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은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나라가 됐다. 오해는 말아야 할 것이 우리나라는 아직 젊다. 아직은 전체 인구 중에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1%로 선진국의 절반 수준이다. 문제는 ‘속도’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은 2018년에 65세인구 비중이 14% 이상인 ‘고령사회’에 도달한다. 2026년이 되면 인구 10명 중 2명은 65세 이상이 된다. 고령사회 진입까지 프랑스는115년이 걸렸는데 한국은 18년이 걸릴 것 같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나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대응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지난 11월 한국여기자협회의 기자 25명이 고령사회 현장을 목격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기 위해 그리스와 일본을 찾았다.
그리스 : 연금 부문 적자 아무도 몰라…빚 갚기 바빠 노인 문제는 ‘뒷전’
‘칼리메라!(Kali mera! 안녕하세요)’ 그리스 노인들은 대체로 유쾌하고 밝다. 산양 젖 치즈와 신선한 채소, 올리브 오일을 잔뜩 뿌린 그리스 샐러드 때문인지, 에게 해의품질 좋은 와인 때문인지 여유롭고 느긋하다. 국내총생산(GDP)의20%가 관광인 나라답다.그러나 수도 아테네의 신타그마 광장을 비롯해 도시를 조금만 둘러보면 이 나라가 왜 세계 재정위기의 진원지로 주목받고 있는지 그 원인을 엿볼 수 있다.
‘NO PAIN, NO BRAIN’, ‘Fuck this society!!!'’아테네의 한 건물 담벼락에 쓰인 이 낙서는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지 않더라도 ‘사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각도 없는 인간이다’는 그리스 국민(아마도 젊은이들)의 고뇌를 그대로 보여준다.그리스는 잘 알려졌듯이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부실 덩어리인 연금제도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에는 최근까지 무려 155개의 연기금이 있었는데 2008년 이를 13개로 통폐합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연금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우리들은 그리스 최대 연금기관인 IKA(근로자 대상 사회보험기금)를 방문해 연금 규모와 연금 운용 현황 등 전반적인 설명을 부탁했다. 그러나 IKA 관계자는 모두 ‘비공개 사항’이라며 대답을 꺼렸다.
다만 “적자가 나도 국고에서 비정규 지출이라는 명목으로 지원이된다”고 했다. 아하! 감이 왔다. 이 연금공단은 아마도 방만한 운영으로 이미 부도상태일지 모른다. 그 구멍을 매번 국가가 세금으로메워주다가 국가 재정위기가 앞당겨졌을 것이다.실제 그리스는 연금개역안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50세, 남성은 55세에 조기은퇴하고 죽을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법에 의해 노동일수 4500일만 채우면 은퇴가 허락됐기 때문인데 45세에 일을 그만두고 연금을 받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은퇴 후 받는 연금도 적지 않다.그리스 연금의 평균 소득대체율은 80%다. 일할 때 월 100만원을받았다면 퇴직하고 난 뒤에도 80만원은 나온다는 얘기다.
공무원의 경우 퇴직 시 소득의 최대 95%까지도 받을 수 있다. 높은 지위에서 고소득으로 은퇴하면 죽을 때까지 말 그대로 ‘만고 땡’이다.참고로 그리스는 제우스, 헤라, 아테나 등 신들의 천국인 동시에‘공무원 천국’인 나라다.인구 1100만 명 가운데 공무원(공공기관 포함)은 약 100만 명. 월급도 월 2200~3400유로로 민간기업 평균인 1600유로보다 월등히 높다. 그리스 공무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근무하는데 점심시간도 길고 여름이면 ‘낮’ 3시에 퇴근한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여행 가이드 일을 하는 일리오파울로씨(여•36)의 말은 더욱리얼하다.“공무원들은 오후 1시면 퇴근하고 부업을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은퇴하면 높은 연금을 받고 살죠. 정말 쉬운 삶(easy life)이에요.”사정이 그렇게 심각한데 왜 지금까지 공무원 연금제도를 개혁하자는 여론이 들끓지 않았냐고 물었다.“모두들 공무원들의 편한 삶을 꿈꿔요. 개혁이 이뤄지면 꿈이 사라질지 모르잖아요.”유구무언이다.다행히 그리스는 연금 개혁을 필두로 변화하고 있다.
