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20) 러시아 혁명 | `제독의 연인`과 `레즈`로 바라본 러시아 내전
입력 : 2021.07.28 14:40:04
수정 : 2021.08.11 14:25:10
러시아 혁명은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7년 러시아제국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혁명을 말한다. 그해 3월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지만, 10월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공화국이 무너진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1922년 세계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러시아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붉은 군대’ 혁명군과 반혁명군 간의 러시아 내전, 즉 적백내전(赤白內戰)이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등 20세기 러시아의 모습을 생생히 담은 작품으로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원작,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1965)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당대의 사건을 균형감 있게 다룬 대서사극으로 고전 중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보다 뒤에 제작된 두 편의 영화 <제독의 연인>(2008)과 <레즈>(REDS, 1981)는 실존 인물을 내세워 러시아 혁명에 대해 엇갈린 양 진영의 시각을 담아냈다.
<제독의 연인>이 반혁명군 백군의 지휘관이었던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았다면, <레즈>는 적군인 혁명군을 지지하는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 존 리드의 눈으로 바라본 러시아 혁명을 그린 영화이다. 러시아 혁명이 전제군주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민족 간, 계급 간, 계층 간, 이념 간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만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 드러난 러시아 혁명의 모습
영화 <제독의 연인>은 러시아제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실존 인물 콜차크(1874~1920)가 적백내전 당시 백군의 수장으로 활동하다가 적군에 총살당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콜차크는 승전 연회에서 부하의 아내인 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며 흑해 함대 사령관이 되지만 다음해 러시아 혁명이 터진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러시아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콜차크는 임시정부하에서 미국으로 추방된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의 협력을 거부하고 러시아제국의 제독으로서 백군의 지휘관이 되어 러시아 내전에 참전한다. 사랑하는 안나 역시 백군의 간호사로 콜차크와 함께하지만, 적군의 반격에 밀린 콜차크는 체포되어 바이칼호에 수장된다. 2008년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는 콜차크를 러시아제국에 충성한 강직한 군인으로서 충성심과 품위를 잃지 않은 장군으로 그려낸다.
<제독의 연인>이 콜차크의 눈으로 본 러시아 혁명을 그려냈다면, <레즈>는 실존 인물인 미국인 존 리드가 러시아 혁명과 이후 공산당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을 직접 체험하면서 겪었던 공산주의 태동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영화이다. 존 리드는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의 주요 도시 곳곳을 누비며 러시아 혁명에 관한 다큐멘터리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1919)을 저술했는데 워런 비티 감독이 이 책을 토대로 영화 <레즈>를 제작했다.
이들 작품 속에는 열광적인 군중의 행렬과 대중 집회 등 막 전개되고 있던 러시아 혁명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고, 혁명의 열기를 표현하는 배경음악을 통해 노동자 연대의 힘과 혁명의 당위성도 드러낸다. 그러나 10월 혁명 성공에도 불구하고 리드는 코민테른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혁명의 꿈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씁쓸한 감정을 갖는다. 기아와 장티푸스, 자유와 인권을 억누르는 사회 시스템 탓에 수많은 민중이 죽어간다는 동료의 말에 리드는 사회주의 혁명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지만 혁명은 여전히 진척되는 중이라고 애써 위로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이 공산당 선전을 위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혁명에 대해 회의하는 모습이 나온다. 혁명을 둘러싼 여러 가지 모습은 우리에게 ‘진정한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3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는 봉건적 전제정치가 여전히 유지됐다. 1861년 농노해방령이 공포되었지만 유상분배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은 여전했고 니콜라이 2세의 전제 왕정체제에 맞서는 조직적인 반정부 세력이 확대됐다. 이 와중에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러시아가 패배하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1905년 대중시위와 대규모 파업에 대한 전제군주의 잔혹한 학살 사건(피의 일요일)이 일어나면서 전 민중의 분노는 더욱 증폭된다. 이후 총파업이 일어나고 ‘노동자 소비에트(러시아 제국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기구)’가 출현하는 가운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슬라브 민족주의에 고무된 러시아는 독일제국과 맞붙지만 전쟁에 패배하고 만다. 막대한 전비가 투입된 탓에 경제가 파탄나면서 반전감정이 거세지고 노동자의 파업과 폭동도 빈번해진다. 이 전쟁이 도화선이 되어 병사·노동자·농민의 소비에트가 결성되고 이와 더불어 자본가와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들어선다. 이어 공화국이 선포되는데 이것이 3월 혁명이다. <제독의 연인>에는 수병들의 요구로 콜차크가 장교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신의 예도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볼셰비키에 대한 민중의 지지와 10월 혁명
