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의 유력 신문인 프라브다는 지난 2월 슬로바키아가 지난해 92만70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해 인구 1인당 171대 꼴로 세계에서 인구비례로 가장 많은 자동차를 생산한 나라로 기록됐다고 보도했다. 현재 이 나라에는 기아차 슬로바키아 현지법인을 비롯해 독일의 폭스바겐이나 프랑스의 PSA푸조 등이 들어와 있다.
이 같은 추세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슬로바키아의 서북부 질리나에 있는 기아차 슬로바키아 현지법인은 올해 상반기 들어 이 법인이 생산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공장이 완전가동 상태에 돌입했다. 기아차 현지법인은 최근 올 상반기에만 15만89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해 전년 동기 대비 6%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곳에선 지난 2월부터 기아차의 완전 신모델인 3도어 프로시드 생산을 시작한데 이어 5월부터 프로시드GT와 5도어 모델인 시드GT 모델을 생산하고 있다. 기아차 슬로바키아 법인은 이 외에도 올 상반기에 지난해보다 6.7% 늘어난 25만3200대의 가솔린과 디젤 엔진을 생산했다. 이억희 기아차 슬로바키아법인 대표는 “자동차 시장의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유럽 소비자들이 고품질에 매력적 디자인을 가진 밸류카로 꼽히는 기아차를 선택해준데 대해 감사하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는 지금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유럽대륙 생산기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 나라의 수도 브라티슬라바 인근 도시인 갈란타와 트르나바 일대엔 삼성전자의 전제자품 조립라인과 LCD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기아차는 이 나라 GDP의 20% 가량을 담당하고 있다.
두 회사 외에도 삼성디스플레이와 현대모비스나 동원금속 평화정공 등 협력사들이 이곳에 나가 있다. 지난 9월엔 한국 금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KDB유럽법인이 슬로바키아 지점을 개설했다. 글로벌 기업 중엔 소니나 월풀 등이 슬로바키아에서 전자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슬로바키아는 어떤 나라이고 왜 한국의 주요기업을 비롯한 다국적 기업들이 이곳에 진출했을까.
벨벳혁명 거쳐 자유시장경제로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뮌헨에서 동쪽으로 곧장 가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가 나오고 이곳에서 또 동쪽으로 똑바로 가면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가 나온다.
슬로바키아는 과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와 분리 독립됐다. 체코가 독일 쪽에 가깝다면 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 쪽에 가깝다. 남으로는 헝가리, 남서로는 오스트리아, 북서로는 체코, 북으로는 폴란드와 접해 있는 동유럽의 내륙국이다.
과거 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이 나라는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 체코슬로바키아로 탄생했다. 이후 1939년 나치 체제 하에서 슬로바키아로 독립했다가 2차 대전이 끝난 뒤 구소련 휘하에서 다시 합쳐져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가 됐다. 이 때문에 슬로바키아 지도자들은 공산치하에서 자유를 쟁취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만들려고 나섰지만 1968년 바르샤바 연합군의 진입으로 무산됐다.
그 뒤 1989년 평화적인 벨벳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출범시켰다. 1993년 1월 1일 체코와 평화적으로 분리했다. 벨벳혁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이 붕괴된 것을 빗대어 이를 벨벳이혼이라고도 한다.
중세때부터 공통점이 없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합쳐졌던 두 나라이기에 자연히 자신들의 길로 간 것이다. 슬로바키아는 이후 2004년 나토와 EU에 가입하며 빠르게 경제를 키워 2009년 1월엔 유로존에도 가입해 유로화 사용국이 됐다. 그러나 체코는 아직 유로존에 가입하지 않고 체코 코르나화를 사용하고 있다. 분리직전 체코 쪽의 GDP가 슬로바키아 쪽 GDP보다 20% 가량 높았는데 이후 슬로바키아가 빠르게 성장해 격차는 조금 좁혀진 상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2년 기준 1인당 GDP는 체코가 1만8608달러, 슬로바키아가 1만6932달러다. 국토면적도 슬로바키아가 체코의 60%로 작고 인구도 체코가 거의 배 정도 많은 수준이다.
슬로바키아가 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의 관심을 끈 것은 이처럼 주변국에 비해 1인당 GDP는 다소 낮은 반면에 유로권 국가라는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내륙의 글로벌 기업 생산거점
사실 슬로바키아는 국토면적이 4만9035㎢로 9만9720㎢인 남한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작은 내륙 국가이다. 게다가 이 나라 남쪽에 있는 헝가리가 거의 평야지대인데 반해 슬로바키아는 국토의 70% 정도가 산이라고 할 수 있는 산악국가다. 동서로 긴 국토의 중앙부 북쪽으로 카르파시안 산맥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타트라 산 일대는 해발 2500m가 넘는 봉우리만 29개나 될 정도다.
