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Analysis] 산업혁명 발상지 영국 도시 폭동,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했나
입력 : 2011.09.15 16:54:52
수정 : 2012.04.05 12:07:49
헐렁한 파란색 트레이닝 윗도리를 입은 11살 소년이 영국 하이베리코너 법정에 섰다. 피고인석 발언대에 가려 가까스로 법관석을 올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키에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이 소년은 놀랍게도 런던 폭동에 연루돼 체포된 수백 명 중 하나였다.
이날 법정에서 소년은 폭도들이 럼포드 데본햄 백화점을 약탈한 현장에서 휴지통을 훔쳤다고 시인했다. 지난 11일 BBC방송이 보도한 하이베리코너 법정에 선 ‘최연소 폭도’얘기다.
영국 정부는 사상 초유의 동시다발적 폭동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강도 높은 처벌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경찰은 폭력과 질서방해, 약탈 등의 혐의로 1200여 명을 체포해 이들 중 725명은 기소됐고 지난 15일까지 115명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20대 2명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을 통해 폭동 참여를 유도하는 글을 올린 것 때문에 각각 징역 4년이 선고됐다.
런던에서 시작돼 버밍엄, 리버풀, 맨체스터 등 영국 전역 도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전례 없는 폭동에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폭동의 원인이 분명치 않았다. 폭도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불을 지르고 약탈했지만 구호는 외치지 않았다. 그 흔한 플래카드도 하나 없었고, 머리띠를 동여매지도 않았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폭동을 일으켰는가. 그것도 근대를 연 산업혁명의 본거지에서 …. 전 세계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들의 폭동 이유를 찾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정부의 긴축정책과 실업률 상승으로 생활고에 시달린 이주민 젊은이들의 불만이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폭동 사건의 발단을 짚어보면 일리가 있다. 발단은 알려진 바와 같이 한 흑인 청년이 런던 외곽 토트넘에서 경찰의 불심검문 중 총에 맞아 즉사한 사건이었다.
29세의 마크 더건은 북부 런던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경찰의 제지를 받는 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더건은 불법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경찰에게 총을 쏘았다고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진행된 충격시험 결과 경찰의 무전기에 박혀있던 총알이 더건의 총이 아닌 경찰 소유의 총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더건의 죽음에 대한 항의 시위가 트위터 등 SNS를 타고 인근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처음 시위가 열린 토트넘은 전통적으로 이민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저소득층 거주지로 경찰과 지역민 간 적대적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돼온 요주의 지역이었다.
흑인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경찰의 과잉 행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시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를 거쳐 저성장과 긴축재정의 고통에 대한 대정부 항의시위로 번지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저소득층 이주민 청년들이 폭동의 주동세력으로 부상했다. 일을 하지도 않고 일할 준비도 하지 않는 ‘니트족(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으로 불리던, 대부분 직업이 없는 10대~20대 다인종 청년층이었다.
이런 연유로, 전 런던시장 켄 리빙스턴은 현 보수 연립정부의 무리한 재정 삭감이 이번 폭동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영국은 긴축재정으로 수년간 저성장에 머물러 있고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영국 청년실업률은 20%에 육박했다.
캐머런 총리는 이번 폭동의 원인이 ‘거리의 갱문화와 혼란에 편승한 범죄자들의 약탈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경제문제가 이번 폭동을 설명해주는 전부는 아니다. 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돼 법정에 불려온 사람들은 빈민가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이주민 청년들만이 아니었다. 이미 언급한 열한 살 소년뿐 아니라 초등학교 선생, 재벌가 3세, 사회봉사자, 대학생, 촉망받는 엔지니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영국 '가디언'지는 “폭도가 누구냐에 대해 간단한 대답은 없다”며 “저소득층 젊은이들도 많았지만 여성도 있었고, 10대부터 40대까지 나이와 인종도 다양했다”고 보도했다.
게다가 폭동 가담자의 상당수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주변의 무질서와 혼란 상황에 즉흥적으로 뛰어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트위터에 훔쳐온 물건들을 사진으로 올리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들 대다수는 평소 사회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건전한 시민이었다. '뉴욕타임스'는 “다수 가담자들이 자신이 한 행동의 이유를 제대로 대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인종차별, 실업·빈곤, 사회적 소외 등 다양한 이유가 폭동의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무정부 상태의 묻지마 폭동과 쇼핑삼아 약탈하는 현실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답은 없어 보인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폭동의 원인이 정부의 긴축정책이 아니라 거리의 갱 문화와 혼란에 편승한 범죄자들의 약탈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폭동은 빈곤이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이라며 “폭력을 미화하고, 권위를 무시하고, 책임은 방기한 채 권리만 내세우는 문화가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무질서한 혼란 속에 사회에 불만 없는 시민들까지 가담한 것은 영국 사회 깊숙이 박힌 사회적 병폐를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병폐는 안정된 사회 속에서는 사회와 개인의 심리 기저에 깊숙이 웅크리고 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혼란 속에서 극명하게 표출된다는 것.
영국에서는 이번 폭동사태를 통해 관련자를 엄벌하고 SNS를 차단하는 일시적 조치보다 영국 사회를 다시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일은 사회가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커다란 사회적 과제를 던져 주었다”며 “문제 해결을 위해 돈을 푸는 방식이 아닌, 하층민 역시 지역사회의 책임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8만원세대와 다문화가구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한국도 영국의 폭동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만 없는 상황이다. 사회적 소외자들을 포용해 사회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정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