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 2년 전 큰 그림 적중, ICT 기업 변신… 미래 모빌리티 선제적 투자
안재형 기자
입력 : 2019.10.28 14:11:20
수정 : 2019.11.03 08:16:51
지난 9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취임 1년을 맞았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에선 ‘정의선식(式)’ 혁신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대기업 최초로 신입사원 정기 공개채용 제도를 폐지한 데 이어 임·직원들의 복장 완전 자율화도 실행에 옮겼다. 현대차를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탈바꿈 시키려는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이 기업 내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과감한 혁신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미래 모빌리티, 제대로 하겠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18 현장에서 국내 기자들과 만난 정의선 당시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제대로 하겠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과 품질을 지닌 자동차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움켜쥐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정 부회장의 화두는 자율주행과 커넥티드카, 수소연료전기자동차(FCEV) 등 미래차였다. 정 부회장은 “차가 전장화되면서 정보통신기술(ICT) 업체가 아닌 우리(현대차)도 ICT 업체처럼 변해야 한다”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일하는 방식과 의사결정 속도 등 모든 게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차그룹 내부에선 당시 정 부회장이 밝힌 “우린 ICT 기업보다 더 ICT 기업처럼 변해야 한다”는 일성이 곧 현대차그룹의 방향성이라고 말한다. 현대차그룹은 CES2018에서 미국 자율주행 전문 스타트업인 오로라(Aurora)와 2021년까지 ‘레벨4’ 수준의 기술개발을 위한 글로벌 동맹을 맺었다.
▶총괄 수석부회장 취임 전부터 진행된 협업과 합종연횡
“자동차 제조업의 추격자가 아닌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시장 판도를 주도하는 게임체인저로 도약하겠다.”
지난해 9월 총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한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올 1월 신년사에서 게임체인저로의 도약을 선언했다. 자동차 업계는 지난 9월 현대차그룹이 발표한 미국 앱티브(APTIV)사(社)와의 자율주행차 개발전문 미국 합작법인 설립 소식을 놓고 “정 수석부회장의 신년사가 해가 바뀌기도 전에 가시화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글로벌 자율주행기술을 선도하는 개척자가 되겠다는 또 다른 선언”이라며 “지금까지 현대차그룹의 투자금액 중 최대라는 게 그 증거”라고 분석했다. 앱티브와의 합작회사 설립에 현대차그룹은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가 현금 16억달러(약 1조9100억원), 자동차 엔지니어링 서비스, 연구개발 역량, 지적재산권 공유 등 4억달러(약 4800억원) 가치를 포함해 총 20억달러(한화 약 2조3900억원)를 출자한다. 앱티브는 자율주행기술과 지적재산권, 700여 명에 달하는 자율주행 솔루션 개발 인력 등을 출자한다. 매년 약 4조원을 쏟아붓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양사의 신설 합작법인은 2022년까지 완성차 업체와 로보택시 사업자 등에 공급할 자율주행 플랫폼 개발을 완료하고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또 기존 앱티브의 자율주행 연구거점 외에도 추가로 국내에 자율주행 연구소를 마련해 세계적인 자율주행기술력이 국내에 확산되는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합작법인 설립을 통해 운전자의 개입 없이 운행되는 레벨 4, 5(미국자동차공학회 SAE 기준) 수준의 자율주행차를 조기에 선보여 시장을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목표대로 오는 2022년까지 완전자율주행기술을 확보할 경우 현대차그룹과 한국 자동차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0월 22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강당에서 ‘타운홀 미팅’을 열고 직원들과 소통하고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
사실 자동차, IT업계는 자율주행기술 확보를 놓고 사활을 걸고 있다. 누가 먼저 기술을 개발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산업의 선도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치열한 경쟁을 이끌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자율주행 개발을 위한 합종연횡이 진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합작법인 설립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탄탄한 자율주행차 개발 진영을 구축하게 됐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미국의 인텔(통합제어기 센서)·메타웨이브(고성능 레이더)·P.오토마타(인공지능)·오로라(자율주행 개발)·중국 바이두(자율주행 개발)·이스라엘 옵시스(고성능 레이더)·러시아 얀덱스(로보택시 시범사업) 등과 손잡고 완전자율주행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앱티브까지 합치면 총 8개사에 이른다.
