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 토라(もしトラ·혹시 트럼프)가 현실이 됐다.”
11월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일본 열도에도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혹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미를 담은 모시 토라가 지난해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모시 토라는 ‘호보토라(ほぼトラ·거의 트럼프)’를 넘어 ‘모우토라(もうトラ·이미 트럼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 정부는 내심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당선을 바랐다. 바이든 정부에서 미·일 동맹 관계가 한층 격상된 데다, 민주당 정권의 안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가 빈번한 일본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트럼프의 돌출행동 등을 지진이나 화산 폭발에 비유할 정도로 불편해한다.
트럼프 시대를 다시 맞으면서 일본 정부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조기 정상회담을 포함해 다양한 방안으로 일단 트럼프 환심 사기에 나서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부터 트럼프 당선을 염두에 두고 외교 라인업을 강화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0월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는 외교라인에 대대적인 변화를 줬다.
핵심은 미국에 둔 두 명의 대사를 모두 외무성의 정통 ‘미국통’으로 바꾼 것이다. 야마다 시게오 외무심의관은 주미 일본대사, 야마자키 가즈유키 전 외무심의관은 주유엔 일본대사로 각각 발령냈다.
야마다 대사는 주미 공사와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국 외교 업무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인물이다. 지난해 기시다 총리가 인도에서 폴란드를 거쳐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했을 당시 은밀히 관련 계획을 실행한 인물로 업무 능력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외무심의관의 경우 차관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미 일본 대사 내정은 이례적인 조치로 평가받고 있다. 기시다 전 총리가 트럼프 당선을 대비해 직접 야마다 대사의 전진 배치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마다 대사가 이끄는 주미 일본대사관은 지난해 트럼프 당선인과 관계가 가까운 로비 기업 ‘발라드 파트너스’를 포함해 3곳과 새로 계약을 체결했다. 또 연간 로비 활동 금액도 전년보다 13% 늘린 700억원 가까이 지출했다.
발라드 파트너스는 2016년 미 대선 당시 플로리다주의 트럼프 후보 선거모금책을 맡는 등 트럼프 전 대통령과 30년 가까이 교류해 온 브라이언 발라드가 대표를 맡고 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018년 발라드를 트럼프 정권에서 가장 강력한 로비스트라고 평가했다.
야먀자키 대사는 트럼프 1기 때 외무심의관을 맡아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정통한 인물이다. 지난 2018년 6월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는 G7 정상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트럼프 당선인 옆에서 얼굴을 내민 사진이 찍혀 그의 존재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두 명의 신임 대사가 합작한 작품이 지난 4월 있은 기시다 전 총리의 미국 국빈 방문, 그리고 이어진 아소 다로 자민당 최고 고문과 트럼프의 면담이었다. 현직 대통령에게 ‘메이와쿠(민폐)’가 되지 않으면서 차기 대통령 가능성이 큰 트럼프와의 관계 구축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아소 고문은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함께 트럼프 1기 때의 정상회담과 골프 회동에 모두 배석한 인물이다. 아베가 떠난 지금 트럼프가 얼굴을 아는 유일한 일본 정치인이기도 하다.
총리를 지냈던 스가 요시히데 자민당 부총재의 움직임도 정교하다. 스가 부총재의 ‘절친’으로 불리는 미국 인사는 트럼프 신정부에서 국무장관 등으로 거론되는 빌 해거티 상원의원이다.
