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연간수익률은 2%로 나타났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4%대 예·적금 상품이 등장하는 시점인지라 퇴직연금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장기 5년과 10년으로 기간을 넓혀도 연 환산 수익률은 각각 1.96%, 2.39%를 기록하며 2% 안팎에 그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지난해 물가상승률(2.5%)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실상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예정된 만큼 퇴직연금의 상대 수익률은 더욱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낮은 가장 큰 이유로 꼽히는 주요 원인은 예·적금이나 보험상품과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 중심의 운용 방식 때문이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의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전체 적립금(295조6000억원) 중 86%를 차지했다. 지난해 원리금 보장형 수익률은 1.35%에 그쳤다. 반면 펀드나 주식 투자 등의 방식으로 돈을 굴리는 실적배당형(원리금 비보장형)의 수익률은 6.42%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글로벌 유동성 완화 기조의 수혜로 주식 시장이 호황을 보였기 때문이다.
국내 부진한 퇴직연금 수익률은 해외 연금선진국과 비교된다. 미국은 지난 1981년 ‘401K’라는 이름의 퇴직연금을 도입했다. 10년간 연평균 8.6%라는 높은 수익을 자랑한다. 호주 퇴직연금을 말하는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7.7%다. 이에 반해 한국의 퇴직연금 10년 수익률은 2.7%에 그쳤다. 두 국가의 높은 수익률의 비결로는 자유로운 운용과 디폴트옵션의 도입이다. 미국은 사업자가 원금 손실로 인한 책임 추궁을 피할 필요가 없어 예·적금 위주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보다 위험 추구형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단 적격디폴트투자상품(QDIA·Qualified Default Investment Alternative)을 지정해 디폴트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무책임한 투자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했다.
호주는 ‘마이슈퍼’라는 이름의 디폴트옵션을 2009년 도입했다. 마이슈퍼는 지난해 9월 기준 총 3조4000억호주달러(약 3000조원) 규모로 호주 퇴직연금 시장 중 27.1%에 이른다. 옆 나라 일본의 경우 미국, 호주와 달리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에 포함해서 운영했다. 이렇게 되자 원금 손실을 우려한 가입자들이 원리금보장상품으로 몰리면서 10년 평균 수익률이 5.5%로 미국이나 호주보다 현저하게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수익률에 비해 2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증권사 적립금 확대… DC형 수익률은 부진
올해 2분기 증권사 퇴직연금 적립금은 전 분기보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올 2분기 기준 14개 증권사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65조4824억원으로 집계됐다. 전 분기 64조6771억원보다 8053억원 늘어난 수준이다.
그중 삼성증권은 2분기 적립액이 1832억원 늘어나며 증권사 중 가장 많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어 한국투자증권 1514억원, 미래에셋증권 1338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삼성증권의 경우 확정급여형(이하 DB형) 퇴직연금 부문에서만 적립금이 1113억원 늘었다. 한국투자증권과 미래에셋증권은 개인형 퇴직연금(이하 IRP형) 부문에서 적립금이 2124억원, 2137억원씩 증가해 강세를 보였다. 다만 2분기 주식 시장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원리금 비보장형 적립금은 큰 폭으로 빠졌다. 특히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이 높은 미래에셋증권의 경우 확정기여형(이하 DC형) 퇴직연금 중 원리금 비보장형 적립금이 2193억원 줄어들기도 했다.
올 2분기 증권사들의 원리금 비보장형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부진했다. 국내 14개 증권사의 DC형 퇴직연금과 IRP의 원리금 비보장형 평균 수익률은 각각 -13.5%, -12.7%로 나타났다. 전 분기는 각각 -1.2%, -0.05% 수준이었다. 증시가 급락으로 실적배당형 상품 수익률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국내 보험사들의 퇴직연금 수익률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 2분기 DC형과 IRP형 부문에서 대폭 악화된 수익률을 기록했다. 생보사 중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의 DC형 수익률은 각각 –0.61%와 –2.08%로, 마이너스 전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2분기 수익률은 증시호황에 힘입어 각각 4.59%, 6.51%를 기록한 바 있다. 이 외에 신한라이프와 푸본현대생명도 각각 –0.81%, -0.06%를 기록하며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특히 미래에셋생명은 –2.92%를 기록하며 꼴찌를 기록했다.
