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은 ‘현재의 거울’이다. 한때 나라를 이끌었던 그들의 얼굴에서 국민들은 오늘의 영광과 고통을 읽는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어려움을 초래한 대통령은 국민들 사이에서 ‘찬밥’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하지만 한때 국민을 평안하게, 국가를 영광스럽게 만들었던 지도자에 대해서는 임기가 끝난 뒤에도 변함없는 신뢰를 보낸다. 희비가 엇갈리는 전직 대통령의 사연은 미국식 정치 이벤트의 ‘꽃’인 전당대회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지난 8월 27일부터 나흘간 열렸던 미 공화당 전당대회. 이곳에서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우선 이번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부시 성(姓)을 가진 두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그의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다. 전당대회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지지연설 등 일정한 역할을 맡는 게 통례다. 당의 원로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인기가 바닥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스스로 불참을 통보했고 은근히 이를 바랐던 공화당 측은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이다. 아버지 부시 역시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공화당 측에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껄끄러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당시 대통령으로서 미국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는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의 최대 공격 포인트가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의 경제정책 실패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경제 실정이 오바마 대통령과 오버랩 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지난 8월 말 ‘탬파베이 타임스 포럼’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지금도 여전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의 피켓사진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고 밋 롬니 후보가 아니라 레이건을 외치는 공화당원도 적지 않았다. 공화당은 이날 일정을 레이건 전 대통령의 업적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공화당이 배출한 ‘위대한 전직 대통령’을 상기시킴으로써 정권 탈환의 당위성을 보여준 것이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지만 2012년 미국 대선에서는 더욱 소중한 공화당의 정치적 자산이 되고 있다. 감세와 재정지출 감축으로 요약되는 ‘레이거노믹스’를 통해 미국경제를 살려냈고 강력한 군사력과 담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소련과의 냉전을 승리로 이끈 레이건의 업적이 오바마 현 대통령과 묘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미국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공화당 전당대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플로리다 탬파 지역에서는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이 빈번히 TV 전파를 타고 있었다. 민주당 TV 정치광고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등장한 것이다. 광고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옹호하고 롬니의 부유층 세금 삭감, 재정지출 감축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하는 중산층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화당에서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갖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이라면 민주당에서는 빌 클린턴이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정치 광고였다.
지난 8월 미 공화당 전당대회
지난 7월 말 갤럽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66%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직 시절과 엇비슷한 지지율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9월 3일부터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대선후보로 지명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물론 민주당에도 골칫덩이 전직 대통령이 있다. 레이건에게 재선티켓을 빼앗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다. 그에 대한 공화당 측의 비판은 조롱에 가까울 정도다.
롬니 후보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란정책을 비판하며 “지미 카터 다음으로 무능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1주년 때에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라도 (사살)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은 이번 전당대회에 불참하고 화상을 통해 지지연설을 해야 했다.
전직 대통령의 그림자는 한국 대선에도 드리워져 있다. 유력 후보 중 한 사람은 전직 대통령의 딸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나머지 대선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의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머물고 있다. 오로지 민심(民心)에서 우러나는 전직 대통령의 후광이 한국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