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 어려움을 겪었던 일본 자동차산업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우선 ‘후진국’ 소리를 들었던 전기차(EV) 시장에 강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근 도쿄에서 열린 모터쇼에서 다양한 콘셉트 자동차를 공개하며 일본 자동차 업계가 그리는 EV의 미래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 30여 년 만의 엔저 여파로 올해 자동차 업계는 사상 최고 순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업계는 연구개발(R&D)과 함께 사업 구조조정을 준비하고 있다. 손실이 나는 부분을 과감히 정리하고, 이익을 낼 수 있는 사업에 투자를 강화한다는 포석이다.
일본자동차공업협회는 지난 10월, 4년 만에 도쿄 고토쿠 빅사이트에서 모터쇼를 개최했다. 코로나로 인해 잠시 중단됐던 모터쇼는 올해부터 ‘재팬모빌리티쇼(Japan Mobility Show)’로 이름을 바꾸고 차와 생활이 어우러지는 미래 모습을 그려냈다. 특히 2019년 마지막 모터쇼 때 192개 업체가 참가했는데, 이번에는 참가 업체 수가 2배가 넘는 475곳으로 크게 늘었다. 10월 26일 공식 개막해 11월 5일까지 이어진 행사에는 국내외에서 111만2000여명이 방문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올해 모터쇼에서 주목받은 부분은 ‘전기차 후진국’ 일본이 다양한 전기 콘셉트카를 선보였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토요타는 전기 콘셉트카로 ‘FT-3e’와 ‘FT-Se’를 공개했다. FT-3e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스타일로 심플한 디자인을 강조했다. 레이싱팀 ‘토요타 가주 레이싱’을 운영하는 토요타는 레이싱팀과 협력해 개발한 고성능 전기 스포츠카 타입인 FT-Se도 선보였다.
이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소형 미니밴 스타일의 ‘카요이바코’였다. 사용 목적에 따라 내부뿐 아니라 외부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이 차량의 특징이다. 직사각형모양이라 길게 또는 짧게 차량을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게 토요타 측의 설명이다.
혼다는 소니와 공동으로 개발한 전기차 아필라와 함께 다양한 크기의 전기차 콘셉트 모델을 공개했다. 단거리 운행에 적합한 2인승 전기차 ‘CI-MEV’와 다목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소형 미니밴 ‘N-Van E’가 전면에 등장했다. ‘N-Van E’는 혼다가 자랑하는 경차인 N-박스(엔박스)를 활용해 제작됐다. 이번 프레스 행사에서 혼다는 ‘라스트 마일’을 강조했다. 이는 전기차로 이동한 뒤에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길 등을 전기바이크를 타고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보인 것이 ‘서스타니아-C(Sustania-C)’ 전기 콘셉트다. 소형 해치백 스타일의 이 차량은 차체를 아크릴수지로 만들어서 친환경적이고 재활용도 가능하게 했다. 여기에 혼다는 ‘포켓 콘셉트’라는 이름의 소형 전기오토바이를 붙여 라스트 마일을 완성했다. 닛산은 전기 미니밴·SUV 콘셉트를 통해 전기차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하이퍼 투어러 EV’로 이름 지어진 닛산의 미니밴 콘셉트는 앞좌석이 360도 돌아가기 때문에 자율주행 모드를 작동하면 앞뒤 승객이 서로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일본은 아직 전기차 판매가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전체 승용차 판매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자국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기차 출시가 더뎠지만, 일본 ‘빅3(토요타·혼다·닛산)’는 당장이라도 미국과 유럽 시장을 겨냥해 잇달아 신차를 선보이겠다는 각오다.
일본 자동차업계가 전기차 신차 출시를 선언하며 자신감을 보이는 바탕에는 이들이 올해 거두게 될 막대한 이익이 있다. 이익의 가장 큰 배경은 엔저다.
대표적으로 토요타의 경우 연간(2023년 4월~2024년 3월) 영업이익으로 4조5000억엔(약 40조4000억원)을 제시했다. 애초 예상했던 3조엔보다 1조5000억엔 더 높아진 숫자다. 토요타가 예상 실적을 달성할 경우 일본 기업 중에서 최초로 영업익이 4조엔이 넘는 회사로 기록된다. 기존 전망치를 수정한 배경에는 환율 효과가 톡톡히 자리하고 있다. 지난번 실적 전망 때보다 환율로 인한 영업이익 증가 효과가 1조1800억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 것이다. 영업이익 수정 전망 1조5000억엔 중 80%가 환율효과라는 설명이다. 또 판매 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 팬데믹으로 문제가 됐던 반도체 공급이 정상화하면서 올해 4~9월 토요타·렉서스의 글로벌 판매 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증가한 517만대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혼다와 닛산도 마찬가지다. 혼다는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를 기존 1조엔에서 1조2000억엔으로 상향 조정했다. 닛산 또한 5500억엔이던 영업익 전망치를 6200억엔으로 높였다. 올해 일본 자동차업계가 역대급 실적을 예고하면서 사업 재편과 R&D 등도 동시에 시작됐다. 적자가 나는 사업을 정리하고, 이익 나는 사업을 중심으로 R&D를 확대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대표적인 사업 재편 대상은 중국이다. 미쓰비시자동차는 지난 9월 중국에서 자동차 생산을 중단한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미쓰비시는 중국에서 광저우자동차그룹(GAC)과 공동으로 출자해 공장을 운영 중인데, 중국 내 전기차 인기에 밀려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로 더 이상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중국에서는 전기차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중국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상승했고, 가솔린과 하이브리드 차량에 집중해온 일본계 기업이 만든 자동차의 인기는 하락했다. 이에 따라 토요타는 중국 내 계약직 근로자들을 해고했고 혼다와 닛산은 중국 공장의 생산량을 줄였다. 대신 이들은 동남아시아에 투자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 토요타의 경우 인도네시아에 연초 2400억원을 투자해 자동차 공장을 증설하기로 한 데 이어, 최근에는 필리핀에 1000억원 규모 투자 확대도 결정했다. 또 토요타는 순수 전기차에 힘을 실으며 배터리에 대한 투자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건설 중인 차량용 배터리 공장에 약 80억달러(약 10조8500억원)를 추가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전기차의 본격적인 공급을 앞두고 배터리 조달 능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이다. 이를 통해 토요타는 미국에서 자사 생산도 강화하고, 한국 LG에너지솔루션에서 리튬이온 배터리도 공급받을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