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부 장관,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등. 서방국가에서도 여성 지도자는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 지도자는 누가 있을까. 한국에서도 이미 여성 총리가 나왔고 여권의 최고 실권자도 여성인데 아시아 각국에서도 최근 여성들의 위상이 급격히 부각되고 있다.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제약이 많았던 아시아에서 최고에 위치에 오르고 현재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여성 지도자들을 찾아봤다.
탁신의 막내 동생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대홍수로 정치적 시험대에 오른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44세)은 현재 아시아에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최초 태국 총리다. 친나왓 총리는 1967년 중국계 친나왓 가에서 아홉 자녀 중 막내딸로 태국 산캄파엥에서 태어났다.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해 해외로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의 막내 여동생이기도 하다.
그녀는 태국 치앙마이 대학에서 정치·행정학을 전공한 후 미국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같은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태국으로 돌아온 친나왓은 1991년 오빠 탁신이 세운 회사 친나왓디렉토리에 입사하면서 기업가의 길을 걷는다.
2002년 태국 최대 이동통신사 어드벤스드인포서비스(SCI)의 상무이사에 올랐고, 최근까지 부동산 개발업체 에스시에셋의 대표를 맡아왔다.
정치계에 입문한 잉락은 지난 5월 탁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태국 야당 푸어타이당의 대표 후보군으로 오르면서 정치계에서 급부상했다. 그는 푸어타이당의 대표로 선출된 후 7월 조기총선을 이끌어 푸어타이당이 전체 의석 500개 가운데 과반이 넘는 265석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새 국회에서 여당 자격으로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지난 7월5일에는 국왕의 재가를 받은 후 공식적으로 태국 총리로 선출됐다. 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선 해외로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사면 문제가 최대 과제다. 경제적 타격 없이 최저급여제도 인상, 전국 와이파이 서비스 제공 등도 다뤄야 한다. 또한 캄보디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등의 문제도 최초 여성 총리의 정치적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지
아웅 산 수지
아웅 산 수지(Aung San Suu Kyi, 66세) 여사는 어떤 직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아시아의 위대한 여성 지도자로 꼽힌다. 아웅 산 수지는 1945년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 산의 딸로 태어났다. 약 30년 동안 외국에서 학자로서, 그리고 평범한 주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1988년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침 그해 미얀마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888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그녀도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고 당시 독재 정권을 쥐고 있던 네윈 장군이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9월 다시 새 군부정권이 나라를 장악했다. 수지 여사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설하고 의장을 맡으면서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어갔다. 군부정권은 1989년 이러한 수지 여사를 가택에 연금했다. 군부는 그녀가 미얀마를 떠나면 가택연금을 풀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1990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한다. 당시 수지 여사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민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80% 이상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이에 군사정부는 총선을 무효화시키고 수지 여사에 대한 탄압은 계속 이어진다.
1991년 수지 여사는 민주화 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지만 가택연금 상태에 있어 남편과 아들이 대신 수상식에 참여했다. 그녀는 노벨평화상 상금을 미얀마 국민들의 복지와 교육 기금으로 기부했다.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군사정권은 수지 여사에 대한 가택연금과 해지를 반복했다. 수지 여사는 1995년 가택연금에서 6년 만에 풀려났지만 2000년 9월 다시 가택연금을 당했다. 2002년 국제연합 특사가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를 일부 풀어주는 조건으로 수지 여사의 가택연금 조치는 다시 해지했지만, 이듬해 다시 군부는 수지 여사를 가택에 연금했다. 결국 그녀는 7년 후인 2010년 11월 가택연금에서 풀려났다.
수지 여사의 민주화 운동은 진행형이다. 앞으로 그녀의 활동이 미얀마의 운명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이들은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는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 나라의 지도자보다도 세계에서 더 큰 영향력을 지닌 여성으로 꼽을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직장이란 유리천장을 넘어선 여성이 아닌, 전 세계의 유리장벽을 넘어선 인물들이다.
