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다국적 제약사인 사노피는 지난 4월 26일 이제까지 두바이에 두었던 자사의 지역센터를 터키의 이스탄불로 옮긴다고 밝혔다. 이 지역센터는 바레인이나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는 물론이고 이스라엘까지 커버하는 곳이다.
스티븐 콥햄 사노피 터키지사 부사장은 “터키는 양질의 노동력과 양호한 과학적 기반은 의학 부문의 전문지식, 경험과 결합해 사노피의 뛰어난 관리센터와 중요한 영업 플랫폼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사노피의 일반약품 부문인 젠티바는 이미 터키 서부 키르크라레리에서 제약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장은 사노피 그룹의 3대 연구개발센터이기도 하다.
이보다 하루 앞선 4월 25일 미국의 바이오테크놀로지 회사인 암젠은 터키의 일반약품 회사인 무스타파 나브자트의 지분 95.6%를 전액 현금으로 사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7억달러 상당의 이번 M&A는 터키를 기반으로 중동과 유럽 시장을 확보하려는 암젠의 전략적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밥 브래드웨이 암젠 COO는 “무스타파 나브자트의 스태프와 경영진들과 함께 이 지역에 고도의 혁신적인 약품 시장을 확대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M&A에는 암젠 외에도 글락소 스미스클라인이나 화이자, 엘라이 릴리 등 다국적 제약사들이 경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 제약부문의 성장은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도 주목하고 있다. 이 잡지는 최근 세계 14위, 유럽 6위인 터키의 제약부문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주요 기사로 소개했다. 터키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함에 따라 지난 10년간 지역 시장을 선점하려고 나선 다국적 제약사들이 터키를 매력적인 투자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03년엔 이탈리아의 메나리니 그룹이 터키의 가장 오래된 제약회사 이브라힘 에템 우라가이를 인수한 것을 비롯해 액타비스 그룹이 터키의 일반약품 회사 파코의 지분 89%를 인수했다. 또 시티 그룹의 벤처캐피털이 바이오파마사를 사들였고, 영국의 파트너스 인 라이프사이언스사가 무니르 사힌사를 인수했으며, 독일의 화이트 스완사가 타이메드사를 M&A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나라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정보가 많지 않았던 터키가 지금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경합장이 되고 있다.
세계적 제약회사나 바이오 업체들이 진출하고 있다는 것은 이 나라의 기초 과학이나 기술수준이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국적 기업이 터키로 가는 이유는
다국적 기업들의 제약부문 진출은 외국인 터키 투자의 한 가지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터키 투자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드밴스트 페트로케미컬사가 터키에 폴리프로필렌 공장을 건설키로 했다고 지난 4월 30일 발표했다. 어드밴스트 페트로케미컬은 사우디 알주바일에 이미 폴리프로필렌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는데, 사업 확장을 위해 터키에 투자를 하기로 했다.
터키에는 이미 인도의 아디탸 버라 그룹이 5억1000달러 규모의 비스코스단섬유사 공장을 건설키로 한 것을 비롯해 다우 케미컬이 터키의 아크사와 합작으로 탄소섬유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 4월 24일엔 중국의 네트워크 장비업체 화웨이가 터키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화웨이는 이미 이스탄불에 연구개발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터키 3대 무선통신업체의 메인장비 공급사이기도 하다.
미국 자동차회사인 크라이슬러와 캐나다의 블랙베리 단말기 메이커인 림(RIM)도 터키 투자를 검토 중이라고 했다. 자페르 차을라얀 터키 경제부장관은 최근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두 회사가 터키 투자를 타진해왔다고 밝혔다. 크라이슬러는 터키의 새로운 투자 인센티브 구조에 관심을 보였고, 림은 터키의 모든 초등학생들에게 태블릿 PC를 제공하고 모든 공립학교에 전자 칠판를 도입하는 파티흐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이처럼 터키 투자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데는 최근 터키정부가 발표한 새로운 투자 인센티브 계획도 한몫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터키 정부는 올해 일반투자 인센티브 계획을 비롯해 지역투자 인센티브 계획, 대규모 투자 인센티브 계획, 전략적 투자 인센티브 계획 등으로 요약되는 새로운 투자 인센티브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외국 기업들의 투자는 숫자로도 나타난다.
