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이 1859년에 쓴 <종의 기원>은 인간과 그 문명을 해석하는 큰 틀을 제공하였다. 다윈에 의하면 수많은 유인원 가운데 인간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다음 두 가지 ‘무기’를 통해 생존했다. 하나는 ‘적자생존’이다. 인간은 뛰어난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추구해왔다. ‘적자생존’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약육강식’이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환경에 더 잘 적응했고, 경쟁하는 다른 인종들을 무참히 짓밟고 결국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종의 기원>에는 영국 시인 A. 테니슨의 시구 ‘nature, red in tooth and claw’가 등장한다. 번역하자면, ‘이빨과 손발톱이 피로 물든 자연, 혹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 유전자를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이라는 날카로운 칼로 드러내 살아 온 동물이다. 이 틀은 아직도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바이블이 되었다. 정말일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속성은 ‘예술’에서 극명하게 등장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음미하거나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관찰하면 인간의 최고의 경지를 감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해 신비한 합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남긴 최초의 예술작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프랑스와 스페인 동굴에 남긴 지금부터 3만~1만 년 전까지의 벽화들일 것이다. 물론 이들이 정교하고 숭고한 음악이나 무용도 즐겼겠지만, 그것을 기록할 도구가 없어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깊은 계곡의 동굴 안에 남긴 그림들은 인간이 누구이며, 인간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강력하게 질문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장소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이다. 이 동굴은 한 마리 여우를 쫓던 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 후 이 지역의 영주였던 사우투올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취미로 계곡 안으로 들어가 석기를 캐내곤 했다. 어느 날, 사우투올라는 다섯 살 난 딸 마리아를 데리고 한 동굴에 들어가 머리를 숙이고 석기를 찾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머리를 들고 동굴 천장을 쳐다보면서 “아빠, 소가 있어요!”라고 소리친다. 사우투올라는 자신의 램프를 천장에 비추니, 들소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림들이 어제 그린 것과 같이 선명한 모습이었기에 놀랐다. 사우투올라는 연필을 들고 그 짐승들을 스케치한 후, 프랑스 학회에 이 그림들을 보여주며 구석기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학회는 물론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우투올라가 학문적인 명성에 눈이 멀어 사기극을 벌였다고 의심했다. 사우투올라는 자신의 주장을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이 죽었다.
당시 이 그림들의 위작을 주장한 학자는 프랑스의 저명한 고고미술학자인 에밀 까르따이약(1845-1921)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한 그는 2만 년 전 구석기 ‘동물’들은 그런 정교한 그림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림은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여유로운 문명사회에서나 가능한 귀족들의 전유물로 생각한 것이다. <추상과 공감> (Abstraktion und Einfulung)이란 책의 저자인 빌헬름 보링거는 자연을 모방하는 서양예술은 ‘공감’을 기초하며, 공감이란 감정은 원시인들에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구석기 시대 예술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점은 에밀 까르따이약의 (Mea Culpa d’un Sceptique,1902) 즉 <의심하는 자의 고해성사>라는 책의 출판이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가 구석기 시대의 작품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이곳을 방문한 피카소는 ‘알타미라 이후에 모든 것이 쇠퇴했다’고 고백하였다.
2만 년 전의 벽화가 구석기 시대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작품이란 사실이 확정되었으나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이들이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처음 발견할 때부터 이 동굴들을 연구한 고고학자 앙리 브루이 (AbbeHenri Breuil,1877-1961)는 동굴의 그림들은 원시인들이 잡고 싶은 동물들을 그림으로써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원시적인 풍요제사의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동굴벽화에 남겨진 동물들 중 뾰족한 칼이나 창으로 긁힌 흔적이 있어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이 이론은 간단명료하여 매력적으로 보이나 원시인들이 가진 신비에 대한 경외심을 설명하지 않았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가 아닌 지하로 내려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이 질문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와 같은 궁극적인 질문과 연결되지 않을까. 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에는 3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300개 이상 정교한 벽화들이 발견된다. 지금은 사라진 맘모스, 순록, 곰, 사자 등이 그려졌는데, 이것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주식이 아니었다.
또한 이곳은 그들의 거주 장소가 아닌 특별한 행위를 위해 숭고하게 마련한 ‘구석기식 시스틴 성당’ 이라고 생각한다. 빙하기 시대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생활하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지하 50m이상 세계로 진입한다. 그 어둠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한 순간에 앗아가는 신비한 장소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동굴에서 자신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횃불을 듣고 자신과 더불어 사는 위대한 동물들을 그리면서 동물, 자연과 하나가 되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을 조절하는 절대자와 만나는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우리만의 동굴이다. 그 안에서 몰입하는 연습을 통해 우리가 사는 이유를 묵상하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리즈 끝>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