이 같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이 나라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서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브라티슬라바에서 유럽 내륙의 최대 허브공항이라고 할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밖에 안될 정도로 가깝다. 게다가 유럽국제특급열차(TEE)까지 지나가기에 교통이나 물류 면에서도 외국 기업들의 관심을 끌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에 EU와 유로존까지 가입했으니 대 유럽 수출기지로서 중요성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지형적 특성에서 잘 나타나듯이 서방으로선 전략적 측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곳이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등은 물론이고 NATO 전체를 방어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벨벳혁명이 성공하고 체코로부터 분리해 독립한 뒤 미국이 적극적으로 슬로바키아 지원에 나선 것도 사실 지정학적 중요성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부진에서 벗어나는 경제
다국적기업들이 들어와 제조업이 활성화하고 있으나 슬로바키아는 아직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유로존 일원으로 들어와 유럽의 기준에 맞춰야 하는데다 경제수준을 권역 내 다른 나라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이런 가운데 유로존 국가 전체에 공통적으로 부과된 재정긴축 과제까지 수행해야 한다.
우선 경제전망만을 볼 때 유로존 전체가 저조한 만큼 그 영향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다.
IMF는 지난 6월 세계경제 전망을 통해 올해 슬로바키아가 0.6% 성장하는데 그친다며 지난 4월 냈던 1.4% 성장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제임스 존 IMF 슬로바키아 파견관은 “대외 여건이 지속적으로 악화됨에 따라 이처럼 슬로바키아 경제성장 전망을 낮췄다”고 설명했다. IMF는 슬로바키아의 최대 교역국인 독일의 성장전망도 삭감한 바 있다. 당시 피터 카지미르 슬로바키아 재무 장관도 슬로바키아 정부 역시 종전 1.2%로 예상한 성장 전망을 하향조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유로존의 침체가 극단적으로 악화되지 않는데다 ECB의 완화적 통화정책이 이어지면서 슬로바키아 경제가 하반기 들어 개선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런던에 본부를 둔 글로벌 정보업체인 비즈니스 모니터 인터내셔널은 최근 다음과 같은 발표와 함께 슬로바키아의 성장 전망을 소폭 상향 조정했다.
“우리는 이 지역의 경기상황이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2013년 실질 GDP 성장 전망치를 종전의 0.6 %에서 0.8 %로 상향조정한다. 연초 우려했던 경기둔화가 당초의 예상보다는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 압력이 크지 않고 상품(원자재) 시장이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함에 따라 올해 슬로바키아의 인플레이션 전망은 종전 2.0%에서 1.8%로 하향조정한다. 다만 내년 인플레이션 전망은 2.2% 수준이 될 것이란 기존치를 유지한다.”
그렇지만 유로존 전체를 억누르는 재정적자 해소 문제는 이 나라에도 부담을 주고 있다. 사실 슬로바키아의 재정은 아직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2012년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52.1% 수준으로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다만 2011년 43.3%에서 늘어났다는 게 우려를 사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슬로바키아 역시 유로존 국가 전체에 해당하는 재정적자 상한선 3%를 맞추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제임스 존 IMF 파견관은 “슬로바키아 정부가 올해 재정적자를 EU의 상한선인 3% 이내로 묶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성장률이 0.6%에 머물더라도 2013년 말 재정적자 목표는 도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비즈니스 모니터 인터내셔널은 슬로바키아가 지역 공통의 기준을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아주 근소한 정도만 넘어설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 나라의 재정적자 전망을 종전 3.5%보다 낮은 수준인 3.2%로 하향조정했다. 정부의 재정지출이 제한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경제활동이 개선되며 세수가 늘어 약간의 재정수입 확대가 예상되기 때문이다”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이에 대해 슬로바키아 정부는 유럽집행위가 정한 가이드라인을 어떤 식으로든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중도좌파 정부를 이끌고 있는 로버트 피코 총리는 외부 요인에 의해 재정적자가 늘어날 수도 있으나 슬로바키아 정부는 공공적자를 가이드라인 이내로 줄일 것이라고 확고하게 밝힌 바 있다. 피코 정부가 의회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적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정책 입안이나 실행에 상당히 유리한 입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약속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게 관측통의 분석이다.
그러나 피코 정부가 세제와 복지 분야의 개혁을 추진 중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경제에 부담을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코 정부가 재정적자를 상당한 수준으로 축소하기 위해 세수를 늘릴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어 경제를 위축시키거나 투자자금 유입을 막아 정부의 적자축소 계획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금시장의 평가가 조금은 피코 정부에 유리하게 바뀌었다는 점은 긍정적 요소다.
슬로바키아는 지난 2월 17억5000만유로의 10년 만기 국채를 발행한 바 있다. 당시는 유로존의 경기가 둔화 가능성이 부각됐을 때인데 슬로바키아는 중기 스왑금리에 1.22%포인트의 프리미엄을 더한 수준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이는 동일 만기의 독일 국채(bund) 수익률에 1.46%포인트의 프리미엄을 주는 수준으로 동구권 강국인 폴란드의 조달금리보다 겨우 0.12%포인트를 더 준 정도이다. 당시 해외 수요가 위축되고 있어 수출지향적인 이 나라 경제의 확대가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특히 올해 자금조달에서 적용된 슬로바키아 채권의 가산금리는 이 나라가 2012년 11월 발행한 12억5000만유로 규모 채권의 가산금리인 1.50%포인트보다 낮은 수준에서 결정돼 유럽 지역의 경기상황과 무관하게 이 나라의 국제적 평가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슬로바키아는 현재 무디스에서 A2의 신용등급을 받고 있다. 슬로바키아는 인구 500만이 조금 넘는 소국이다. 제조업을 유치해 성장기반을 마련한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하다.