터키공업비즈니스연합(TUSIAD)은 지난해 터키에선 241건의 M&A가 일어났는데, 이 가운데 74%인 138건이 외국 기업과 터키 기업 사이에 일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 M&A 규모는 150억달러가 넘고 있다.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지난해 말 현재 외국인 투자회사는 2만9283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동적 한국? Dynamic Turkey
지난 2월 국내 한 언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터키 방문과 관련해 터키 관계자들이 경제 기적을 이룬 한국의 역동성과 터키의 잠재력을 언급하며 한-터키 FTA 체결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실제는 어떨까.
지난 연말 터키 여행을 다녀왔다는 한 블로거는 터키의 역동성과 거대한 힘, 우수한 민족성에 놀랐다고 밝혔다. 한국에선 아시아의 변방 또는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 소통이 잘 안될 것 같은 이슬람권 나라 정도로 인식하거나 조금 더 잘 안다고 해봤자 6·25전쟁 때 참전했던 혈맹이나 현대차가 진출해 있는 나라, 축구를 잘 하는 나라 정도로 여겨졌던 터키에 대한 얘기다.
실제로 이 나라의 경제 중심인 이스탄불 거리는 서울에 버금갈 정도로 차량이 넘친다. 차종도 현대, 기아차가 주종인 한국과 달리 포드나 폭스바겐, 아우디, BMW, 벤츠는 물론이고 포르쉐나 람보르기니 같은 럭셔리차도 수없이 지나가고 있다.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다.
미 CIA는 터키의 실질 GDP가 지난 2010년과 2011년 각각 8.2%와 4.6% 성장했다고 밝혔다. 인근의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이 침체에 빠진 상황임을 감안할 때 터키의 성장은 놀라운 수준이다. 같은 기간 한국이 6.2%와 3.6% 성장을 했으니 한국보다 터키가 더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가 워낙 좋다보니 2010년부터 지난해 중반까지 버블 가능성을 제기하는 분석들이 여러 곳에서 나오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중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AK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재집권에 성공하자 각 연구기관들은 터키가 과열을 잠재우기 위해 긴축에 들어갈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터키중앙은행까지 ‘비정상적’이라고 묘사한 저금리 정책을 지속되고 있는데 대해 UBS의 라인하트 클루제를 비롯한 다수의 이코노미스트들이 선거가 끝났으니 터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시중 자금사정을 빡빡하게 가져갈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터키중앙은행은 2010년 12월 17일 이후 1.5%의 저금리 기조를 이어오고 있다.
저금리 정책이 이어질 경우 수입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 경상수지 적자가 커질 것이란 게 주요 이코노미스트들이 터키의 긴축을 예상한 이유다. 무라트 우르겐 HSBC 터키 담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당시 터키의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8%선에 달할 것이라며, 선거 직후 긴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터키는 2006년 이후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다 유럽 금융위기 여파로 2010년에 388억달러나 되는 적자를 낸 바 있다. 이 때문에 S&P조차 지난 3월 초 터키의 신용전망을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하향조정한 바 있다. 그러자 자페르 차을라얀 터키 경제부 장관은 “S&P의 기준이 모호한 발표는 실로 안타까우며 사실상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그들의 존엄성과 신뢰에 흠집을 낼 것이다. S&P가 터키에 대해 속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터키는 예전의 터키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터키에 투자할 열 가지
➊ 성공적인 경제
❷ 인구구조
❸ 양질의 경쟁력 있는 노동력
❹ 자유롭고 개혁적인 투자환경
❺ 좋은 인프라 스트럭춰
❻ 중심부에 위치
❼ 유럽의 에너지 통로이자 터미널
❽ 낮은 세금과 투자 인센티브
❾ 1996년 EU와 관세동맹 체결
❿ 커다란 국내 시장
성장정책 추구하는 정부
