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ny] 백제의 혼이 깃든 천년기업 금강조, 무리한 외연 확장에 스러진 1428년의 전설
입력 : 2011.03.28 10:41:53
수정 : 2011.08.26 16:23:04
서기 578년 백제 통신사 일행이 일본 방문길에 올랐다.
이 가운데는 백제의 건축양식을 일본에 전수하고자 한 건축 장인들도 포함돼 있었다. 백제는 불교문화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당시 일본 왕실은 백제문화와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뜻을 분명히 하던 때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쇼토쿠 태자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문화 수용과 일본 내 정치적인 필요성으로 시텐노지(四天王寺)를 건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시텐노지 건립은 여러 부족으로 얽히고설킨 나라를 통일한 일본 왕실이 마침내 국가로서 출발을 알릴 수 있는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일본 내에는 시텐노지를 건립할 만한 장인이 없었다. 쇼토쿠 태자는 때마침 일본을 방문한 백제 통신사 일행 중 장인 3명을 따로 초청해 시텐노지 건립을 부탁했다. 백제의 장인들은 593년 오사카에 시텐노지를 건립했다. 시텐노지는 오늘날까지 오사카에서 가장 큰 절이면서 동시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남아 있다.
장인집단으로 출발
시텐노지 건립을 주도한 백제의 장인들 중 한 사람인 유중광(柳重光, 곤고 시게미쓰)은 시텐노지를 건립한 후에도 백제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일본에 남았다. “대를 이어 절을 보수•관리해 달라”는 쇼토쿠 태자의 간곡한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곤고 시게미쓰는 시텐노지를 도맡는 전속 장인이 된 셈이다.
일본에 남은 곤고 시게미쓰는 이후 효율적인 보수•관리를 위해 금강조(곤고구미)라는 ‘장인집단’을 창설했다. 시텐노지 완공 후 금강조가 창설된 시기는 서기 578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6년 파산하기 전까지, 1428년을 이어온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명성을 보유했던 건축 및 문화재 보수전문회사 금강조의 탄생 배경이다.
시텐노지는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사찰이다. 매년 초 일본인들은 시텐노지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오사카의 명물이자 일본인들의 전통 축제 중 하나인 ‘왓쇼이 축제’다.
‘왓쇼이 축제’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설이 하나 전해내려 온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닷길은 험하기로 이름나 있었다. 워낙 물살이 거친 데다 태풍이 잦아 가깝지만 쉽사리 건너기가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조선을 접수한 몽골족이 그토록 노렸던 일본 땅을 태풍과 험한 바닷길 때문에 밟지 못한 건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578년 부여를 떠난 백제의 통신사 일행은 보름 만에 오사카에 무사히 도착하자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백제인들은 마중 나온 일본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왔소이, 왔소이’라고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왓쇼이 축제’는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금강조는 578년 창설자이자 1대 당주 곤고 시게미쓰부터 2006년 40대 당주 곤고 마사카즈까지 ‘가문기업’ ‘가족경영’을 자랑하며 1428년을 이어왔다. 게다가 그 오랜 세월을 시텐노지 부근 한 곳에서만 버텨왔다. “절을 지켜달라”는 쇼토쿠 태자의 청을 어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자’는 금강조의 기업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백제인, 즉 우리 선조가 세운 기업이자 가문기업의 맥을 이어왔다는 점, 그래서 우리 선조의 피가 1428년 동안 흘러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한다.
시텐노지 건립을 기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금강조는 이후에도 주로 사찰•신사•불각 등 종교적인 건축을 설계•시공했다. 쇼토쿠 태자의 명(命) 이후 에도시대까지 관영사찰과 시텐노지의 전속 건축장인집단으로 나라에서 녹봉을 받았다.
전통양식 고수 원칙과 현대적 공법의 결합
장인정신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금강조는 튼튼할 뿐 아니라 숭고한 예술혼이 깃든 건축물을 짓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비록 공사기간이 다른 회사보다 오래 걸릴지언정 어떤 충격과 재해에도 끄떡없는 완전한 건축물을 짓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원칙은 고객들의 신뢰로 이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인 호류지(法隆寺) 5층탑, 일본 3대 성 중 하나인 오사카성도 금강조의 작품이다. 금강조의 첫 작품인 시텐노지는 잦은 지진과 태풍 등 온갖 풍파에도 홀로 꿋꿋하게 견뎌냈다.