세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 / 프라티바 파틸 인도 대통령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의 딸 셰이크 하시나 총리
셰이크 하시나(Sheikh Hasina, 63세)는 전통적인 정치 가문 출신으로 방글라데시 총리직을 두 번째 역임하고 있다. 하시나 총리는 독립 당시(1971년)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이었던 셰이크 무지브르 라만의 다섯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대학 시절부터 방글라데시 최대 민족주의 정당 아와미 연맹의 학생 멤버로 활동하면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평탄하지 못했다. 1975년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 형제, 아들을 비롯해 17명의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인도로 망명을 떠났던 그는 1981년 아와미연맹의 대표로 선출되면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정치계에 몸을 던졌다. 1980~90년대 방글라데시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두 차례 체포되고 가택연금 되는 수난을 겪지만 정치 활동을 지속했다. 이후 1996년 아와미연맹을 이끌고 총리직에 선출됐다. 그러나 2001년 국제투명기구에서 방글라데시를 가장 부패한 나라로 선정해 다시 한 번 실각하는 운명을 맞기도 했다. 2004년 그는 죽음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하시나 총리는 그를 암살하려는 수류탄 공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그를 지지하던 당원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하시나 총리의 인생은 오뚝이와도 같다. 2009년 1월 그의 정당인 아와미연맹이 총선에서 299석 중 230석을 차지하면서 하시나는 다시 방글라데시 총리에 오르게 됐다. 하시나 총리의 인생은 웬만한 남성도 쉽게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굴곡을 겪었다. 그의 강인한 생명력이 지금의 자리까지 있게 만들었다.
인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 프라티바 파틸
프라티야 파틸(Pratibha Patil, 77세)은 인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다. 인도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대통령의 권한이 크진 않지만 그녀의 정치 경력은 아시아의 여성 지도자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하다. 파틸 대통령은 1934년 인도 나드가온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변호사로서 빈곤 여성 지위 상승 등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1962년 주의회 의원 선거에서 국민회의당 후보로 당선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후 1985년까지 주의회 의원으로 5선을 기록했다. 또한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주정부에서 20년 이상 장관직을 역임했다.
그 이후 1985년부터 5년 동안 연방정부의 상원의원으로 활동하고 1991년에는 마하라슈트라주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2004년에는 인도 라자스탄주의 첫 여성 주지사로 당선됐다. 2007년 7월 집권연합정당인 통일진보연합(UPA)의 후보로 출마해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지금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까지 선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이력을 지녔으며, 자비와 지도력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호 칭 테마섹홀딩스 CEO / 인드라 누이 펩시 CEO
인도 중산층 출신의 인드라 누이 펩시 CEO
인드라 누이(Indra Nooyi, 55세) 펩시 CEO는 아시아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롤모델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누이는 1955년 인도 첸나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인도 마드라스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인도경영대학에서 MBA 석사를 받은 후 본국에서 회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돌연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1978년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MBA)에 입학했다. 1980년 대학원 졸업 후 보스턴 컨설팅 그룹을 거쳐 모토로라와 발전설비 부문의 다국적 기업 아세아브라운보버리(ABB) 등에서 전략기획부문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 그녀에게 펩시와 제너럴일렉트릭(GE) 두 곳에서 동시에 제의가 들어온다. 일반적으로는 GE를 택하겠지만, 그녀는 과감히 만년 2등 회사 펩시를 선택한다.
당시 펩시 CEO였던 웨인 캘러웨이가 “GE는 분명 훌륭한 회사이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GE보다 당신을 더 간절히 원한다”는 말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누이가 펩시에 들어간 이후 펩시는 커다란 변혁을 맞게 된다. 그녀는 1998년 음료기업 트로피카나를 인수하고, 코카콜라와의 경쟁에서 스포츠음료 게토레이를 생산하는 퀘이커오츠를 인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펩시의 시장 다각화 기반을 마련했다.
그녀가 2000년 재무담당최고책임자(CFO) 자리에 오른 후 5년이 지난 2005년 역사상 처음으로 펩시는 코카콜라를 제쳤다. 2007년 그녀는 펩시 역사상 최초로 여성 CEO로 취임했다. 이후 그녀는 시사지 '타임', '포브스' 등에서 뽑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리스트에 빠지는 일이 없다.
리센룽 총리의 부인 호 칭 테마섹홀딩스 CEO
호 칭(Ho Ching, 58세) 테마섹홀딩스 CEO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전 세계에서 아시아재계를 주도하는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다. 칭은 중국계 싱가포르인으로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제어공학 석사를 마쳤다. 칭은 싱가포르로 돌아와 국방부에서 엔지니어로서 활동했다. 1987년에는 싱가포르 테크놀로지 그룹에서 부회장을 역임한 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라 2001년까지 역임했다.
칭은 2002년 5월 싱가포르 국영 투자 기업 테마섹홀딩스에 합류한다. 이후 칭은 아시아 기업 투자에 박차를 가하면서 테마섹홀딩스를 국영 투자회사에서 아시아 최고 투자기업으로 성장시킨다. 칭은 조용하고 미디어에 자주 비치지는 않지만 야망만은 누구보다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 칭은 테마섹홀딩스의 CEO일 뿐 아니라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의 부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