실제로 시장의 우려와 달리 터키의 상황이 뚜렷이 개선될 조짐이다. 올해 들어 3월 말 기준 경상수지 적자는 61억달러로 전년 동기의 95억달러에 비해 크게 줄었다.터키 경제가 안정을 찾고 있는 데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의 능력이나 산업구조도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터키는 이슬람권에 속해 있지만 강력한 사법부와 군부의 영향력으로 종교가 국가의 향방을 좌우하는 인근 국가들과 달리,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이룩해왔다. 지난해엔 정부와 군부 간 갈등으로 군 지도부가 동반 퇴진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에드로안 총리는 국면을 잘 수습하고 더욱 강력한 성장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특히 남유럽 위기가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될 기미를 보이자 외국인 투자에 엄청난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투자유치에 나서 경제를 안정시키고 있다. 이외에도 터키 정부는 국유자산을 담보로 수쿠크(이슬람 채권)를 발행해 걸프 지역의 여유자금을 유치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터키정부가 큰 소리를 치는 것은 잘 짜인 산업구조와 젊은 인구구조, 비교적 큰 시장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중해 연안의 온화한 기후와 5000m급 고산지대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터키는 동서양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 많은 중세 유적까지 갖고 있다. 덕분에 세계적 관광지로 꼽혀 지난해 관광수입만 230억달러에 달했다. 경제안정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물론이다.
국토도 78만km²나 되어 제법 여유가 있는 데다 남북한을 합한 정도의 인구(약 7500만명)도 터키경제를 지탱하는 데 큰 발판이 된다. 특히 터키는 2011년 기준 중간 연령층이 29.7세에 불과하며 노동 가능 인구만 2670만명에 달하는 젊은 인구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관세동맹을 맺고 있는 유럽의 공장 구실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자동차나 중화학공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을 갖추게 된 것도 터키 경제의 강점이다. 터키는 한국과 제2원전 건설 협상을 하면서 한국이 원전에 참여하는 대가로 자국 헬기를 구매하라는 조건을 내세울 만큼 나름 과학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한국과 닮은 경제 구조
종합할 때 터키는 규모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한국과 비슷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유국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고유가로 부담을 안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UBS나 모건스탠리 등 투자은행들은 최근 고유가가 지속되면서 터키와 한국 등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 자료를 내놓은 바 있다. 국제 원유시장에서 유가가 계속 상승하자 UBS는 터키의 크레디트디폴트스왑(CDS)에 투자하라고 했고, 모건스탠리는 터키 증시의 비중을 축소하라는 자료를 낸 바 있다. 고유가로 BRIC’s 국가들이 긴축하면 이들과 거래가 많은 터키나 한국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물가나 경상수지에 주는 부담도 비슷하다. IMF는 유가가 10달러 오를 경우 터키는 물가에서 0.5%포인트, 경상수지에서 40억달러 상당의 부담이 생기는 것으로 분석했다.
경제 규모는 아직은 한국이 한참 앞선다. IMF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터키의 GDP는 7780억달러로 1조1162억달러인 한국과 차이가 크다. 그러나 순위는 18위로 15위인 한국을 바로 뒤따르고 있다.
물론 최근 성장률은 한국보다 앞서고 있다. 무역규모는 4000억달러 정도로 한국에 크게 뒤지고 있지만 젊은 인구구조의 장점을 살려 제조 부문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격차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잠재적으로 경쟁구도가 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역동성’을 강조하는 한국으로선 이런 점에서 외국인들이 터키의 역동성을 주시하고 있다는 점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스위스 IMD의 장 피에르 르만 교수는 최근 한 기고에서 “터키는 국제적으로 액티브하며, 중국, 인도, 브라질, 아프리카 등과 경제적·정치적 유대를 맺고 있다. 이를 통해 터키는 국가의 성장엔진을 활성화해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뚜렷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이 대양으로 나가는 중앙에 있다면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터키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