업계에선 최근 현대차그룹의 공격적인 투자행보를 놓고 “정 수석부회장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투자 규모가 크더라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라면 어느 시기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의 한 관계자는 “총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자기 색을 분명히 한건 지난해부터지만 사실 2년 전인 2017년 말부터 세계적인 기업과의 협업과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진행됐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의 전략적 협업과 투자 현황을 살펴보면 2017년 이전의 협업은 2016년 4월 미국의 시스코와의 커넥티드카 관련 시스템 개발이 유일하다. 총괄 수석부회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그룹이 나아갈 방향을 ICT 기업으로 정하고 미래차 분야에 투자를 진행했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의 과감한 투자로 한국 자율주행 기술력의 도약이 기대된다”며 “AI나 5G 통신 등과 연계하면 국내 관련 산업의 동반성장도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文대통령 “수소차 1위, 전기차 세계 수준
친환경차에 박수 보낸다”
지난 10월 15일 현대차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미래차 산업 국가 비전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세계 최고의 전기차·수소차 기술력을 입증했다”며 “2030년까지 미래차 경쟁력 1등 국가가 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현대차는 1997년부터 친환경차 연구개발에 돌입해 세계 최초로 수소차 양산에 성공했다”며 “현대차의 친환경차 누적 판매량 100만 대 돌파는 이곳 연구원들의 공이 크다. 대통령으로서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율주행을 상용화하겠다”면서 “주요 도로에서 운전자의 관여 없이 자동차 스스로 운행하는 완전자율주행 상용화로 목표를 높였다. 목표 시기도 2030년에서 2027년, 3년 앞당겨 실현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만나 미래 전략 발표를 들었다. 문 대통령이 정 수석부회장을 만난 건 취임 후 11번째, 올해 들어서만 7번째다.
정 수석부회장은 “가까운 미래에 도로 위 자동차를 넘어 UAM(Urban Air Mobility·도심 항공 모빌리티), 라스트마일 모빌리티, 로봇 등 다양한 운송수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다양한 시장 참여자들과 상생하는 모빌리티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화성에 자리한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 열린 ‘미래차산업 국가비전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과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
현대차그룹은 ‘미래차 산업 국가 비전 선포식’ 현장에서 미래 모빌리티 협업 생태계 전략을 제시했다. 개방형 혁신을 한층 가속화해 국내 스타트업 및 중소·중견기업들과 손잡고 다양한 형태의 미래 모빌리티 서비스를 보편화하겠다는 취지다. 현대차그룹은 우선 미래 모빌리티 기술과 전략 투자에 2025년까지 41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2022년까지 로봇·인공지능(AI), 전동차, 스마트카, 미래 에너지, 스타트업 등 신사업에 23조원 투자 계획을 밝힌 바 있는데, 2025년으로 늘려서 장기적인 투자 로드맵을 내놨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전기차 23개 모델 출시 계획에 따라 현재 전기차 전용 플랫폼도 개발 중이다. 내년부터 스위스에 수소전기트럭 1600대를 순차적으로 수출하고, 수소연료전지시스템을 선박, 열차, 발전 등 분야의 동력원으로도 활용하기로 했다.
