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 나라에 속한다. 지난 8월 13일,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에서 발표한 조사 결과다. 이 센터는 2008년부터 2023년까지 15년 동안 전 세계 102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종교와 관련한 대규모 조사를 진행했다. 종교는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하루 몇 차례 종교의식을 행하는지, 채식 등 종교적 금기들을 일상에서 얼마나 지키는지 등을 물었다.
아프리카, 중동, 중남미 국가 사람들 대다수는 매일 기도하고 음식을 가리는 등 종교 몰입도가 매우 높았다. 반대로 덴마크,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사람들은 대개 열에 두셋 정도만 종교적 의례를 행했다.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종교 몰입도가 가장 낮았다. 인생에서 종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비율이 한국은 17%, 일본은 6%에 불과했다. 기도, 점술 등을 행하는 이들도 한국 21%, 타이완 17%에 불과했다. 물질적, 세속적, 합리적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종교적 영성이 우리 인간성의 바탕을 이룬다는 점이다. 영적 경험을 모르는 인간은 내적 공허에 시달리기 쉽다. T. S. 엘리엇은 노래했다. “우리는 공허한 인간/우리는 봉제된 인형/ 짚으로 가득한 머리로/ 서로 기대어 있네. 불쌍하도다!”(「공허한 인간」 중) 영성을 잃은 인간은 머릿속이 바싹 마른 지푸라기로 가득한 봉제 인형과 다름없다. 삶이 건조하고 푸석푸석하다. 절망과 좌절, 불안과 우울이 항상 그의 뒤를 쫓는다.
물론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제도적 종교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다. 대커 켈트너 미국 UC 버클리대 심리학과 교수의 ‘경외심’(위즈덤하우스)에 따르면, 종교는 일상 곳곳에 있다. 출근하다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사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도 종교는 살아 있다. 이런 행위는 작은 실천으로써 미지의 불안을 이기고 인생을 긍정하려 하는 일종의 기도다. 길가의 꽃 한 송이에서 문득 아름다움을 느끼고 홀린 듯 바라보는 가만한 시선에도 종교는 살아 있다. 그때 우리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심오한 울림을 듣는다. 물리 법칙만큼이나 성스러움의 질서를 믿고, 세속에 초연한 가치를 추구하며, 자기를 초월하려는 모든 마음엔 종교가 존재한다. 페르시아 시인 루미에 따르면,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처럼 “한낱 돌멩이와 쇠붙이”에서, 모래 속 반짝이는 “사금파리”에서 “대단한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은 모두 신을 만난 것이다. 존재의 심오함과 경이감을 누리지 못하는 삶은 삭막하고 불쌍하다.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에서 “성스러움과 관련지어서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얻는 감정, 행위, 경험”이라고 종교를 정의했다.
종교 경험의 중심에 놓인 것은 경외심(awe)의 체험이다. 켈트너는 경외심을 우리가 “세상의 거대한 신비와 관계할 때 느끼는 감정적, 정서적 충격”이라고 말한다. 밤하늘 별을 보다가 불현듯 신비한 규칙과 질서를 발견할 때, 우리는 거기서 종교를 겪는다.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애쓰던 아기가 끝내 제 몸을 뒤집은 후 방긋방긋 웃을 때, 우리는 거기서 영적 고양을 체험한다. 막막한 세상에서 읽은 한 구절 시에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듯한 깨달음이 솟을 때, 우리는 거기서 신의 손길을 느낀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없는 삶은 의미가 고갈된 우물이나 마찬가지다.
켈트너에 따르면, 좋은 인생, 번창하는 인생은 경외심을 더 많이 경험하는 삶이다. “경외심은 우리가 기쁨을 느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게 해준다.” 일상의 혼돈에서 질서가, 수수께끼에서 대답이 일어설 때, 우리는 경외심과 함께 초월적 황홀경에 빠진다. 자아가 녹아 사라지는 느낌과 함께 자신이 “더 거대한 무언가의 한 부분이라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성과 속’에서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품은 사람”으로 본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바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느끼려는 행위, 역사적 현재에 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영원성과 동일시되는 성스러운 시간을 얻으려 노력하는 행위가 인간을 궁극의 기쁨으로 이끈다. 이러한 경험 없이 행복은 불가능하다.
현세적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마음, 즉 과도하게 현재에 몰두하고 눈앞의 성취에 매달리며 자기 감각 경험에만 집착하는 현대인의 마음이 불안, 우울, 반추, 자기비판 등 신경증을 부른다. 종교 경험의 중심에 놓인 경외심엔 이런 불행감을 잠재우는 힘이 있다. 미국 생태학자 레이철 카슨은 말했다. “경이감은 지루함과 환멸, 거짓된 것을 향한 무익한 집착에 대한 확실한 해독제이다.”
자아에 대한 과장된 의미 부여는 현대의 가장 큰 질병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홀로 존재한다는 감각, 내가 삶의 모든 걸 주도하고 통제하면서 스스로 삶을 번창시켜야하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현대인을 불행의 늪으로 내몬다. 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자기 이성만 믿었던 오이디푸스는 끝내 그 똑똑함 탓에 운명의 격변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했다.
경외심은 나 혼자가 아니다,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다는 겸손함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눈먼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아 시련을 이겨내듯, 좋은 삶에는 반드시 타인의 손길이 필요하다. 자아를 누그러뜨리고 협력과 협동의 관계망 속에 자리 잡지 않는 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일찍이 히브리의 한 시인은 노래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신이 있으니 무섭지 않으리.” 경외심은 만연한 고립감과 외로움에서 우리를 위안한다.
또한 경외심은 우리에게 세계의 놀라움을 돌려준다. 내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나를 둘러싼 좁디좁은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 봐야 세계의 진실에 가닿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켈트너에 따르면, 영적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지적 탐구에도 마음이 닫혀 있을 가망성이 높다.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 사람만이 시인이나 천문학자가 되는 법이다. 미지를 깨닫고 호기심을 일으켜 기꺼이 탐구에 나서려면 우리 마음엔 경외심이 필요하다.
물질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종교의 쇠퇴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그러나 세상의 경이와 사물의 신비와 존재의 깊이를 생각지 않는 삶을 살면, 자칫 상상력과 호기심을 잃고 표피적 세계에서 표류할 수 있다. 5만 년 전 우리 조상들이 현재를 넘어서고 나를 초월하는 위대한 존재를 떠올리고 보이지 않은 것의 탐구에 나섰을 때, 비로소 문명이 시작됐다.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과학이 생겨나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있었다. 켈트너는 말한다. “경외심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은 예술, 음악, 과학, 철학, 삶과 죽음에 대해 호기심이 더 높다.” 종교의 쇠퇴가 이러한 호기심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도록 경이로움에 대한 성찰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