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초 세계 주요 언론은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잭슨홀(Jackson Hole) 미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주목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한국에선 김중수 한은 총재가 잭슨홀 미팅에 참가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뉴욕 특파원 때인 지난 2002년 그곳을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9.11테러의 영향으로 검색이 강화돼 예약했던 비행기를 놓치고 뉴욕에서 꼬박 이틀 반나절을 자동차로 달리니 미국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 옐로스톤이 나타났다. 대평원을 가로질러 한 여름에도 우박이 눈처럼 쏟아지는 큰 산을 넘어야 나오는 곳이다. 작은 코끼리만큼이나 커 보이는 버팔로가 떼 지어 다니고, 말 같은 옐크가 이따금 나타나 놀라게 하고, 밤이면 먹을 것을 찾는 곰이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각양각색의 온천이 솟아올라 기이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서부영화에서 많이 듣던 인디언의 고장 아이다호와 몬타나 와이오밍 등 미국 중서부 3개주가 만나는 곳이니 오지 중에서도 오지라고 할 수 있다.
그곳 야영장에서 밤을 보낸 뒤 자동차로 40분 정도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니 옐로스톤에 붙은 또 하나의 국립공원 티톤이 나타났다. 그곳 안내판엔 ‘이곳은 잭슨홀, 옛 서부의 마지막 땅(This is Jackson Hole, The Last of the old West)’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잭슨홀은 거대한 티톤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계곡의 이름이다. 짙푸른 잭슨 호수엔 사철 눈을 이고 있는 티톤산과 점점이 구름을 담은 파란 하늘이 그대로 녹아들듯 잠긴 그림 같은 곳, 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론 긴팔 옷을 입고 다녀야 할 정도로 시원한 곳이다.
버냉키 의장은 왜 이런 오지에까지 왔고 김중수 한은 총재는 또 왜 그곳으로 갔을까. 한여름에 만년설을 바라보며 피서를 하려고 그 바쁜 사람들이 세계 경제가 흔들리는 와중에 그곳으로 갔을까.
이들이 참석한 잭슨홀 미팅의 정식 명칭은 ‘캔자스시티 연준은행 잭슨홀 경제정책 심포지엄(The Federal Bank of Kansas City’s Jackson Hole Economic Symposium)’이다. 미국의 지역 연준은행이 연 심포지엄에 버냉키 의장이 참석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은 총재까지 참석한다는 것은 의전 상 뭔가 좀 이상한 듯하다. 한은 부산지점에서 연 행사에 버냉키가 참석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역에 권한 준 미국 중앙은행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오른쪽)과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경제정책 심포지엄 시작 전에 산책을 하고 있다.
그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국의 중앙은행제도부터 보아야 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워싱턴에 있는 본부와 12개 지역 연준은행으로 구성돼 있다. 당연히 통화정책은 버냉키 의장이 이끄는 연준 본부의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결정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역 연준은행은 한국으로 치면 한은 지점 구실을 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미국이란 나라가 연방제를 국가시스템의 골간으로 삼은 것처럼 연준도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역 연준이 일정한 권한을 갖고 연방은행을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12개 지역 연준이 모두 같은 권한을 갖고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FOMC엔 10명의 위원이 있는데 연준 본부에서 버냉키를 비롯한 5명의 상임 위원이 참석하고 12개 지역 연준 가운데 뉴욕 연준은행 총재와 나머지 11개 지역 연준은행 총재 가운데 네 명이 순번제로 돌아가며 참석해 미국의 통화정책을 결정한다.
연준 본부의 FOMC에서 통화정책을 결정한 뒤 실질적으로 공개시장 조작을 하면서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뉴욕 연준은행이 담당한다. 그래서 뉴욕 연준은행 총재는 FOMC 부총재로 상시 참석한다. 12개 지역 연준은행은 미국 50개주를 나누어 맡아 지역 통화정책을 집행하는 동시에 연준에 일정한 정보를 제공해 통화정책에 반영한다. 뉴욕 연준이 집계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지수나 필라델피아 연준 지수 등은 지역 또는 특정 업종의 업황을 설명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미국 중서부 오지를 담당하는 캔자스시티 지역 연준은행은 특성상 미국 전체 경제에 영향을 줄 만한 지표를 내기는 어렵다. 다만 매년 미국 연준의 수뇌부와 학계 경제계 리더들을 초청해 중장기 경제정책을 진단하는 심포지엄을 연다. 그 캔자스시티 연준은행 관할 구역 가운데 한 곳이 와이오밍주다.
폴 볼커 때 잭슨홀 미팅 시작
폴 볼커 전 FRB 의장
캔사스시티 지역 연준은행은 올해 35번째 경제정책 심포지엄을 여는데 와이오밍주 티톤 국립공원에 있는 잭슨홀에서 여는 것만 30번째이다. 심포지엄을 잭슨홀서 열게 된 데는 유래가 있다. 1976년 캔자스시티 연준은행 총재가 된 로저 구피(Roger Guffey)가 보스턴 연준은행이 연 미팅에 참석해서 보니 모양이 괜찮아 심포지엄을 열자고 했는데 첫 번째 주제는 이 지역 기반산업인 농업과 관련된 농업선물이었다.
관심도가 낮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오일쇼크로 스태그플레이션이 거론될 정도로 경제가 휘청거렸다. 이 위기에 연준 총재로 등장한 인물이 지금도 미국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폴 볼커다. 볼커는 반대세력의 주장을 무시하고 유례없는 고금리정책을 강행해 천정부지로 치솟던 물가를 잠재우고 경제를 안정시켰다. 당시 로저 구피는 온갖 비난을 감내하며 버티던 볼커를 잠시라도 쉬게 하자며 이곳에서 심포지엄을 열자고 했고 볼커도 참석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심포지엄 주제는 단기가 아닌 중장기 경제정책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고차원적인 것에 맞춰졌고 최고의 석학들을 초청해 격을 맞췄다. 게다가 잭슨홀이 있는 티톤 국립공원은 록펠러가 사들여 원시적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조건으로 기부한 깨끗한 곳이다. 찌는 듯한 여름 시원한 자연을 배경으로 수준 높은 토론이 벌어지니 참석자들 모두가 만족했고 이후 심포지엄은 연준의 정례행사로 굳어졌다. 버냉키를 비롯한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나 석학들이 세계 경제가 요동치는 급박한 시기에 이 오지로 날아간 것도 그래서다.
세계 경제의 거물들이 모이니 세계의 언론이 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이곳엔 숙박시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모든 참석자들이 비용을 내야 한다. 취재를 하더라도 반드시 참가비를 내야하는 게 이 심포지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