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초 어느 날,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어느 허름한 빌딩을 찾아갔다. 몇몇 젊은이들이 끙끙대며 전자부품과 설계도를 다루고 있었다. 어색해 하는 대표자를 만나 몇 마디 물어보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다. 막 창업한 회사들을 물어물어 찾아다니던 기자 초년병 시절, 그들을 만났던 장면은 흐릿한 흑백사진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회사 이름은 건인시스템, 대표자는 서울대 공대 제어계측학과(현재 전기공학부에 통합) 박사과정을 막 마친 변대규 씨였다. 나중에 회사 이름을 건인으로, 다시 휴맥스로 바꿔 매출 1조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변 사장은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롤모델로 자리잡았다. 얼마 전 행사장에서 보니 변 사장은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벤처의 본래 뜻은 모험자본이다. 대학과 기업,연구소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수많은 창업자들이 명멸하는 실리콘밸리가 벤치마킹 대상이다. 한국에서도 벤처기업은 한때 대단히 안전하고 돈되는 회사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벤처기업 지원에 올인했다.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을 비롯해 정책자금이 경쟁적으로 동원했고, 코스닥 시장은 뻥튀기의 창구 역할를 도왔다. 이내 벤처 거품은 강남 일대 분위기를 바꿔 놓았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기꾼들을 만들어냈다. 창업 1세대 많은 주역들도 비리에 연루돼 감방 신세를 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스닥은 돈놀이 막장 드라마의 현장이었다. 인수개발(A&D)주라든가 테마주 릴레이는 주가조작을 위한 신조어에 불과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 하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파격적인 벤처 활성화 대책을 내놨다. 엔젤투자에 인센티브를 주고,벤처기업 지분 매각 때 양도세를 감면하거나 대기업의 지분 인수를 쉽게 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다. 벤처 쪽이 요구해 온 숙원사업이 한꺼번에 해소됐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다시 거품을 유발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다.
현재 한국의 핵심 화두는 경제민주화다.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라든가 논의 중인 정책들은 기업활동에 제약을 준다. 기업들이 내키지 않은 일을 하기는 쉽지 않을 뿐더러 빠져나갈 방법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얼마 전 발생한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대리점주 강압 사건은 한 회사에 국한해 생각할 일이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은 강자’를 중심으로 국내 식음료 유통시장에 독과점이 형성된 것이 중요한 배경이다.
10대 그룹 중에서 삼성 현대차 SK LG 등 상위 4대 그룹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글로벌화 과정에서 불가피한 흐름이다. 국내 주요 그룹은 글로벌 시장 개척에 성공했기 때문데 규모가 급격하게 커졌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한 대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면 교각살우나 다름없다. 다만 대기업에 공정한 경쟁의 룰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산업사를 따져보면 국내 주요 그룹들은 해방 전후 창업해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글로벌 위기를 넘어 산전수전을 다 겪고 살아남았다. 초창기 성장 과정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과 산업정책의 수혜자들이다. 재일교포와 일본 전기전자 회사들의 자금과 기술을 들여와 구미공단과 구로공단에 공장을 세웠던 전자산업육성 정책의 덕을 본 기업들도 많다.
박 전 대통령의 수출진흥정책에 힘입어, 종합상사는 만능 기업으로 그룹의 돈줄을 만들어냈고 자회사들을 신설하고 해외법인을 세우는 모태였다. 당시에는 공장을 세워 생산능력을 갖추면 그 자체가 곧 매출이었다. 공장을 증설하려면 정부 승인을 받았고, 은행 자금 지원은 자동적으로 따라왔다.그렇게 기반을 잡았던 게 오늘날 한국의 50대 그룹이고, 1000대 기업들이다.
이제 창업기업과 중소기업 차례다. 대기업을 키운 아버지 박정희 전대통령에 이어 딸 박근혜 대통령이 벤처지원책을 내놓은 점은 의미가 크다.
경제민주화 정책은 논란이 불가피하다. 하지만벤처 대책은 고용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인 창업자들에게 사업 기회를 열어준다. 젊은이들은 물론 5060에도 꿈을 심어줄 수 있다. 오히려 경제민주화라는 용어에 잘 어울린다. 애플이나 구글처럼 전 세계를 휩쓸 한국의 창업기업인들이 나오게 된다면 좋겠다. 설령 거품이 좀 낀다고 하더라도 견딜 만하다. 다시 ‘벤처 르네상스’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