들이나 군사정권 실권자들은 많은 돈을 해외 부동산 혹은 금융상품에 투자하곤 했다. 최근 막대한 오일머니로 정부의 공공부문 투자 노력은 크게 증가하고 있지만, 민간부문이 여전히 이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장사와 서비스업에만 돈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21세기에 꼭 제조업이 국가경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동은 지나칠 정도로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과도한 상업주의는 일반인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현상이 높은 실업률이다. 아랍권 대부분 국가는 실업률이 두 자리 수다. 실질 실업률이 30~40%에 달하는 곳도 있다. 엄청난 규모의 석유를 파는 산유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사우디나 이란에서도 실업률이 가장 큰 사회문제다. 인구는 크게 늘고 있는데 일자리 창출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정부, 공공기업, 그리고 서비스업만이 인력을 어느 정도 흡수하고 있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해 일자리가 크게 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가도 비싸다. 서민 가계에는 큰 부담이다. 내부에서 대량생산이 이뤄지지 않아 생필품조차 대부분 수입한다. 특히 공산품의 경우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비싸다. 상업주의에 물든 무역상들의 중간 마진이 지나치게 높아 소비자는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한다. 비산유국들은 재정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높은 관세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상업세력과 권력층이 결탁하는 경우도 많다. 외국 제조업체의 진출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 실세와 손잡고 무역을 하는 큰 상인들이 외국 제조업체의 진출을 방해하고 있다.
21세기 국가경제발전을 위해 제조업이 꼭 우선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서비스 등 소위 3차 산업으로도 부유하고 경쟁력 있는 국가 경제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중동의 상인정신은 너무 지나치다. 그 속에서 경제권을 쥔 왕족과 권위주의 세력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세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011년 아랍의 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미진한 산업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은 젊은이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고 있다.
웃으면서 흥정을 즐겨라!
아랍인들은 ‘흥정’을 즐긴다. 낙타 등에 물건을 싣고 몇 주 동안 사막을 건너 시장이나 마을에 도착하면 최소 3일을 쉬어 가야 한다. 천천히 협상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이런 상인의 삶을 5000년 이상 유지해 온 민족이다. ‘박리다매’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목숨을 걸고 종사하는 무역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높은 이윤을 추구한다. 따라서 ‘가격 지르기’ 문화가 팽배해 있다. ‘바가지’라는 개념도 없다. 낮은 가격에 구매해서 높은 가격을 받고 파는 것은 훌륭한 상행위이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유교 문화와 더불어 한 때 상행위를 금기했던 기독교문화가 유입된 우리의 거래 개념과는 다르다.
아랍인들은 차를 마시며 농담을 하며 몇 시간을 즐겁게 흥정하면서 서로 수용할 수 있는 가격을 찾아나간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가격에 대해서도 판매자든 구매자든 절대 화내지 않는다. 파는 사람은 당연히 비싸게 팔고 싶고, 사는 사람은 당연히 싸게 사고 싶다는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랍권으로의 출장과 협상은 ‘가격 결정권자’가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지에서 여유를 가지고 흥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협상 중에 본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겠다는 행동을 하면 ‘더 깎을 여지가 있는 가격’으로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