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방송사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버나드 박’이라는 한 스타가 우승해 주목받고 있다. 그의 우승이 흥미로운 것은 세 명의 전문가 심사에서는 여러 번의 탈락 위기를 맞았지만 시청자들의 문자투표가 그를 살려왔다는 점이다. 결승전에서도 버나드 박은 다른 후보보다 4점이 뒤진 상황이었지만 시민들의 열광적인 문자투표가 이 청년에게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의 우승을 두고 각종 매체에서는 앞다퉈 그의 성공 이유를 보도하고 있다. 이야기된 것처럼 순박한 이 청년의 진정성 있는 감동스토리는 신이 내린 목소리(담당 PD), 가요계에 없었던 매력적인 음색(심사위원)과 어울려 이 청년의 우승을 견인한 것이 사실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공감의 사회적 전파
이러한 평가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방송이 진행되는 내내 그의 노래에 감동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느낀 바를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버나드의 노래는 아이돌과 댄스 음악에 지친 사람들의 정서에 새로운 노래들로 다가왔다. 특히 버나드 박이 자신의 쓸쓸함, 사랑, 이별, 아픔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잔잔한 여운이 담긴 노래로 전달하는 순간 대중들은 그에게 몰입했다. 차가운 이 단절의 사회에 담백하게 심금을 울리는 노래, 가수, 사람들에 우리는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뜨겁게 각인된 감동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를 통해 그의 노래를 소개하고, 팬 카페들을 만들어 감동의 순간을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 유투브에는 10편이나 되는 ‘버나드 스마일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깊은 울림을 주는 버나드 박의 노래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는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고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문자투표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네트워크를 통한 공감의 사회적 전파는 전 세계를 신나게 한 ‘싸이’부터 유투브로 한국까지 유명해진 ‘폴포츠’까지 여러 가지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공감을 배가하는 소통수단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의견을 함께 나누는 ‘공감(empathy)’은 이제 현대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힘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함께 느끼고 싶어한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버나드 박의 노래처럼, 감동적이거나 위로가 되는 글이나 사건을 보면 메시지를 보내고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하고 공감하고자 한다. 그래서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공감의 시대>에서 인간을 공감하는 존재(homo empathicus)로 파악했다. 그는 인간은 다윈이 주장한 것처럼 적자생존적 경쟁으로 치닫는 존재가 아니라 공감의 본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이견이 있겠지만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의 발전할 수 있는 유대감을 가장 고차원적인 욕구로 지향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은 틀림없다. 무엇보다 좋은 소식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이렇게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모바일 환경에서 우리는 원하면 언제나 네트워크에 연결해 자신이 원하는 정보와 동영상을 접할 수 있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과 같은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평상시에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함께 모여 정보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공감하는 인간이 잘 활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어딘가에 접속해 있지만 익명성을 즐기며 깊은 교류를 꺼린 채 살아간다. 가족이나 직장의 동료들에게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이버공간에서 만난 타인들과는 채팅을 통해 얄팍한 대화와 감정의 교류를 즐긴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개인은 지나치게 자신의 집단에 대한 편애와 타자를 구분하는 속성을 강화하게 되었고, 내편이 아닌 사람과 집단에게는 비방과 공격적인 댓글을 여과없이 남긴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강화할 기회를 주었지만, 많은 경우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만 머물러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감의 지속을 통해 생성되는 신뢰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데에는 한국의 기술시스템과 사회시스템에서 기인하는 원인이 있다. 경제성장이나 신속함을 모토로 디지털 기술을 발달시켜 오면서 정작 그에 맞는 우리의 이타적 도덕성과 공감을 향상시키는 환경을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패러다임적 변화를 겪고 있는 네트워크 사회 속에 우리가 만들고 싶은 사회와 기업은 과연 어떤 것인지,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 받는다.
공감은 21세기 시대적 요구
‘공감’은 건조하고 외로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이며,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인 요구이다. 현대 사회 곳곳에서 이미 공감에 대한 시대적인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 군사력이나 경제력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다른 국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 소위 ‘소프트 파워(soft power)’다. 스위스처럼 다른 국가와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국가로 인지되면 평화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종 선거에서도 후보가 얼마나 서민들과 소통하는 사람인지가 당선에 중요한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정치인이 서민들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지만 서민들의 생활과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야말로 서민을 위한 좋은 정치와 행정을 펼칠 수 있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직장 상사나 동료와의 공감이나 배려가 회사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차피 모든 사람에게 높은 직위나 임금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애로를 들어주며 끈끈한 감정을 나누는 상사와 동료들과의 관계야말로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처럼 사회와 공감하는 기업의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그동안의 기업이 경쟁 위주의 일방적 성장이나 제품의 차별화를 통해 발전해 왔다면 이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나가고 좋은 기업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쪽으로 선회할 때 적은 비용으로 소비자의 열렬한 호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21세기 공감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초래한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서로 공감하는 사회와 기업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인류는 기술적인 진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를 확장해 왔고 이러한 것을 토대로 공감대를 형성할 때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과 사회경제적 변화를 촉구할 수 있었다. 21세기가 제공하는 디지털 기술과 소셜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면 공감하는 개인과 기업의 능력을 배가할 수 있다.
이제 개인과 기업은 이타심에 기반한 자기 성찰과 높은 사회적 인지 능력을 토대로 주변을 살피고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같이 느끼고 교감해야 한다. 버나드 박이 노래에 전하는 깊은 위로와 울림을 인터넷과 네트워크를 통해 전하고, ‘당신도 그렇구나. 나도 그래’ ‘맞아, 맞아’하며 공감을 나누는 한국 사회의 힘 속에서 하나의 희망을 본다.
조화순 교수
노스웨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정보사회연구센터 소장을 겸하고 있다. 현재 하버드대학 방문교수로 보스턴에 머물고 있다.
[조화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4호(2014년 05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