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여름, 서울 강북의 한 특급호텔에서 진풍경이 펼쳐졌다. 에르메스 제품을 반값에 판매하는 ‘에르메스 프라이빗 세일’이 진행된 이날, 평일 오전임에도 행사장 입구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한 손에 초청장을 든 이들은 대기시간이 30분을 넘어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이들이 손에 쥔 초청장은 주최 측이 에르메스 고객 중 VVIP에게만 발송한 것. 이른바 대한민국 1%가 줄지어 입장한 행사장 안은 더 진풍경이다. 한눈에도 수십만,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제품을 양손에 쥔 이들이 하나라도 더 고르려고 손을 뻗었다. 도대체 왜, 그리고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걸까. 과연 ‘Made in Korea’도 VVIP를 대상으로 이러한 진풍경을 연출할 수 있을까. 글쎄… 라며 웃어넘기던 시대는 지났다. 이미 전 세계 시장에서 한국판 명품의 태동이 시작됐다.
Part 1중국 품고 선진시장으로
빈폴ACC
국내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그 어느 해보다 활발하다.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국내 시장에 한계를 느낀 업체들이 하나 둘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 중국 등 아시아 시장 공략이 화두였다면 이제는 미국, 유럽 등 선진시장으로 영역이 확대됐다.
우선 대기업 계열사인 제일모직은 ‘헥사바이구호’로 미국 뉴욕에서 컬렉션을 진행하는 등 움직임이 활발하다. 올해 신사복 갤럭시의 해외 컬렉션 라인 ‘GX1984’를 유럽에 론칭했고, 중국에서는 ‘라피도’ ‘빈폴’ ‘갤럭시’ ‘엠비오’ 등을 순차적으로 론칭했다. 특히 올해 21살이 된 ‘빈폴’의 성장세가 무섭다. 초창기엔 미국 유명 브랜드 ‘폴로’와 콘셉트가 비슷해 아류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젠 ‘폴로를 뛰어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가을 뉴욕의 편집매장 ‘오프닝 세리머니(이하 O.C.)’에 입점한 빈폴은 뉴욕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디자인한 빈폴 맨즈 상품을 O.C의 뉴욕과 LA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올봄 시즌에는 미국 내 대표적 백화점인 바니스 뉴욕이 운영하는 편집매장 ‘바니스 코옵’과 인터넷몰 ‘바니스닷컴’에도 입점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빈폴은 미국에서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영국 등 유럽 패션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LG패션은 중국에 ‘라푸마’ ‘TNGT’ ‘마에스트로’ ‘헤지스’ 등을 진출시키면서 대륙 공략에 나섰다. 라푸마는 중국과 합작법인이며 헤지스는 라이선스, 나머지 두 브랜드는 직접 진출했다. 여성복 브랜드도 ‘모그’에 이어 ‘바네사브루노 바이 아떼’의 중국 판권을 확보해 성공적인 진출을 노리고 있다.
SK네트웍스는 ‘오즈세컨’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한다. 10월부터 영국 백화점 ‘하비니콜스’와 터키 ‘하비니콜스’, 싱가포르 멀티숍 ‘클럽21’, 일본 백화점 ‘이세탄’ ‘바니스 뉴욕 재팬’, 일본 멀티숍 ‘유나이티드 애로우’ 등 매장 오픈이 예정돼 있다. SK네트웍스는 이 같은 사업 확대를 통해 2015년까지 매출 1조5000억원을 달성할 계획이다.
남성복 ‘지오지아’로 중국 시장에 진출한 신성통상은 중국에서만 약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지 업체와 합작사 설립 등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캐주얼 브랜드 잠뱅이도 여성 캐주얼 ‘제이어퓨(J afew)’로 중국 시장에 진출한다. 중국 현지에서 기획된 제이어퓨는 중국식 수주 시스템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아웃도어 업체 블랙야크는 올해 중국 진출 20주년을 맞았다.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도시 30곳에 직영매장과 200여개 대리점을 운영 중이다. 블랙야크는 ‘2015년 아웃도어 부문 글로벌 TOP5 브랜드’ 육성을 위한 비전을 선포하고 해외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선 2015년까지 중국 내 매장을 800개까지 늘릴 예정이다. 지난 8월에는 국내 아웃도어 업계 최초로 네팔에 매장을 오픈했다. 내년엔 유럽시장에 도전할 계획이다.
국내 1세대 디자이너 슈즈 업체 세라제화는 ‘세라’와 라이선스 ‘바비 슈즈’로 해외 공략을 강화한다. 세라제화는 현재 일본의 한큐, 세이부 백화점 등에 6개 매장이 입점해 있다.
내년에 창업 25주년을 맞는 국내 시계업체 ‘로만손’은 1990년부터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현재 중동의 두바이, 이스탄불, 모스크바를 비롯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 CIS 국가에서 위치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지난해 선보인 프리미어라인 ‘아트락스’는 출시 3개월 만에 완판됐고, 3차 리오더까지 들어갔다. 해외시장에서는 지난해 주문된 전량이 판매됐다.