아테네에서 만난 아티나 드레타 그리스 노동사회보장부 사무차관은 “연금공단 시스템이 한계에 부딪혔다”며 “사회보장 차원과 의료 부문에서큰 변혁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IKA에서 가졌던 궁금증도어느 정도 풀렸다.현재 13개 연금공단의 적자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이다.다만 2009년에만 정부 지원금이 155억 유로 들어갔으며 2010년에는 132억 유로, 내년에는 122억 유로가 책정돼 있어 상황의 심각성을 유추할 뿐이다.드레타 차관은 “2009년 연금에 지원되는 지출이 전체 GDP의 12%였다”며 “이대로라면 2060년에 GDP의 23%를 연금에 써야하는데 이러면 나라가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개혁 법안의 목표는 연금 지출을 2060년까지 GDP의 15% 수준에서 묶는 것이다.그리스는 재정 건전화를 위해 2014년까지 공무원들의 급여를 동결하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여름휴가에 줬던 특별상여금도 전액 삭감했다. 복지수당은 추가로 8%를 감축했으며 퇴직금 상한액도 내려잡았다.연금 부문에서는 수령 연령을 남녀 모두 67세로 일원화하고 연금액을 깎아 소득대체율을 기존 80%에서 62%로 낮추기로 했다. 또4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총 26억 유로 규모의 예산을 투입했다.
이렇듯 현재 그리스 정부의 정책 포커스는 재정 건전화와 젊은이들의 일자리 창출에 맞춰져 있다.그리스 남성의 평균수명은 77세, 여성은 82세. 이들을 위한 대책은 뭐냐고 물었지만 “연금이 아직은 양호하고 그리스는 가족 간 유대가 끈끈해 노인들의 삶의 질도 나쁘지 않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2013년까지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원해 준1100억 유로를 갚아야 하는 그리스로선 솔직히 고령화 정책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인다. 방만한 연금 운용과 그로 인한 재정 파탄이 결국 은퇴 이후의 삶과 직결되는 사회보장제도를 축소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다.
일본 : ‘노인들의 사생활을 보장하라’… 제도를 넘어 사회의 눈길로
“일본은 야구랑 축구도 한국에 밀리더니 이제 고령화 속도까지 따라잡힌 거 같네요.”
일본 후생노동성의 카토라 사회보장제도과 과장은 이런 썰렁한 말로 한국 기자들과 아이스브레이킹(ice-breaking)을 시도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06년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도달했다. 남성은 평균 79세까지, 여성은 평균 86세까지 사는데 100세 가까운 노인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출산율이 조금씩 높아지는 추세라 인구 감소 걱정은 한시름 놓는 분위기고 오히려 고령자들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유럽 수준까지 높일 방침이다. 사회보장 부문에 쓰는 나랏돈도 전체 세출 가운데 채무 상환과 지방교부금을 제외하면 절반이 넘는다. 사회보장 지출이 매년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 재원을 마련하고자 현재 소비세 인상을 고려하고 있다. 사실상 20년째 성장이 멈추다시피 한 일본이지만 고령자 문제만큼은 아시아의 귀감이 될 만하다. 무엇보다 노인들을 ‘사회보장제도’가 아닌 ‘사회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어딜 가나 나이 든 어르신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들 삶과 생활의 일부가 돼 버린 것이다.
65세 인구가 전체의 19% 정도인 요코하마는 일본에서는 ‘젊은 도시’에 속하지만 노인요양시설과 봉사자들이 자택을 방문해 이뤄지는 재가 서비스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비결은 개호보험과 포인트제도, 지역케어프라자(Care Plaza)다.
