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엔화가치가 떨어지면서 일본 여행을 편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연초만 해도 달러당 엔화 값은 140엔대 초반이었는데, 최근 150엔대에 머무르면서 이것이 100엔당 원화 값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 2021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신용카드 사용이 편해졌지만 여전히 현금만 고수하는 곳들도 많다. 이런 곳을 이용하려면 출국 전에 환전은 필수다. 일본을 자주 찾았던 사람이라면 7월부터 환전할 때 낯선 지폐를 손에 쥘 수도 있다. 일본의 새로운 지폐가 오는 7월 3일 발행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위조 방지를 위해 대략 20년마다 새 지표를 발행한다. 일본 지폐는 1만엔권, 5000엔권, 1000엔권 등 3종류인데(2000엔권이 있지만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새 지폐 발행으로 여기에 들어가는 3명의 인물 또한 모두 바뀌게 됐다. 새 1만엔권에는 일본 메이지 시대 경제 관료를 거쳐 여러 기업의 설립에 관여해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년)의 초상화가 들어간다. 그는 일제강점기 경성전기(한국전력의 전신)의 사장을 맡기도 했다. 5000엔권에는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1864∼1929년), 1000엔권에는 일본 근대 의학의 기초를 놓은 기타사토 시바사부로(1853∼1931년)의 초상이 각각 새겨진다. 현재 통용되는 1만엔권에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한 후 쿠자와 유키치, 5000엔권에는 메이지 시대 여성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 1000엔권에는 전염병 연구자인 노구치 히데요의 초상이 각각 실려 있다.
새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은 지난 2019년에 선정됐다. 당시는 역사관에 있어서 보수적인 아베 신조가 총리를 맡고 있었던 때다. 이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는 식민지 경제 침탈에 앞장서온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1만엔권의 주인공이 된 것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메이지(明治)와 다이쇼(大正) 시대에 활동했던 사업가다. 일본에서는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정경유착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를 통해 경제 발전과 근대화를 이끌었지만, 이는 결국 전쟁을 일으키는 토대를 구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1902~1904년 구한말 일본 제일국립은행이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1원, 5원, 10원권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 은행은 시부사와의 소유였다. 한국에서는 구한말 철도와 전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 침탈에 앞장선 인물로 비판받고 있지만, 그는 일본에서 ‘도덕경제합일설’로 유명하다. 이는 개인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 이것이 공익이라는 사고방식인데 일본 경제를 성장시키는 기본 틀이 됐다는 평가다.
지폐 속 인물에 논란이 있지만 일본은 새 지폐를 통해 소비진작을 기대하고 있다. 또 일본 노년층은 이자가 거의 없는 은행 대신 현금을 집에 쌓아놓는 경향이 강한데, 이러한 ‘장롱예금(단스예금)’이 이번 기회에 햇빛을 보기를 기대하고 있다. 새로운 화폐 사용을 위해서는 은행·편의점 자동입출금기(ATM)와 자판기, 식당 발권기, 철도 발권기 등의 교체가 필수다. 이로 인한 투자에 따른 간접적인 경제 활성화도 일본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일본 재무성이 업계 설문을 통해 추정하는 경제 효과는 약 5000억엔(약 4조5000억원)에 달한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새로운 지폐 발행 전까지 금융기관의 ATM은 90% 이상, 철도 회사의 발권기와 대형 편의점, 슈퍼마켓의 계산대는 80~90%가 새로운 지폐가 사용 가능하도록 바뀌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새 지폐 발행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지만 일반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새 지폐가 나올 때마다 지긋지긋하게 벌어지는 ATM과 자판기 이용 불편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자판기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사람들이 흔히 이용하고, 편의점 ATM은 생활 필수품으로 여겨진다. 또 소규모 상점은 외부 발권기에서 티켓을 구입한 뒤에 입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당분간 구권과 신권을 같이 사용할 수 있지만, 외부 자판기의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채 신권만 있는 사람이 해당 식당을 이용할 때는 재난으로 느껴질 수 있다. 또 전국에 있는 221만여 대의 음료 자판기도 당장 새 지폐 사용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들 자판기의 경우 2021년부터 발행되고 있는 500엔 동전도 전체의 20~30%만 사용 가능할 정도다. 당분간 자판기 사용에는 불편이 따를 가능성이 높다.
새 지폐 발행에도 대기업 계열 등은 큰 문제가 없지만 걱정되는 부분은 발권기를 사용하는 중소 점포다. 일본 소규모 라면집의 경우 발권기에서 현금으로 원하는 음식을 주문한 뒤에 가게로 입장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러한 기기의 교체에는 1대당 60만엔 정도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큰 기기의 경우 통상 100만엔까지도 보는 분위기다. 비용이 문제가 되면서 이를 보조하는 지방자치단체도 나왔다. 대표적으로 도쿄도 가쓰시카구는 중소 점포를 대상으로 1대당 30만엔을 상한으로 교체 비용의 절반을 보조해주기로 했다.
보조금이라도 지급되는 곳이라면 괜찮지만, 본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점포의 경우 가능한 한 천천히 교체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새 지폐만 가지고 있는 고객이 발권기를 이용할 때는 점포에서 구권과 교환해 발권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새 지폐 사용에 맞춰 발권기를 없앤 뒤 현금을 아예 안 받는 ‘캐시리스(Cashless)’ 점포로 전환을 준비 중인 곳도 있다. 점포가 캐시리스 형태로 결제하게 될 경우 해당 업체에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내야 하고, 결제 대금도 한 달 정도 늦게 받는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당장 발권기 구입에 필요한 비용 약 200만엔이나, 교체에 필요한 약 100만엔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또 영업을 마친 뒤에 현금으로 들어온 하루 매출금을 정산하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아르바이트생의 조기 퇴근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인건비 절감 요인이 된다.
도쿄도 오타구에서 유료주차장인 ‘코인파킹’ 70여 곳을 운영하는 회사는 최근 캐시리스 결제만 가능한 코인파킹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용자들이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읽고 전용 사이트에서 신용카드나 전자화폐로 결제하는 방식이다. 자동정산기를 설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약 100만엔가량의 비용이 절감된다고 한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개인소비 중 캐시리스 결제 비중은 매년 증가해 지난해 39.3%로 10년 전(2013년)의 15.3%와 비교해 약 2.5배가 되었다. 특히 최근 몇 년은 코로나 감염 확대로 비접촉 결제 방식이 늘어난 데다 캐시리스 사업자의 적극적인 마케팅 영향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