▶보험사 장기 수익률까지 내림세
손보사의 경우 삼성화재와 KB손해보험이 각각 0.52%, 0.17%를 기록하며 1% 이하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 기간 DB손해보험(1.45%)과 롯데손해보험(1.48%)은 1% 수준을 보였으며, 한화손해보험(2.18%)만이 유일하게 2%대를 기록했다.
IRP의 경우 삼성생명(-0.77%)과 교보생명(-2.59%), 미래에셋생명(-2.66%), KDB생명(-9.97%) 등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손보사 중에서도 DB손보(1.1%)와 롯데손보(1.61%)를 제외하고 모두 0%대 수익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동기 손보업계의 IRP 평균 수익률은 2.13%였다.
문제는 보험업계의 장기수익률도 하락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올해 2분기 17개 보험사의 DB형 10년 평균 수익률은 2.34%로, 지난해(2.50%)보다 0.16%포인트 하락했다. 회사별로 보면 KDB생명(-0.38%포인트), DB생명(-0.34%포인트), IBK연금보험(-0.3%포인트)의 감소 폭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 이어 푸본현대생명(-0.29%포인트), 동양생명(-0.28%포인트), 현대해상(-0.27%포인트), 한화·교보생명(-0.26%포인트), 삼성화재 및 DB·KB손해보험과 흥국생명이 0.25%포인트 하락했다. 상대적으로 신한라이프는 0.18%포인트만 떨어지며, 업계에서 가장 낮은 내림세를 기록했다. DC형의 경우 2분기 10년 평균 수익률은 2.8%로 1년 전(2.9%)보다 0.1%포인트 떨어졌다.
DC형의 경우 KDB생명(0.18%포인트), 미래에셋생명(0.14%포인트), KB손보(0.03%) 등 3개 사만 전년 대비 소폭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와 반대로 IBK연금보험(-0.26%), 푸본현대생명(-0.24%), DB손보·DB생명(-0.19%), 현대해상(-0.18%), 한화손해보험(-0.17%) 등이 내림세를 보였다.
반면 IRP는 DB·DC형과 다르게 전반적으로 수익률이 개선됐다. 지난해 개인 IRP 10년 수익률 확인이 불가능한 한화손보를 제외한 16개 사의 평균 수익률은 2.5%였다. 이는 1년 전(2.39%)보다 0.1%포인트 오른 수준이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주로 채권 등에 투자하는 만큼 저금리 장기화로 수익률이 높지 않아 내림세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며 “금리가 상승하는 시점인 만큼 수익률은 점차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은행권도 마이너스 수익률… 농협은행 선방
국내 주요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수익률이 올해 2분기 마이너스대로 떨어졌다. 올해 2분기 국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은행)이 운용하는 퇴직연금 중 DC형과 IRP형의 평균 수익률이 각각 –0.7%, -2.66%로 추락했다. DB형의 경우 평균 수익률이 1.10%로 간신히 마이너스를 면했다. 그러나 이는 은행권 3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2.50~3.20%)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은행별로 보면 DC형은 신한은행이 –1.13%, IRP형은 하나은행이 –3.46%로 가장 저조했다. 시중은행 중에서 농협은행의 DC형(-0.15%)과 IRP(-1.74%)형은 수익률이 평균을 웃돌면서 상대적으로 선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5대 시중은행의 DC형과 IRP형 수익률은 지난해 4분기를 기점으로 내림세를 기록하고 있다. DC형 수익률의 경우 2021년 1분기 3.81%에서 ▲2분기 3.29% ▲3분기 2.5% ▲4분기 1.85%에 이어 올해 1분기에는 0.9%를 기록해 지속해서 수익률이 하락했다. IRP는 DC형보다 내림세가 더 두드러졌다. 지난해 1분기 5.24%에서 2분기 4.5%로 소폭 감소하는 흐름을 보이다 3분기엔 두 배 가까이 되는 8.78%까지 올랐다. 그러나 4분기 2.25%로 감소했다가 올해 1분기에는 0.43%로 주저앉았다. DC형과 IRP형 퇴직연금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건 원리금 비보장형 상품 수익률이 크게 하락한 이유에서다.
지난 7월 12일부터 디폴트옵션이 시행되면서 각 퇴직연금 사업자는 수익률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전까지는 퇴직연금의 안정성을 위해 위험자산의 투자 한도를 70%로 한정했다. 하지만 제도가 시행되면서 오롯이 100%를 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디폴트옵션 도입으로 사업자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라며 “수익률은 물론 고객 유치를 위한 마케팅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