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특이한 기업 형태가 있다. 바로 표면적으로는 ‘주인 없는’ 민간기업이지만 실제로 공기업인 회사들이다. 한국거래소에 기업공개가 돼 있고 외국 증시까지 상장된 민간기업이지만 정부가 경영진 인사를 좌지우지한다. 과거 공기업이었다는 업보 때문에, 그리고 확실한 주인이 없으니 정부의 전횡을 견제할 방법이 없다. 이사회를 구성해 경영 자율성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공염불(空念佛)이다. 이들 기업은 정권을 거치며 속으로 골병이 들어간다.
요즘 포스코는 이명박 정부 임기 말에 영포라인 스캔들에 휘말리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운이 나쁜 것인지, 포스코의 옛 이름 포항제철에서 보듯 회사 근거지가 포항이라는 점에서 정치바람에 말려들었다. 내부에서 줄을 댔는지 아니면 밖에서 줄을 잡아 당겼는지는 나중에 다 밝혀질 일이다. 회장 자리를 둘러싼 경쟁 속에서 포항 지역 토호 세력들이 가세해 물을 흐렸다는 점은 맞는 것 같다. 포스코에 흙탕물이 튕기도록 했던 임원들이 있다면 이 시점에서 스스로 조용히 물러나는 게 바람직하다.
포스코는 과거 박태준 회장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정부가 주인인 공기업일 때도 외풍을 막아냈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 자신이 정치권에 가담한 것 자체가 비극의 씨앗이었다. 김영삼 정부 때 처음으로 외부 인사인 김만제 회장이 경영을 맡게 됐다. 이후 DJP 연합으로 박 회장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지만 5년마다 교체되는 정권의 바람 앞에서 경영진은 서서히 정치적 외풍에 길들여져 갔다.
KT는 공기업 체제에서 국민주 방식으로 민영화를 이뤘다. 하지만 역대 정권은 공기업 당시와 똑같이 다뤘다. 현 정부 들어 강단 있는 경제관료 출신인 이석채 회장이 등장하면서 자율경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이 회장은 삼성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스마트폰을 조기 도입해 통신서비스 시장을 뒤집어 놓았다. 수많은 루머와 투서가 난무했지만 이 회장은 일단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얼마 전 KT 서유열 사장이 민간인 사찰로 정권을 ‘보위하려 했던’ 국무총리실의 영포라인에 ‘대포폰’을 만들어줬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회장은 온갖 이권이 걸려있는 KT 그룹의 주요 자리를 넘보는 이들에게 혼자의 힘으로 완벽하게 방패막이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정권 창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창업 공신도 아니니 말이다. 현직 사장이 회장 모르게 불법행위에 가담했다면 조직 장악력에 구멍이 뚫려있었던 셈이다.
한전이나 다른 공기업들은 기업공개가 이뤄졌지만, 그래도 정부 지분이 있으니 정권 차원에서 경영진을 임명하고 결과에 책임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주인 없는 민영화’를 이룬 옛 공기업들을 누가 이렇게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는지 잘잘못을 가려 분명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정권에 기여한 인물들이 전리품처럼 자리를 차지하는 낙하산 인사는 뇌물보다도 더 강도 높은 비리다. 뇌물은 불법적인 돈을 주고 받지만, 그래도 ‘단타’에 끝난다. 낙하산 인사는 높은 연봉이라는 뇌물과 함께 조직을 망가뜨리는 추가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다.
매번 막강한 후보자들이 난립하는 포스코나 한국통신 회장 자리다. 그런데 이 두 회사의 현 회장이 별다른 경쟁 없이 손쉽게 연임한 것은 아마도 현 정권이 임기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다시 전환기에 섰다. 누가 차기 대권을 잡든지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기업에 대한 분명한 경영 비전을 제시했으면 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금융지주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민영화를 이루지 못한 우리금융을 비롯해 KB금융, 하나금융 등이 확실한 자율경영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자체적으로 양성된 경영진이나 시장에서 검증된 전문 경영인을 CEO로 선임하는 게 핵심이다. 그들을 찾는 기준은 글로벌 경쟁력과 경영실적이다. 정권과의 관계나 기여도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으면 한다. 정권에 기대어 자리를 차지한다면 힘을 써준 누군가에게 보답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창업공신들에게 줄 자리는 순수 공기업, 국책기관 산하단체 등 그것만으로도 널려 있다. 군부 독재에서 벗어난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까지 되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임기 말 현상’에 국민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다음 대통령 당선자는 지긋지긋한 악습을 끊어낼 막중한 과제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