INTERVIEW |라디슬라브 심코 KDB유럽 슬로바키아 지점장동·서 유럽 동시 진출 교두보로 최적이죠
KDB산업은행은 국내 금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9월 10일 브라티슬라바에 유럽현지법인 지점을 개설했다. 라디슬라브 심코 지점장으로부터 슬로바키아의 사정을 들었다.
현지에서 본 슬로바키아 경제 전망은
슬로바키아는 2004년 EU 가입 후, 유럽 재정위기로 2009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안정 속에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유로화 도입으로 화폐교환 위험성이 줄고 재정수지가 강화되며 거시경제의 투명성이 높아진데다 EU 시장과의 통합 등이 경제발전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수출 위주의 작지만 강한 개방경제체제를 구축해 앞으로도 경제성장 추세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유럽 경제회복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돼 OECD는 0.8%, IMF는 0.6% 수준으로 슬로바키아의 경제성장을 예측하고 있으나 하반기부터 유로지역 경기가 향상되면서 슬로바키아 경제상황도 동반 향상될 것으로 기대한다.
유럽 재정위기가 진행형인데, 슬로바키아는 어떤가
슬로바키아는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높은 노동 생산성, 안정된 정치체계를 바탕으로 2012년에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모두 흑자를 기록했다. EU 재정기준을 맞추려고 세제개혁과 함께 공공 재정 지출 감축, 국영기업 부분 민영화도 추진 중이다. 인근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은행권 부실채권 비율은 5.3%로 낮은 편이다.
슬로바키아의 임금 수준과 노동 수준은
최근 수년간 글로벌 기업 진출이 늘어 외국어(영어, 독일어 등) 능통 인력 수요가 증가하면서 임금 수준이 높은 편(대졸 초임 월급 1500~2000 유로 수준)이다. 헝가리 내 동일직급·숙련도 인력에 비해 약 30~40%정도 높다. 근로 형태나 노동 강도는 인근 동유럽 국가와 유사하다.
노동인력이 주거비용이 비싼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집중된 데다 인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임금수준이 높기(슬로바키아의 2~3배 수준)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의 진출 여건은. 강점과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
슬로바키아는 유럽대륙 중앙에 있어 서유럽과 동유럽 시장을 동시 개척하는데 유리하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부가가치세는 20%로서 주변 동유럽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다. 자동차 및 전자업종의 부품산업이 동반 진출해 현지 일관생산체제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슬로바키아는 별도의 외국인투자법을 두고 있지 않다. 원칙적으로 국내 상법이 그대로 적용되며, 기업인수나 신규법인 설립, 합작투자 등 어떠한 형태의 외국인 투자에 대해서도 항공운송 분야나 금융업을 제외하고는 투자신고나 정부승인에 제한도 없다.
다만 외국인 투자유치가 활발해짐에 따라 기존 현금 지원 대신 세금감면 방식의 혜택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제조업은 단순 조립보다 연구·개발 등 고부가가치 업종에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슬로바키아의 교육 여건은
540만 인구 중 고졸이상 인구는 160만명으로 30% 수준이다. 교육은 10년간 의무교육을 한다. 전국 35개 대학에서 매년 7만여 명의 석·박사를 배출하지만 고급인력 수요 충족에는 다소 부족한 편이다. 교육수준이나 임금수준은 지역별로 편차가 크다.
KDB의 역할과 한국기업들의 활용 가능성은
KDB는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슬로바키아와 동유럽에서 CIB(기업 및 투자은행) 업무에 특화한 영업을 한다. 한국계 진출기업 지원을 위해 다양한 기업금융 업무를 하면서 현지화를 통해 고객 저변을 확대할 방침이다.
한국기업들은 전통적 대출 외에 다양한 금융수요가 있다. 신규 진출 기업의 조기 정착을 위해 신디케이티드 론이나 클럽 딜 등을 통한 다양한 맞춤형 금융상품을 제공하려고 한다. 자본금 계좌 개설이나 투자정보 제공 등의 서비스도 하고 있다.
KDB의 현지 전략과 장기 비전은
한국계 기업 외에 헝가리 기업체나 슬로바키아 우량 제조업체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할 예정이다. 슬로바키아에 진출한 헝가리계 다국적 기업과 슬로바키아 국영기업체 등 현지 우량 기업체 발굴과 신규자산 확충을 통해 조기정착에 나설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KDB유럽을 중심으로 동유럽 내 영업기반과 슬로바키아 진출 노하우를 활용해 인근 국가로 추가 진출할 예정이다. EU권에선 주변국가에 신고만 하면 은행업 진입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