2017년부터 2년간 주일대사를 지냈던 해거티 의원은 당시 관방장관이던 스가 부총재와 업무 파트너 이상의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앞으로 그는 일본과 트럼프 행정부를 연결해주는 가장 든든한 핫라인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 2기를 맞으면서 일본 정부가 우려하는 것은 크게 방위 부문과 무역 부문 두 가지다. 트럼프 당선인은 동맹국과의 관계에서 가치보다는 ‘돈’을 우선시하는 스타일이다. 이를 고려할 때 일본에 방위비나 주일미군 주둔비용 증액을 요구하며 압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2022년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3개 안보문서를 개정하면서 국내총생산(GDP) 1% 수준인 방위 관련 예산을 2027회계연도에 2%로 늘리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GDP 대비 2%를 방위비로 지출한다는 것에 대해 “2%는 세기의 도둑질이다. 3%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을 보면 현재 일본의 방위비 증액이 트럼프 당선인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주일미군 주둔비용 증액도 트럼프 당선인이 일본 정부에 다시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트럼프 1기에서도 비용 인상을 요구했다. 현재 주둔비용 부담에 대한 미일 양국 특별 협정은 2027년 3월까지 유효하지만 이를 전면 백지화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방위 문제와 관련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주장해 온 아시아판 나토 창설과 미·일지위협정 개정 등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아시아판 나토는 트럼프 당선인이 나토에 부정적인 점을 고려하면 논의 자체가 쉽지 않아 보인다. 미·일지위협정 개정 또한 미국과 마찰을 키울 수 있는 부분이라 일본 내부에서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고 보는 분위기다.
경제 분야에서도 일본이 갖는 부담은 상당하다. 일본은 지난해 미국에 712억달러(약 100조원)의 무역흑자를 거뒀다. 트럼프 당선인 1기 때에도 무역 적자 해소를 중심 정책에 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에 대한 압박이 커질 수 있다.
여기에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 내 전 수입품에 10~20%의 관세를 부과하고, 제품별로도 추가 관세를 적용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중국산 수입품의 경우 최대 60%의 관세를 물린다.
이러한 고관세 정책에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미국은 연간 1500만대의 자동차가 판매되는 중국 다음의 세계 2위 시장이다. 이를 잡기 위해 전 세계 자동차 업체가 미국 본토 또는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의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멕시코 등에 공장을 집결시켜왔다. 올해 상반기 미국 내 차량 부품 수입의 41%를 멕시코가 차지할 정도다.
지난 바이든 정부 때 미·중 간 대립으로 완성차 업계는 중국 대신 멕시코 투자를 늘려왔는데 트럼프의 당선으로 역풍을 맞게 될 전망이다.
미국 컨설팅업체 알릭스파트너스는 수입 부품에 고관세가 부과될 경우 미국서 생산되는 차량의 대당 비용은 최대 4000달러(약 560만원) 늘어날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서 연 1000만대가량 차량이 생산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미국 내 자동차 생산 비용이 연간 6조엔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특히 부담되는 곳은 일본 자동차 업계다. 트럼프 당선인은 멕시코 이민자를 막겠다며 멕시코에 최대 관세 100%를 부과하겠다고 주장해왔다. 이 정책이 실현되면 미국과의 접근성, 비용 절감을 위해 멕시코에 생산 거점을 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힘든 상황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자동차업계뿐 아니라 일본제철의 상황도 좋지 않다. 일본제철은 지난해 12월 미국 대표 철강기업인 US스틸을 141억달러(약 19조710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심장’을 일본 기업이 사려 한다는 비난에 전미철강노동조합(USW)의 반발도 겹치면서 인수 작업은 현재 난항을 겪고 있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에 대해 “무조건 막겠다”고 강하게 언급한 상황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지난 7월 일본제철은 트럼프 당선인 1기 때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 당선인이 2기 행정부 인선에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와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을 배제한다고 밝혀 일본제철의 상황은 더욱 곤란하게 됐다. 하지만 일본제철에서 US스틸 인수 업무를 담당하는 모리 다카히로 일본제철 부회장은 올해 12월 말까지 US스틸 인수 완료 계획과 관련해 “미국 대선이 종료돼 냉정하게 논의할 환경이 됐다”면서 “무언가 큰 판단이 없는 한 틀림없이 완료할 수 있다. 인수 심사는 현 미국 정권에서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정치성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이 선거 전 수차례에 걸쳐 인수 계획에 반대 의사를 명확하게 밝힌 상황이라, 실제 인수가 성사될지는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최근에도 “(US스틸을 일본제철에) 팔게 놔두지 않겠다. 좋은 거래일지 몰라도 상관없다”라며 “내가 그곳(백악관)에 도착하기 전에 거래가 완료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모리 부회장은 트럼프 당선인의 반대에 대해 최대한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 건은 외국의 투자를 유치한다는 트럼프 당선인의 방침에 지극히 가까운 안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승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