3월 혁명으로 전제군주정은 사라졌지만 민중들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노동자는 여전히 착취당했으며 굶주림은 여전했다. 의회와 정당 대표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레닌 등 해외로 망명한 혁명가들이 돌아오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노동자 소비에트의 이중권력 시대가 열린다. 내전의 조짐이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에 도착한 레닌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 토지분배, 사회주의 혁명을 호소했고,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자 레닌과 트로츠키는 민중의 무장봉기를 등에 업고 정부 청사를 점령한다. 바로 10월 혁명이다. <레즈>에서는 러시아 왕궁에 위치한 조용한 분위기의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민중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크로츠키 연설 모습을 대비하면서 당시 볼셰비키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1918년 1월 국호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포한다.
▶볼셰비키 적군과 반혁명 세력 백군 간의 전투
볼셰비키가 차별과 특권을 폐지하고 부르주아의 재산을 몰수해 수많은 민중의 지지를 받을 때, 옛 정부의 장성, 자본가와 지주계급, 볼셰비키에 밀린 사회주의자들은 반혁명군인 백군 근위대를 결집한다.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식량과 약품 등 기본 생필품조차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민중들은 구체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절박감으로 붉은 군대에 지원 입대했고, 1919년 4월 국민개병 원칙이 도입되어 붉은 군대가 수백만 명으로 증강됐다.
한편 연합국은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소비에트 러시아를 적으로 삼아 대규모 파병에 나선다. 이 가운데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조직된 반혁명파 콜차크의 군대가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내부로 진격하지만, 붉은 군대의 반격으로 패배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영화 <제독의 연인>에 잘 묘사되어 있다. <레즈> 또한 당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농민·노동자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경계하며 러시아로 군대를 보낸 시대적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적백내전은 양측 모두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대다수의 중농층은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했고 붉은 깃발 아래 결집한 레닌의 군대를 분열된 백군이 이길 수 없었다. 코로나 시대에는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 말이 풍자되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강조했듯이 전쟁에선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 명제다.
레닌이 정권을 장악하고, 1922년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자카프카지에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하나로 연합하기로 하면서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즉 소련이 탄생한다. 레닌은 “여러분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자이고… 러시아 혁명은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라며 혁명의 승리를 선언한다.
▶러시아, 그 반전(反轉)의 역사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이후 70년이 지난 1991년 붕괴되면서 러시아의 레닌 동상은 파괴되고 콜차크 제독은 사면된다. 러시아 정부는 2004년 혁명기념일인 11월 7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제작된 <제독의 연인>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실존 인물로서의 콜차크는 쿠데타를 통해 지도자 자리를 얻었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다른 백군 지휘관들을 잘 통솔하지도 못했으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많은 민중을 총살하는 등 독재적이고 반민중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한편에서는 영화가 콜차크를 미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입장에서는 콜차크가 10월 혁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러시아제국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며 러시아에 대한 명예와 성실함을 지킨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역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일진일퇴를 벌이는 사례를 많이 본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비에트에 대한 반동을 주도했던 반체제 인사가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으로 개편되면서 옛 러시아를 사랑했던 애국자로 재조명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