요코하마에 사는 40세 이상의 시민은 모두 개호보험에 가입해 소득에 따라 1년에 최저 2만7000엔부터 12만1500엔까지의 보험료를 낸다. 기초생활자 등은 자치구의 지원으로 사실상 무료다. 그러다가 65세가 되면 홈헬퍼(방문 지원), 낮 동안 보살펴주는 데이(day) 서비스, 단기 입소, 복지 용구 대여 등 각종 서비스를 받게 된다. 특히 요코하마는 건강한 어르신들이 자원봉사를 하면 포인트를 주고 현금으로 바꿔 쓸 수 있게 하는 ‘이끼이끼(いきいき)포인트제도’를 시행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아침 10시께 방문한 ‘지역케어프라자’는 노인 요양과 아동 보육 프로그램이 함께 있어 자연스럽게 ‘대가족제’ 환경이 조성되는 시설이다. 이 날도 한 쪽 방에서는 젊은 엄마들이 피아노 연주에 맞춰 아기를 업었다 안았다 율동이 한창이고 다른 쪽 방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색종이로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다. 중·노년층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스포츠나 바둑·장기 행사나 요리강좌를 열고 오카리나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식사는 물론 웬만한 대중 온천 부럽지 않은 목욕탕도 잘 구비돼 있다.
이곳에서 만난 76세의 할머니는 “집에만 있으면 심심한데 여기에 오면 애기 웃음소리도 들리고 친구들하고 얘기도 할 수 있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이용자 대부분이 독거노인이라는 점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분위기다.
요코하마에는 세계적인 고령자 주택인 ‘보나지(Bonage)’도 있다. 일본주택공사가 짓고 미쓰이스미모토그룹이 운영하는 시설인데 고령자 주택과 유료노인복지시설, 임대아파트 등으로 구성돼 있다. 고령자 주택에는 총 110명이 사는데 케어직원만 100명이다. 거주자 평균 연령이 86세인만큼 복도는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넓게 지어졌다. 갈색 미닫이문이 달린 각 방도 사실상 가정집이라기보다는 잘 꾸며진 병실에 가까운 느낌이다.
문제는 돈이다. 이 아파트에 살기 위해선 일시금 2600만엔에 매달 30만엔을 내야 한다. 그래서 거주자들도 과거에 한자리(?) 했던 사람이 많다고.
여기서 잠깐. 일본 현지에서 만난 한 노인복지시설 대표는 한국의 노인시설을 둘러봤는데 ‘이럴 수는 없다’며 격분을 금치 못했다.
“한국 시설들은 노인 사생활 보호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당신들이 거기서 생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방에 대여섯 명을 우르르 몰아넣고 식사도 직원들 점심과 퇴근시간에 맞춰서 줍니다. 귀찮다고 휠체어에 태운 채로 밥을 먹게 하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너무 부족합니다. 일본에서는 형사 처벌감입니다.”
남의 나라에 대해 너무 심한 평가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우리 모두가 느낀 것은 ‘늙으면 한국보다는 일본 노인시설에서 살고 싶다’였다. 실제 요코하마 요양시설의 40%는 1인실이다.
토요일 오후, 50% 정도 국고 지원을 받는 특별노인요양홈 ‘라포르(Rapport)’도 들렀는데 마침 딸과 손자 둘이 노부부를 찾아왔다. 닫히는 문 사이로 얼핏 보니 할아버지는 잘 다물어지지도 않는 입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했다.
우리는 누구나 늙고, 한국 사회는 고령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문득 궁금해졌다. 고령사회에서는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를 바탕으로 노인들이 유·무료 요양시설이나 고령자 주택에 머무는 것이 일반화될 것인가. 그리고 자녀와 손자들은 명절 때마다 선물을 들고 시설을 방문하는 풍속이 고착될 것인가. 일본은 이에 대한 답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라포르 운영대표는 이 질문에 잠시 곤란한 웃음을 띠더니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부모를 시설에 입소시키는 것에 대해 죄스러워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돈을 내고 부모를 시설에 보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사회적인 인식도 어쩔 수 없이 ‘합리적’이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고령사회가 코앞인 한국은 그리스의 현실에서 교훈을 배우고 일본의 제도에서 정책 마련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령자들의 행복한 삶, 예로부터 효(孝)에 애잔한 한국 사회의 심리적인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