1995년 일본 고베를 덮친 대지진 때 금강조의 뛰어난 건축술은 다시 한번 입증됐다. 진도 8의 강진이 고베지역을 갈가리 찢어놓고 무너뜨렸던 당시 계광원이라는 사찰만큼은 멀쩡했다. 그렇다고 해서 계광원이 위치해 있던 동네만 강진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지진 피해가 극심했던 곳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금강조가 세운 계광원은 시공했던 상태 그대로 남았다.
전통양식을 지킨다는 것이 금강조의 원칙이었지만 꼭 그것에 구애받지는 않았다. 기본 틀과 형식은 전통양식이되 시대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현대적인 공법을 적용했다. 세밀하고 정교한 부분은 몇 번이고 수작업으로 꼼꼼히 마무리했다.
사찰 관련 건축 부문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금강조는 차차 문화재 복원•수리 사업에도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건설 기업’으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관영사찰과 시텐노지 전속 장인에 대한 녹봉이 끊기고 수주량이 감소하자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34년 37대 당주 곤고 하루카즈는 회사를 어려움에 빠뜨린 책임과 이를 조상들께 사죄하겠다는 이유로 스스로 할복함으로써 목숨을 끊었다. 1대 당주부터 36대 당주까지 모신 제단 앞에서였다.
당주의 느닷없는 자살로 자칫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금강조의 명맥을 살린 사람은 자살한 37대 당주의 부인 곤고 요시에다였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38대 당주에 오른 곤고 요시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업은 계속될 수 있었다. 책임감•사명감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가족경영의 장점, 원칙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장인정신의 의지로 금강조는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1955년 금강조는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데까지 성공하며 위기에서 일단 벗어난 듯했다. 전후 복구•재건사업, 그에 따른 건설경기 활황은 위기에 빠져 있던 금강조에 회생의 불을 지폈다. 특히 전통양식과 철근콘크리트 방식을 조화한 금강조의 새 공법이 전후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수십 년간 드리워져 있던 위기의 그늘은 쉬이 걷히지 않았다. 일본의 거품경제 시기였던 1980년대, 금강조는 거액의 자금을 끌어들여 부동산에 투자했다. 아파트, 빌딩 등 일반 건설 부문에 손을 대기도 했다. 사업의 외연을 무리하게 확장한 것이다. 이는 결국 1992년부터 몰아닥친 경기 침체기에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끌어들인 자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큰 악성 부채로 불어났고 애써 키운 회사 덩치의 가치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원칙을 깨고 과욕을 부려 화를 자초한 셈이다. 또다시 닥친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 썼지만 금강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끝내 2006년 40대 당주를 마지막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578년 백제인 곤고 시게미쓰에서 시작해 무려 1428년 동안 이어온 금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장자 관습 탈피한 엄격한 후계자 선정
금강조는 <이코노미스트>, <비즈니스위크> 등 해외 유명 매체에서도 극찬한 장수기업이자 모범기업이었다. 금강조의 장수 비결을 연구한 사람도 상당수다. 금강조의 장수 비결로는 신뢰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원칙과 열정을 꼽는 사람이 많다. 전통기술을 보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열정, 그것을 토대로 사찰을 건축한다는 원칙이 금강조를 1428년 동안 이끌어온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금강조가 장수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가족경영이었다. 물론 가족경영의 형태를 갖춘 모든 기업들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代)가 거듭될수록 대부분 찢어지거나 파산하기 일쑤다. 이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사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금강조의 가족경영은 안정적인 운영과 엄격한 후계자 선정이라는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금강조는 무리한 확장을 피하고, 장자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채 가업에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후계자를 선정했다. 자부심과 열정, 사명감이 결여된 자손은 아무리 장자라도 후계자에서 일찌감치 제외됐다. 대신 비록 여자일지라도, 사위일지라도 금강조의 열정과 원칙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면 가업을 이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이처럼 안정적이고 철저한 가족경영은 금강조를 1428년 동안 생존할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비록 금강조는 역사 속에 묻혔지만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 기업경영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기업이 100년 동안 살아남기도 힘든 현실에서 무려 1428년 동안 가업으로 존속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강조는 전 세계 기업경영에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