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원회 때부터 틀이 잡히지만 정부 조직개편이 첫 순서를 끊는다. 이어 공약사항을 반영한 정책 과제가 줄줄이 발표된다. 공공기관장 물갈이가 이뤄진다. 주로 공공부문 쪽이다.
민간 부문에서 핵심은 대기업그룹 정책이다. ‘대기업 길들이기’라든가 ‘대기업 때리기’라고도 한다. 총수 오너들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통과의례처럼 겪는 일이다. 요즘 재계에 경제민주화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첫 분기부터 세수가 크게 펑크 난 탓에 곳곳에서 진행되는 세무조사에 힘들어하고 있다. 내수기업 수출기업 구분 없이 국세청과 관세청이 압박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2012년에 세무조사를 받아 엄청난 추징을 당한 회사들이 오히려 한숨을 돌리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린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전경련과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정부와 국회가 논의 중인 경제민주화 법안에 반대 논리를 쏟아내고 있지만 허공 속에 메아리 수준이다.
현재 10대 그룹 중에 SK와 한화그룹 총수가 수감돼 있거나 구속집행정지로 입원해 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은 거액 탈세 혐의 등으로 검찰 소환이 불가피하다. 이런 상황에서 재계 목소리는 ‘갑질’의 또 다른 형태로 비춰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요 그룹을 보는 시각은 남다르다. 현재 잘나간다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 덕을 보고 기반을 잡았다는 점에서 ‘국민기업’ 성격이 강하다고 보는 듯싶다. 수입 대체 산업, 중화학공업 육성이나 정책자금 지원으로 성장했다고 여긴다. 마치 ‘그들의 올챙이 시절을 곁에서 지켜봤다’는 심정이다. 대기업그룹과 오너들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고마워하고 그에 합당하게 기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기업들이 공정경쟁보다는 힘의 논리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억누르고, 근로자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부를 축적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기득권자이자 강자라는 이유로 대기업들이 법과 규정의 엄격한 적용을 받지 않았다는 시각도 지니고 있다. ‘대기업 바로세우기’ 의지가 강하다.
이 대목에서 삼성그룹의 행보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시기에나 삼성의 정보력과 판단력은 빨랐다. 새 정부 출범 초기에는 삼성이 앞장을 서고, 다른 그룹들이 바통을 이어받는 식으로 ‘호응’에 나서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탐색전이 꽤 길어졌다. 삼성그룹은 4월까지 별다른 공식 발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50조원 투자계획에 이어 중소기업과 벤처창업자들에게 1조5000억원 미래기술 개발 지원 등이 쏟아졌다. 올해 시리즈로 박근혜식 경제민주화 방안에 대한 삼성의 ‘대책 릴레이’가 이어질 공산이 크다.
지난 5월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현지에서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나서는 기자회견 계획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윤창중 사건이 터져 취소됐다.
삼성은 오래전에 박근혜 스타일에 대한 파악을 마치고 차근차근 ‘코드 맞추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그룹들은 소극적인 대응에 그치고 있는 게 대조적이다. 몇 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별다른 반향을 불러오지 못한다.
박 대통령은 ‘수도자적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수녀나 비구니 스님처럼 오랜 수행생활을 거쳐 내면을 차돌처럼 단단하게 다졌고, 정치인으로서는 약속과 신뢰라는 두 축으로 똘똘 뭉쳐 있어 원리원칙을 바꾸지 않는 ‘근본주의자’다. 독서와 사색, 그리고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 자신의 논리와 지향점은 대중에게 한번 공표하면 그 자체가 약속을 넘어서 ‘이데올로기’가 된다.
박 대통령의 생각이 뭘까를 따져보려면 후보 시절 연설이나 정책 세미나 발언을 다시 들어보거나 공약집을 들춰보면 해답이 다 들어있다.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이 와 몇 분기째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지는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박 대통령이 원칙을 바꾸거나 정책이 후퇴하는 일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기업은 생존 자체가 경쟁력이다. 박 대통령의 정책 방향과 스타일은 상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기업 그룹들이 상황에 적응하는 ‘진화론적 응전’만이 남아있는 듯싶다. 국내외 경제 여건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선택지가 많지도 않고, 시간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만 ‘칼자루를 쥔 강자’가 된 박 대통령이 대기업에 손을 내밀어 대화하고 소통한다면 서로 진정성을 갖고 공감대를 이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