차량 데이터 오픈 플랫폼의 개발자 포털인 ‘현대 디벨로퍼스(Hyundai Developers)’ 출범도 공식화했다. 수백만 대의 커넥티드카와 정비망을 통해 수집된 차량 제원, 상태, 운행 등 데이터를 외부에 개방한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스타트업들이 미래 모빌리티 시대 신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게 된다. 현대차그룹은 이날 우진산전, 자일대우상용차, 에디슨모터스와 함께 버스용 수소연료전지시스템 공급 협력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이로써 국내 중소·중견 버스 제작사들이 자체적으로 수소전기버스를 개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격식 깨고 새로운 시도 그리고 변화
올 1월 2일 현대차그룹의 시무식 현장은 그동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우선 매년 시무식 무대에 올랐던 경영진 전용 좌석이 없어졌다. 정 수석부회장부터 사원까지 모두 객석에 앉았다.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은 더 이상 자동차 제조업의 추격자가 아닌 시장 판도를 주도하는 게임체인저로 도약할 것”이라며 “일하는 방식에서도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니 임직원 여러분들도 새로운 시도와 이질적인 것과의 융합을 즐겨달라”고 선언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보폭이 넓어진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리더십이 개혁과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전했다.
현대차그룹의 첫 번째 변화는 인사에서 나타났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미래차 기술 개발 부문 인재를 전면에 배치하며 정몽구 회장을 보좌해 온 인사들의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알버트 비어만 현대·기아차 차량성능담당 사장을 그룹의 미래를 책임지는 연구개발본부장에 임명하며 순혈주의에서도 벗어났다. 최근엔 알파 로메오, 람보르기니 등에서 디자인 개발을 주도해온 디자이너 필리포 페리니를 유럽 제네시스 선행 디자인스튜디오 총책임자(상무)로 영입했다. 현재 현대차그룹엔 벤틀리, GM, 폭스바겐, BMW 출신 외부 인재가 주요 사업을 책임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난 2월엔 포스코 출신인 안동일 전 포항제철소장을 현대제철 생산기술 담당 사장으로 영입하며 재계를 놀라게 했다. 현대제철이 경쟁사인 포스코 출신 사장을 선임한 건 2001년 현대차그룹 편입 이후 처음이다.
군대를 연상케 하는 보수적인 조직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자율복장제’가 도입됐다. 자율복장제는 시행 이후 그룹 내부로 빠르게 정착됐다. 덕분에 양복 일색이었던 회사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지난 9월 초에는 직급과 호칭, 평가, 승진 등 인사 전반에 걸쳐 달라진 인사제도를 시행했다. 일반직 직급은 연공중심 6단계에서 4단계로 단순화했다. 직원 평가방식은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뀌고 승진연차 제도 역시 폐지했다. 실적이 좋으면 과장으로 승진한 후 이듬해 차장 승진대상자가 되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정기 공채도 폐지하고, 언제든 필요할 인재를 뽑을 수 있게 시스템을 정비했다. 내부적으로 의사 결정 체계가 빨라졌다는 의견도 나온다.
과감한 시도와 변화에 실적도 상승했다. 현대차그룹은 올 2분기 1조2377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7분기 만에 1조원대를 회복한 셈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의선 수석부회장만큼 현장경영에 나서는 오너가 또 있을까 싶다”며 “매년 CES와 각종 모터쇼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며 굵직한 협업 계약을 주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시장의 회복
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숙제
글로벌 자동차 트렌드에 빠르게 대처하고 있지만 현대차그룹의 향후 과제도 산적해있다. 이는 곧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우선 중국 시장의 실적 회복이 거론된다. 중국의 사드보복 이후 장기화된 실적 부진이 발목을 잡고 있다. 또 하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작업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3월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이 중심인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지만 미국계 펀드 엘리엇이 제동을 건 데 이어 의결권 자문회사들까지 잇달아 반대하며 무산됐다. 정 수석부회장은 같은 해 5월 여러 의견들을 수렴해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이렇다할 소식이 없다.
지난 5월 칼라일그룹 초청 대담에서 정 수석부회장은 “투자자들과 현대차그룹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여러 옵션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지배구조 개편에 조급해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현재 그럽 개혁과 미래차 서점, 실적회복 등 긍정적인 신호를 마주하고 있다”며 “안정적인 그룹 지배를 위해선 지배구조개편이 마무리돼 경영승계가 선행돼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