타이틀리스트 골프공 생산공정
오즈세컨
블랙야크 BBG클라이밍
세계 명품 브랜드 K머니 러브콜
최근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베르사체’가 국내 기업에 지분 40%를 인수해 달라고 러브콜을 보냈다. 베르사체는 한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한 뒤 상장하겠다는 방안이다. 이탈리아의 스포츠의류 브랜드 ‘움브로(Umbro)’와 명품 가방 ‘콜한(Cole Haan)’도 경영권을 인수해줄 한국 기업을 찾는다고 고백했다. 유럽 자금 사정의 심각성이 대두되며 한국 기업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국내 기업의 글로벌 명품 브랜드 인수는 이제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그동안 휠라코리아는 ‘타이틀리스트’ ‘풋조이’ 등을 보유한 미국 골프용품업체 ‘아큐시네트’를 인수했고, 이랜드는 이탈리아 가방 브랜드 ‘만다리나덕’을, 제일모직은 이탈리아 악어백 브랜드 ‘콜롬보 비아 델라 스피가(이하 콜롬보)’ 지분을 100% 사들였다. 이들 인수 브랜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국내 기업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는 전 세계 시장의 69%를 점유한 1위 업체다. 제일모직의 ‘콜롬보’는 에르메스보다 가격이 높은 하이엔드 제품이다. 뷰티업계에선 국내 1위 기업 아모레퍼시픽이 지난해 8월 프랑스 향수 브랜드 ‘아닉구딸’을 인수했다. 럭셔리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고 아시아 등 글로벌 시장 확대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최근엔 이랜드가 프랑스 아웃도어 브랜드 라푸마 그룹 본사와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란 소식이 전해졌다. 라푸마 그룹은 ‘라푸마’ ‘밀레’ ‘아이더’ 등의 아웃도어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그 중 라푸마 브랜드의 국내 상표는 LG패션, 아이더는 K2코리아가 인수했고, 밀레는 밀레 한국지사가 국내와 중국 상표권을 모두 인수한 상황이다.
글로벌 패션 공룡 꿈꾼다 박성철 신원 회장
1973년 설립 이후 ‘신원’은 여성복 브랜드 베스띠벨리, 씨, 비키, 이사베이와 남성복 브랜드 지이크, 지이크파렌하이트, 반하트 디 알바자 등 국내 정상급 패션브랜드를 꾸준하게 선보이고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여성복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면 최근에는 남성복 부문이 더욱 강해졌다.
특히 이탈리아, 한국 등에 글로벌 브랜드로 전개하고 있는 남성복 ‘반하트 디 알바자’는 이미 밀라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최근에는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현지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신규 여성복 브랜드 개발을 준비 중에 있다.
신원의 박성철 회장은 지난 2월부터 국내 100개 기업 CEO들의 모임인 ‘명품 창출 포럼’의 초대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국내 독립브랜드 론칭과 함께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 인수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신원은 패션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한국산 명품을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중국 시장에 3년 내 1000개 매장을 낸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노스페이스 브랜드 경험 살려 자체브랜드로 일군다성기학 영원무역·골드윈코리아 대표이사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인 노스페이스를 국내에 전개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원무역’은 창업 이래 38년 동안 세계적인 아웃도어와 스포츠제품 분야에 전념해 온 숨은 강자다. 현재 방글라데시, 중국, 베트남, 엘살바도르 4개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력 시장에서의 서비스 증대와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해 세계 9개국에 해외사무소를 구축해 글로벌 경영체제를 확립했다. 고어텍스(Gore-Tex) 등 전문 기능성 소재와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CWS기술(무봉제 생산기술)로 다양한 제품을 자체 디자인해 세계적 브랜드에 판매하고, 관련 산업인 염색 및 패딩 공장을 가동함으로써 수직 계열화를 구축함과 동시에 신발 제조, BackPack제품 생산 등 사업 다각화를 통한 지속적인 성장 추구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의 바이어들로부터 높은 신뢰도를 갖고 있는 기업이다.
한국산 하이힐 세상과 통하다이보현 슈콤마보니 대표
슈콤마보니는 한국 1세대 슈즈 디자이너 이보현이 만든 브랜드로 2003년 론칭해 2012년 현재 해외 19개국의 50개 이상 편집숍에서 유통되고 있다. 슈콤마보니의 해외컬렉션 라인은 럭셔리브랜드를 취급하는 매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2011년 영국 해로즈 백화점에서 전시를 가진 바 있으며 파리의 쁘렝땅 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공수한 최고급 가죽을 사용한 핸드메이드 슈즈브랜드로 퀄리티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청담동 골목길 작은 매장에서 시작된 슈콤마보니는 국내 마니아층이 형성된 이후 홍콩, 싱가포르, 일본 등 아시아에 이어 파리의 Tranoi와 Premiere Classe, 미국의 Sole Commerce 등과 같은 국제 Trade Show에 매 시즌 참가하며 세계 시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무대 뒤 히든 챔피언 모습을 드러내다박은관 시몬느 회장
25년 넘게 수많은 글로벌 명품핸드백 브랜드와 협업해 핸드백을 제작해온 ‘시몬느’의 자체 제작브랜드 ‘0914’를 가지고 무대 위로 오른다. 코치, 마이클 코어스, 마크제이콥스, DKNY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의 수많은 핸드백들은 시몬느가 제안한 디자인을 채용해 직접 제작됐다. 시몬느는 현재 미국 유명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핸드백 물량의 약 40%를 제작하고 있고 미국 3대 디자이너 브랜드 핸드백 물량의 대부분을 소화하고 있다. 연간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매출 규모만 4억달러에 이른다. 시몬느는 이러한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자체 브랜드를 통해 세계 시장을 노크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조류인 합리적인 가격의 어포더블 브랜드로 명품시장의 중심지인 유럽과 미국 시장부터 진출할 계획이다.
[안재형·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